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가장 먼 곳의 가장 가까운 이야기, 연극 '태양'

글 입력 2021.10.19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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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원래 SF 장르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접해온 SF 작품들은 대부분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느껴졌기에, 공감의 여지가 없어 별다른 여운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SF 작품을 쓴 소설가 천선란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땅에 붙은" 이야기, 내 살갗에 직접적으로 와닿는 이야기를 좋아해 온 나로서는 SF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선호'가 그저 '편견'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최근 하게 됐다. 먼 미래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지금의 우리가 충분히 마음으로 느껴볼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작품들을 만난 덕분이었다. 연극 '태양'은 그런 작품이다.


'태양'은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온 지구를 뒤덮고, 그로 인해 항체를 가진 이와 가지지 못한 이로 나뉘어 버린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그동안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목격해왔다시피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생존의 우선권을 가진 자가 힘을 갖는 법인지라, 항체를 가진 자들은 세상의 정치,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지도층으로 급부상한다. 그들의 유일한 약점은 햇빛이다. 햇빛을 마주하는 순간 죽게 되는 그들은 '밤의 인간', 즉 '녹스'로 불린다. 항체가 없는 자들은 삶의 기반 전반을 녹스에게 의존한 채 빈곤한 삶을 이어간다. 태양 아래 서 있을 수 있다는 것 외에는 녹스보다 나은 것 하나 없는 삶을 사는 그들은 '골동품'이라는 의미의 '큐리오'라고 불린다.


우연히 코로나19 팬데믹과 미묘하게 맞닿아 있는 설정이긴 하나, '태양'은 이처럼 존재하지 않는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극이 시작하고 5분가량은 독백에 가까운 세계관 설명이 이어진다. 그만큼 낯선 세상이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빠르게 몰입할 수 있었다. '태양'의 세계에 담겨 있는 건 다시 한번 천선란 작가의 표현을 빌려 적자면, "땅에 붙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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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에 몰입할 수 있는 요소는 2가지가 있다. 첫째, 계급이다. 양민과 서민, 양반과 노비와 같이 신분의 차이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현대 사회에는 분명한 계급이 존재한다. 부, 성공, 학벌, 사회적 인정 등등 계급의 기준이 되는 요소는 차고 넘친다. '태양'에서는 그것이 단지 항체 유무로 가시화되었을 뿐이고, 무대 위에서는 몸짓, 행동, 옷차림 등으로 전시되었을 뿐이다. 이와 더불어 '태양'은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의 양상을 여럿 제시한다. 이는 카츠야가 녹스를 햇빛 아래 살해하는 것처럼 물리적인 폭력의 모습을 띄기도 하고, 큐리오를 돕겠다고 말하지만 실상 녹스가 '자선을 베푸는' 모습에 더 치중하는 세이지의 말처럼 언어적 폭력이 되기도 하고, 큐리오를 동경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녹스 우월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후지타처럼 정신적인 폭력의 모습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 '태양'의 이야기를 한층 더 다층적으로 만드는 둘째 요소는 "인간다움"이다. '태양'의 이야기에는 분명한 계급 간 격차와 갈등이 존재하지만, 연대 또한 존재한다. 후지타와 데츠히코는 야한 잡지를 함께 보며 스스럼없는 사이가 된다. 성욕은 인간의 본성이다. 계급은 본성을 이길 수 없고, 이들은 본성을 공유하며 계급을 넘은 우정을 쌓는다. 유와 레이코 역시 같은 피를 공유하는 '가족'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이 오가는 관계다. 자신이 두고 떠났음에도 딸에 대한 애정을 여전히 느끼는 레이코와, 녹스가 될 기회를 거부할 만큼 엄마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끼던 유도 엄마를 향한 사랑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후 후지타가 카츠야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연대는 더욱 두드러진다. 데츠히코와 준코는 후지타를 살리기 위해 전력을 다해 노력한다. 계급이고 뭐고, 그저 눈앞에 있는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인류애적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장면에서 인상적인 것은 후지타가 흘린 피에 카츠야가 죽는다는 전개다. 후지타에게 채워진 수갑을 풀 방법을 끝내 찾지 못해 데츠히코가 후지타의 손목을 자르고 마는 순간, 카츠야의 대사처럼 폭력만이 계급 갈등의 해결 방안일지도 모른다는 절망이 무대를 감싼다. 그러나 후지타의 피를 밟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카츠야가, 그것도 자신이 죽인 녹스가 사망할 때의 움직임과 똑같은 몸부림을 친 끝에 죽는다는 것은, (카츠야와, 그가 죽인 녹스는 같은 배우가 연기한다) 폭력을 막는 데에는 누군가의 희생과 많은 이들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했다.


물론 연대만이 인간다움의 표상은 아니다. 다양한 인물들이 극 중에서 서로 연대하고, 대립하고, 친구가 되자 손을 내밀고, 폭력을 행사하고, 서로로 인해 웃음 짓고, 눈물짓는 것, 이 모든 것이 '인간다움'일 테다. 그리고 연극 '태양'은 이 모든 것을 담아낸다. 궁극적으로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작품에 인간이 몰입하지 않을 방도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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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북에 쓰여 있던 한 문장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매력적인 밤이냐? 뜨거운 낮이냐?" 녹스는 젊고 아름다운 육체를 지녔고, 정치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있으며, 바이러스와 빈곤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겐 인간적인 감정이 없다. 유가 큐리오에서 녹스가 되는 과정은 인간성을 전부 잃게 될 정도로 지독한 고문처럼 그려진다. 그 끝에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를 내던 유는 거친 반항기와, 그만큼 가족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했지만 녹스가 되면서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반면 큐리오는 늘 생존의 위협에 시달린다. 바이러스도, 빈곤한 삶도 모두 생존의 위협에 해당한다. 녹스들이 이끌어주는 대로 의존해 살아가야 하는 것이 큐리오의 삶이다. 그러나 큐리오들은 자유롭고, 지혜롭다. 또한 기계가 침범할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영역이라고 불리는 '예술'에 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태양'을 바라볼 수 있다.


매력적인 밤과 뜨거운 낮, 극은 관객에게 당신의 삶은 둘 중 어디로 향하는지, 어디로 향하고 싶은지 묻는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어떤 것을 택할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태양을 바라보며 울면서 웃는 요지의 얼굴과 그를 끝까지 단단하게 붙잡아주던 소이치, 그 앞으로 경주를 하듯 달려 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슬로모션과 같은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 기억난다. 사람은 태양을 등지고 살 수 없다는 요지의 대사와 달리기 1등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행복한 얼굴로 함께 달리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아주 길고 긴 여운으로 남았다. 그렇다면 이미 나의 답은 정해져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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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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