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선이 곧 권력 [문화 전반]

글 입력 2021.10.10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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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폭력성 



최근에 누군가 내 얼굴에 후레시를 비춘 적이 있다. 그 사람과 나는 어두운 밤에 같은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밝은 빛을 마주하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에는 어렴풋이 적응했던 눈이 그토록 밝은 빛에는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내 얼굴에 빛을 비춘 상태로 몇가지 질문을 했고, 나는 두렵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하얀 빛 뿐인데 건너편에서는 나의 모습을 뜯어보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어둠속에서 질문을 받는 짧은 순간 동안 나는 시선의 폭력성을 떠올렸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옛날 점령과 후퇴를 반복하던 6.25 전쟁 때의 이야기다. 전쟁을 피해 야간에 도망을 가다보면 가끔씩 군인들이 눈앞에 횃불을 들이대고 “너는 어디 편이냐?” 혹은 “북이냐 남이냐”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면 정치나 이념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시골에서 농사 지으며 살아가던 이들에게 이 상황은 자신과 가족 모두의 목숨을 건 50대 50 확률의 도박이 된다. 횃불 너머의 군복은 보이지 않고, 어느 쪽을 선택해야 살 수 있을지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지혜로운 한 가장은 이야기에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우매한 저는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니 가르침을 주시면 따르겠습니다” 아마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겨우 살아남았다.




판옵티콘과 건축의 시선


 

볼 수 있고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은 권력과 연결되어 있다. 한쪽은 볼 수 있는데 한쪽은 볼 수 없다는 것. 한쪽은 숨길 수 있는데, 한쪽은 보여져야만 한다는 것.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판옵티콘(Panopticon)이 떠오른다.


판옵티콘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를 뜻하는 ‘opticon’의 합성어로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감옥의 형태다. 판옵티콘의 중앙에는 높은 감시탑이 있고 그 감시탑을 따라 원형으로 죄수들의 방을 설계해서 중앙에서 언제든 죄수들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감시탑은 어둡게, 수감자들의 방은 밝게 비춰져 있어 죄수들은 방에서 감시자를 볼 수가 없다.


죄수들은 언제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언제든 감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채 죄수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할 수 있는 판옵티콘은 흔히 근대 권력의 전형으로 표현된다. 시선의 차이가 앎의 차이를 낳고, 정보의 불균형은 권력을 낳는 것이다. 어떤 시선으로(어떤 위치에서) 볼 수 있는가는 이토록 중요한 문제이다.

 

 


 

유현준 건축가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같은 시선의 차이는 오늘날 건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영상에서 반지하가 없어져야할 주거 양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반지하가 안 좋은 공간이라고 설명하는 이유 중 하나는 ‘누구든지 감시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시에서 높이 레벨의 기준점이 될 만한 것은 ‘도로’이고, 반지하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생활하고 돌아다니는 도로보다 낮은 레벨에서 생활하는 공간이다. 반지하는 쉽게 내려다보이는 공간이므로, 비가오면 물이 잘 들어온다거나 곰팡이가 쉽게 핀다거나 벌레가 자주 들어온다거나 하는 이유를 제외하더라도 사람이 살기에 좋지 않은 공간이 된다.


높이의 차이는 권력의 위계관계가 발생하기 쉬운 구조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밑에 있는 사람을 쉽게 훔쳐볼 수 있고, 밑에 있는 사람은 올려다보느라 위에 있는 사람의 전체 모습을 잘 볼 수 없다. 그래서 펜트하우스가 항상 꼭대기층에 있는 것이고, 교장선생님도 뭐든지 단상에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시는 것이라 유현준 건축가는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영화에서도 이런 관점으로 해석하면 보다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건축학개론>에서 남자 주인공이 반지하로 이사한 여자 주인공 집에 가서 커튼을 달아주는 장면은 단순히 커튼을 달아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사람을 지켜주고 싶어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투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높이에 따른 사회적 위치(권력과 부의 차이)가 잘 드러나고 있는데, 각 주인공들의 거주공간을 계단을 올라가서 들어가야 하는 부잣집, 도로보다 아래 반지하에 있는 주인공의 집 그리고 그보다 하층민들이 살고 있는 지하공간으로 설정해 상대적인 사회적 위치를 공간적 위치를 통해 드러낸다는 것이다.




각자의 시선과 각자의 입장에서



시선의 따른 권력은 건축 환경같이 물리적인 높이 차이에서도 발생하지만, 위치와 입장이라는 개념을 포함할 수도 있다.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알고 있는 위치와 그렇지 않은 위치, 내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위치와 아닐 수 있는 위치 같은 것 말이다.


악플로 인해 남들보다 조금 일찍 생을 마감한 연예인의 사건을 두고 한 전문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인터넷 공간에서 익명에 몸을 숨기고 쉽게 발화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고. 꼭 물리적인 현실공간이 아니더라도 숨기지 못하고 보여져야 하는 이와 자신을 숨긴채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자 사이에는 권력 구조가 성립한다.


물론 누구나 아는 것처럼 인터넷 이용자들에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권력, 또는 권리와 권한을 부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다양한 입장과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인터넷공간에서든 현실이든,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의 입장이든 판매하는 입장이든 말이다. 그만큼 서로가 서로를 쉽게 누군가를 공격할 수 있고 상처 입힐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요즘은 내가 가진 시선과 입장이 혹시 폭력적이지는 않은지 고민하고 있다. 내가 말하는 방식과 환경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하는 곳에서 동료가 이름만 불러놓고 한동안 다음 말이 없는 상사가 싫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무슨 일 때문에 부른 건지 모르는 상태에서 긴장하며 앞 사람의 다음 말만을 기다리고 있자면 배려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위치에서 어떤 방식으로 말을 하고 있었을까 돌아보게 됐다.


내 얼굴에 후레시를 비추고 질문하던 사람도 아마 큰 고민 없이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큰 고민 없이 그런 행동을 할 수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 많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나 역시 다양한 입장과 위치를 가지고 있다면, 조금 더 많이 고민하자고, 서로에게 조금 더 잘해주자는 별거 아닌 생각을 오늘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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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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