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육식의 종말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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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은 나쁜가? 어떤 점이?
육식의 종말을 읽었다.
제 1장. 소의 신과 통제하는 인간
책은 서양 문명 속에 등장하는 소의 이야기들로 시작된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소를 경배하고 신처럼 여겼으나 신을 위해 그들을 희생시켰고, 제물로 바쳤고, 음식, 의복, 운송수단으로 활용했다.
심지어는 그들을 더 활용하기 쉽도록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소의 타고난 성정을 통제하는 것을 넘어서 발정과 출산을 통제했다. 그런 점에서 송아지의 출생의 시작인 ‘사이드와인더(sidewinder)'의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는 발정기의 암소를 확인하기 위한 방법으로, 황소의 생식기를 옆으로 향하도록 수술하는 것이다.
이 개조된 ’사이드와인더‘는 발정기의 암소를 보면 흥분하여 올라타려 시도하지만 생식기가 휘어져 있기에 삽입까지 이르지 못하고 턱 끝에 있는 표식기를 통해 암소에게 물감을 남기게 된다. 목장주는 이 표식기를 통해 발정기의 암소를 파악하고 격리시켜 인공수정을 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서는 동시 발정 약품을 통해 발정 주기를 통제하고, 예정된 계획에 따라 송아지의 이상적인 출생 시기를 맞추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린 수송아지는 성질을 ‘유순하게’ 만들고 양질의 쇠고기를 얻기 위해 거세된다.(이 거세의 방법이 극히 잔인한데 굳이 언급하진 않겠다) 또한 서로 상처 입힐 수 없도록 뿔의 뿌리를 태우거나 전자 뿔 제거기를 이용해 없애기도 하고, 나이든 수소의 경우 아예 톱을 사용해 뿔을 잘라내기도 한다. 이들은 하나의 생명이 아닌 재산이나 육우로 여겨지기에 그에 맞춰 관리되고 개조된다.
물론 이는 미국의 이야기고, 이 책에서 한국의 축산 환경까지는 다루고 있지 않다. 하지만 육류의 소비가 증가하는 시대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길러지는 가축들이 얼마나 이상적인 환경에 살고 있을지는 사실 안 봐도 뻔한 이야기다.
제 2장. 쇠고기 클럽과 굶주린 사람들
미국인들은 어려서부터 쇠고기를 좋아하도록 길들여진다. 7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일주일에 평균 1,7개의 햄버거를 먹고, 7세 이상 13세 미만의 어린이들은 일주일 평균 6.2개의 햄버거를 먹는다. 이는 점점 로스트 비프나 스테이크 같은 육류 소비로 확장되어 단백질 중독에 이르게 된다.
비단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오스트레일리아나 서구 유럽 또한 만만치 않은 쇠고기 소비량을 보이고 있고, 일본이나 한국 또한 그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꾸준히 육류소비가 증가하고 있다.
육류의 섭취는 단순히 음식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소득의 수준과도 연관을 보이는데,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에서는 국민총생산(GNP)의 급격한 상승에 따라 육류 제품의 소비도 가파른 상승세를 나타냈다. 이러한 육류, 특히 쇠고기 소비 정도는 각국의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다. 소득 수준이 높은 집단일수록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낮은 집단에 비해 지방, 단백질, 칼로리를 동물성 음식에서 섭취하고 있었다. 부유한 나라일수록 밀가루를 적게 섭취하고 그 칼로리를 육류에서 대신 섭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쇠고기 소비가 부와 지위를 드러내는 특권의 한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현상과도 관련이 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쇠고기 소비는 부의 상징을 넘어 국가적 지위로 작용했다. 실제로 쇠고기의 생산과 유통은 서구 문화의 확장에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으며, 정치적 장악을 위한 책임을 맡기도 했다.
쇠고기 소비에 대한 문제는 단순한 ‘입맛’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인류의 가장 복잡한 문제인 사회 정의와 평등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수백만 인구가 최소한의 일일권장 칼로리를 섭취하지 못하는 가운데 극소수의 특권층이 곡물 사료로 사육된 쇠고기를 소비하는 현상은 현재 우리 문명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육류의 소비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체화된다. 육식 문화 안에서 육류의 소비는 당연한 즐거움으로 자리 잡으며, 때론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런 당연함 속에서 육식에 얽힌 다양한 권력 관계와 이해관계를 인식하는 것은 육식 문화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시발점이 될 것이다.
제 3장. 고기 싫어하는 사람 있어?
체화된 육식은 인간의 삶 속에서 가치관을 형성하고, 문화가 되어 자리 잡는다. 한국 사회에서도 그렇다. 사람들에게 있어 육식은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문학 작품 속의 ‘고기 반찬’은 부의 상징이자 가난한 부모가 죄책감을 느끼는 소재였고, 최근 들어서는 ‘저기압일 때는 고기 앞으로’라는 말이 생길정도로 ‘고기’는 기분을 북돋워주는 인생의 즐거움이 되었다. 또한 ‘고기를 썰다’같은 표현은 그 중에서도 가격이 높은 쇠고기 스테이크를 먹는다는 뜻으로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육식 문화에서 육식은 당연한 것이기에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게 비춰지거나 동정을 사기도 한다. 하지만 육식 문화는 바뀌어야할 필요가 있다.
제 4장. 짐승과 꽃
소의 수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고, 이는 생태계에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소 방목용 목초지 개간으로 사막화가 진행되고, 사육장에서 흘러나온 축산 폐기물은 지하수 오염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소를 포함한 여러 가축들은 미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곡물의 70%를 소비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육식의 문제는 비단 환경과 생태계의 교란만이 아니다. 육식은 인간의 다양한 본성과 심리를 대변하고 있기도 한데,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육식이 남녀의 차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헤겔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동물과 식물간의 차이와 흡사하다. 남성은 동물에 대응하고 여성은 식물에 대응한다. 여성의 성장이 보다 조용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했는데, 이는 언어에서도 극명히 나타난다.
지난 세기의 표현들을 살펴보면 남성은 ’beefcakes(늠름한 사내)‘, ’animals(짐승)‘으로 표현됨에 반해 여성은 ’hot tomatoes(매력적인 여자)‘, ’shrinking violets(수줍음 타는 아가씨)‘로 불렸다. 인식해본 적이 없을 지도 모르지만 육식 문화에서의 성차별과 계급차별은 여전히 식사습관과 표현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육식 문화는 단순한 생태계의 파괴를 넘어서 남성지배의 영속화와 계급차별을 조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화적 상징이 나타내는 선입견과 구시대적 영향력은 분명히 바뀌어야 하고, 사라져야 함이 마땅하다.
제 5장. 육식의 종말
그렇다면 육식이 사라지면 이러한 문제가 모두 해결될까?
육식의 종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육식의 종말은 곧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그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자연을 정복되고 길들여져야 할 것이 아니라 생물과 근본적 공동체로 인식하는 일이다. 또한 생태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방목지로 개간된 자연을 되돌리고 그 안의 생태를 돌보는 것이다.
육식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릴 적엔 가정에서 엄마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었고, 학교에 가서는 급식을 배식 받아먹었기 때문이었다. 알레르기가 있는 식품을 피하는 것도 어려운데 육식을 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육식 문화의 개선이 단순히 개인의 취향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개인의 노력이 모여 큰 흐름을 만들어낸다. 육식 문화를 초월해 우리와 자연을 원상태로 돌리고 새로운 인류를 향한 중요한 움직임을 실천하자.
[고연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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