[Opinion] 겨울에 만난 여름은 더 특별한 법이니까 - 태국 치앙마이 여행기 [여행]

글 입력 2024.04.18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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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름이 좋다. 정확히 말하면, ‘여름’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을 사랑한다. 울림소리가 이어지는 발음은 부드럽고 포근하다. 여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푸르름과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 빛은 왜인지 아름답게 느껴지는데, 그 안에는 이상하게도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는 것만 같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여름을 겪는다. 나에게도 여러 여름의 기억이 있다. 어떤 여름은 기록적인 폭염으로, 어떤 여름은 태풍과 홍수로, 어떤 여름은 방송사들이 경쟁하듯 제작한 납량특집으로, 어떤 여름은 크고 달았던 수박으로, 어떤 여름은 올림픽으로 기억돼 있다. 내가 겪었던 대부분의 여름은 무척이나 길었다. 그래서일까, 나에게 가장 특별한 여름은 혹독하고 차가운 겨울 속 마주한 찰나의 여름이다. 지난 겨울, 치앙마이에서의 5일이다.

 

 

 

어쩌다 마주친 치앙마이


 

여행은 일종의 도피이기도 하다. 바쁘고 정신없었던 지난여름, 나는 치앙마이 여행을 담은 영상을 봤다. 거리 곳곳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과 한가함에 매료됐다. 특별한 관광지가 없어서 할 게 별로 없다는, 하지만 그게 또 매력이라는 치앙마이. 할 일이 끊이지 않았고, 달갑지 않던 연락이 쏟아지던 그때, 나는 치앙마이로 훌쩍 떠나고 싶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치앙마이를 잊어가던 올겨울, 친구로부터 치앙마이 여행 동행 제안을 받았다. 친구와 함께 여행을 계획했던 이가 일이 생겨 못 오게 됐다는 것. 정신없이 지냈던 작년 여름 이후 치앙마이에 대한 마음은 시들었고, 치앙마이는 ‘언젠가는 가 볼 여행지’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치앙마이를 마주할 기회가 생겼다. 친구의 동행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 후 항공권 예매까지 빠르게 마쳤다. 겨울에 떠나는, 여름으로의 여행이었다.

 

 

 

치앙마이의 아침, 점심, 저녁 - 치앙마이는 포근하다


 

치앙마이는 어딜 가더라도 ‘너무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곳이다. 사람들이 수없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치앙마이 특유의 여유와 평화, 느긋함이 곳곳에 서려 있다.


비록 태양은 뜨거웠지만 습하지 않아 푹푹 찌는 느낌이 없어 여름의 아름다움을 즐기기에 좋았고, 저녁과 밤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마음을 들뜨게 했다. 특히 강한 태양 빛이 잦아드는 초저녁에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약간의 열기 속에서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치앙마이 여행 중 가장 사랑했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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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곳곳의 상점과 식당들은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대개 바깥과 친했다. 그래서 상점이나 식당에 있을 때면 포근하고 따뜻한 여름 바람을 맞으며 바깥 풍경과 사람들, 주변 가게들의 모습을 맘껏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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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는 여러 오토바이가 달리고 있었지만 전혀 소란스럽지 않았다. 길을 걸을 때도 보행자 도로가 없거나 좁아, 항상 차와 오토바이들과 뒤엉켜 다녀야 하지만 위험하진 않다. 대부분의 운전자가 보행자가 우선 길을 건너길 기다려주기 때문이다. 별다른 사고도, 소란도 없는 이유는 누군가가 길을 건널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약간의 여유로움 때문이 아닐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태국어도 부드럽고 포근하다. 살짝 귀여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여행 내내 갔던 과일가게 사장님은 늘 코쿤카(감사합니다)를 느리게, 늘려서 발음했다. 코-오-쿤-카. 밝고 한적한 거리에서 달고 맛있는 과일을 잔뜩 사 들고, 몽글몽글하고 귀여운 태국어를 들으며, 똑같이 코-오-쿤-카라고 화답하는 순간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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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의 밤 - 내향적인 인간의 흥정 실패기


 

치앙마이가 한적하고 여유롭기만 한 곳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밤의 치앙마이는 일순간 화려하고, 번쩍이며,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이 된다. 나이트 바자(야시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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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장에서 파는 의류, 기념품들은 정찰제가 아니다. 정해놓은 가격이 없다는 것은 곧, 부르는 게 값이라는 뜻. 흥정은 필수다. 첫날 갔던 치앙마이 나이트 바자에서 내 목표는 세 개였다. 라탄 재질의 가벼운 가방, 편하게 신을 수 있는 샌들, 코끼리 바지.


마음에 드는 가방을 발견해서 이것저것 구경했다. 역시나 가격표는 없다. ‘하우머치’라고 묻는 순간은 늘 긴장된다. 상인은 무시무시한 가격을 부른다. 한화 약 4~5만 원. 이 가격은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흥정을 시작하지만 자신 있게 흥정할 수가 없다. 사람을 붙잡고 무언가를 계속 제시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어느 정도의 가격이 시세에 맞는지 알 수 없으니 내가 요구하는 가격이 실례가 아닐지 조심스럽다. 결국 소심하게 웅얼거리다 가게를 나왔다.


이후 조금 더 자신 있게 흥정을 하기 시작했지만,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상인들은 가격을 깎는 족족 인상을 찌푸리거나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다. 마음이 안 좋기도 하고, 이런 상황에서 계속 깎아달라고 말하는 게 힘에 부친다. 소위 ‘기가 빨리고’, 피곤해져서 숙소에 돌아가고만 싶어진다. 그래서 늘 원래 내고 싶었던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에서 타협이 이뤄지는데, 별다른 아쉬움 없어 보이는 상인들의 표정을 보면 왠지 손해 본 기분(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이 든다. 샌들을 살 때는 소심한 흥정으로 바로 타협에 이르렀는데, 처음 제시한 가격보다 더 낮게 깎을 수는 없으니 그냥 돈을 낸다. 아, 피곤하다, 피곤해.


내향적인 사람들은 야시장보다는 정찰제로 물건을 파는 가게에 가는 게 좋다. 정찰제 가게에서 사는 물건이 ‘좋은 가격’은 아니더라도, 그곳에서는 터무니없는 바가지 가격과 ‘흥정’이라는 이름의 기 싸움은 피할 수 있다. 다음날, 어제 산 코끼리 바지를 당당히 입고 도이 수텝으로 향하는 썽태우를 탔는데, 똑같은 코끼리 바지를 내가 준 가격의 거의 반값에 사신 분을 만났다.


나의 첫 흥정은 처참히 실패했던 것이다.

 

 

 

나의 첫 오토바이 탑승기 - 두려움을 떨쳐내고 한 발 나아가는 건


 

내가 갔던 태국 치앙마이는 오토바이가 대표적인 교통수단이다. 두 명은 물론이고, 세네 명씩 가족 단위로 한 오토바이에 타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택시 어플에는 오토바이 옵션이 늘 있다. 친구와 함께 다니던 나는 차량을 이동했는데, 그날은 차량이 모두 운행 중이었고, 선택할 수 있는 건 오토바이뿐이었다.


살면서 오토바이를, 그것도 운전자 뒤에 타본 적은 없다. 치앙마이에는 오토바이로 이동하는 여행자들이 정말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오토바이 운전자 뒤에 타서 이동하는 건 정말 위험해 보였다. 자리도 좁았고, 잡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관광객들은 보통 오토바이 좌석 끝 쪽에 있는 대를 잡거나, 운전자의 어깨를 잡았다.


부추기는 친구 덕분에 첫 오토바이를 타게 됐다. 그 와중에 친구가 부른 오토바이가 먼저 와서 혼자 남겨졌는데, 너무 긴장돼서 두근거렸다. 그러는 사이 오토바이 기사님이 도착했고, 처음 타는 나는 어디를 잡아야 하는지 궁금했으나, 그가 알려주는 건 발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정도였다. 사람들이 하던 대로 오토바이 끝 쪽을 잡았는데 정말 아찔했다. 오토바이가 달리기 시작하자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무서웠고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길을 조금 건넜을까, 그가 갑자기 헬멧을 뒤로 건넸다. 앞에 경찰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한 손으로 헬멧을 머리에 쓰고, 다른 손으로 오토바이 뒤쪽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헬멧을 착용하려면 양손이 필요했는데, 손을 도저히 뗄 수가 없어서 헬멧을 한 손으로 잡아 지탱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몇 분이 지나니 오토바이가 익숙해졌다. 심지어는 오토바이 속도를 즐기며 거리 풍경과 사람들을 구경했다. 이후에도 나는 오토바이를 몇 번 더 탔다. 마지막 날 탑승을 위해 오토바이에 올라타다 다리를 심하게 찧기 전까지는. 아, 역시 오토바이는 위험한 게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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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뭐든지 해봐야 알 수 있는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뿌듯함도, 기쁨도, 혹은 후회와 자책도 해봐야 느낄 수 있는 배움들이니까. 당시 썼던 일기에도 무작정 움츠러들고 겁먹지 말고 일단 무조건 해봐야 한다고, 그런 배움을 고작 오토바이를 타고 얻었다고 적어두었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하는 후회의 대부분은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한 것, 조금 더 용기 내지 못한 일들이다. 무모하고 겁 없이 행동했던 나날들은 직후에는 후회가 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되는데, 두려워서, 무서워서 한발 더 나아가지 못했던 건 두고두고 후회로 남는 것 같다. 며칠 전에도 여행을 다녀왔는데, 여행을 마친 지금 후회되는 건 할지 말지 고민했을 때 하지 않은 것, 걱정하고 사리고 조심했던 일들이다.


낯설고 불안해서, 무섭고 두려운 상황에 자신을 믿고 일단 해보자. 뭐든지 해보면 별것이 아닌 게 된다. 뭐든 처음은 떨리고 무섭지만, 두 번째부터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경험들이 많아질수록 내가 감각하는 세상은 더 넓어지리라 믿는다.


물론 우리 삶에는 조심히 살피고, 유보하는 등 보수적으로 행동해야만 하는 순간들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눈과 귀를 모두 막고, 걱정과 염려를 무시한 채, 그저 한 발 한 발 내딛어야만 하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삶의 모든 리스크를 피할 수 없을 테니, 나아가야 하는 그 순간에 내가 지닌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길 바랄 수밖에.


어느덧 추운 겨울바람이 잦아들고 태양 빛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이제 곧 여름이다. 이번 여름은 어떤 것들로 기억될지, 치앙마이에서 보냈던 찰나의 여름을 추억하며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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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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