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간의 개념을 빼앗는 외계인의 등장?! :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

글 입력 2021.08.14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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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는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

(마에카와 토모히로 작 · 이기쁨 연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의 '개념'을 누군가에게 빼앗긴다면?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차별'이라는 개념을 빼앗겼다고 가정해보자. '차별'이라는 단어 자체는 알고는 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차별'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정확히 설명하지도 못할뿐더러, 당신이 가졌던 수많은 '차별'들은 이제 당신 안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저질렀던 '차별'들은 이제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불행의 시작인 것일까? 인간에게 있어서 개념을 빼앗긴다는 것은 뭐고, 학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재밌는 상상에서 비롯되어 '인간다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확장시킨 작품이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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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산책하는 침략자>는 2018년과 2019년 초연과 재연 이후 두산아트센터와 창작집단 LAS의 공동기획 작품으로 2021년 7월 31일부터 8월 15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세 번째로 관객들과 만난다.

 

 

시놉시스

 

해안가의 작은 항구 마을.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져 매일 같이 미군 기지의 전투기 소리에 불안감이 고조된 그곳에서 3일간 실종되었다 돌아온 남편 '신지'는 아내 '나루미'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어린아이처럼 변해버린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한 할머니가 일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하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나고, 심지어 마을에선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병이 돌며 환자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신지는 그저 매일 어슬렁거리며 산책만 하고 있다. 그런 신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루미. 그러던 어느 날, 신지는 나루미에게 놀라운 사실을 고백하는데....

 

"실은 나, 외계인이야."

 

 

시놉시스만 읽는다면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미스터리한 범죄를 다룬 이야기처럼 읽히기도 한다. 극에서는 실제로 이 미스터리한 일들의 원인을 초반부터 드러내지 않는다. 극 중 캐릭터 [신지]를 중심으로 이 알 수 없는 일들의 실마리들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바로, 다름 아닌 외계인에게서 모두 비롯된 일이라는 것이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외계인이 인간의 '개념'을 빼앗아가면서 한 마을을 쑥대밭을 만들어 놓는 거다.

 

이렇듯 마에카와 토모히로의 희곡 <산책하는 침략자>는 인간의 몸에 영혼처럼 침투한 외계인들이 한 마을에서 인간의 '개념'을 수집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수집한 개념을 통해 인간에 대해 배워가며 궁극적으로는 지구를 정복하고자 하는 외계인들과, 개념을 빼앗기면 다시는 그 개념을 되찾을 수 없는 인간들이 점차 변해가는 모습이 대조되며 극은 유쾌하게 진행된다. 그러다가 점차 외계인의 계략을 눈치채고 그들을 막으려는 인간과, 외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끝까지 믿지 못하는 인간, 그리고 지구 정복을 해내려는 외계인이 충돌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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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개념을 '뺏는다'는 것과 '빼앗긴다'는 것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외계인은 인간의 개념을 빼앗아 학습하고, 개념을 빼앗긴 인간은 그 개념을 잃어버린다. 극 중 개념을 빼앗긴 인물인 [마루오 세이치]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마루오 세이치]는 해안가 근처에 거주하며, 실업 급여로 연명하는 실직자 청년 캐릭터다. 이 인물은 삶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권태에 빠져 있다. 마을에는 미군 기지의 전투기 소리가 끊이지 않고, 그는 차라리 이렇게 무료하게 살 바엔 '차라리 제로부터 시작하자'라며 전쟁이라도 일어나길 바란다. 그러던 어느 날, 외계인에게서 의식을 지배당한 [신지]가 산책하던 중, 그 둘은 만나게 되고 대화를 나눈다. [신지]는 대화 말미에서 [마루오 세이치]의 이마에 손가락을 얹고, 그에게서 '소유'라는 개념을 빼앗는다. '소유'의 개념을 빼앗긴 [마루오 세이치]는 자신도 모르게 잠깐 동안의 눈물을 흘리다가, 곧이어 그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가 맞이한다. 다름 아닌 '반전운동가' 되어 나선 것이다. 전쟁은 국가나 집단 사이의 이해관계의 충돌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마루오 세이치]는 이 이해관계에 있어서 필수적인 '소유'라는 개념을 빼앗겼으니, 구태여 인간들끼리 죽여가며 전쟁을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전쟁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마루오 세이치]는 '원래부터 없던 것이 빠져나간 기분'이라며,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해방감을 느끼고 다른 인물에게도 [신지]를 통해 '억압된 사슬을 끊을 것'을 추천한다.

 

이 외에도 '나와 남을 구별하는 개념'을 빼앗긴 인물, '인간관계'를 빼앗긴 인물 등이 등장한다. 마을은 서서히 이런저런 개념을 빼앗긴 사람들로 인하여 쑥대밭이 되어가고, 외계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로 포악하게 개념을 빼앗으며 서서히 인간과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초반엔 마치 AI와 같은 딱딱한 어조로 이야기하던 [신지]는 점점 더 '자연스러워'진다. 즉, 보다 더 사회적인 인물이 된다.

 

공연을 관람하며 내내 들었던 생각은 개념이란 무엇이냐는 것이다.

 

개념은 영어로 'concept'이다. 단어 속의 'cept'는 '잡다'라는 의미를 가진 어근이다. 독일어로는 'Begriff'라고 하는데 역시 '잡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개념이라는 것은 주어진 세계의 의미를 잡아챈 의식의 결과라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인 '파악(把握)'도 '잡을 파'에 '쥘 악'이다. 개념은 외부 세계를 파악하는 인간 의식 활동 중 하나인 것이다.

 

철학에 있어 개념은 '하나의 범주에 속하는 모든 개체에 공통되는 특성을 묶어주는 관념'으로, 역시나 세계를 파악하는 인간 의식의 도구이다. 인간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대면하는 순간에 그 세계를 파악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의식 속에 있는 개념으로서 세계를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주어진 대상들을 그 특성에 따라 구분 짓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인이 가진 개념의 틀을 거친 후 이 세계의 사물들을 구분 지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주목해야 할 점이 개념과 '정의'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외계인은 인간에게 '금지'라는 개념을 빼앗기 위해 '금지'를 떠올려 보라고 한다. 그럼 인간은 '금지'에 대한 지극히 사전적인 정의를 꺼내놓고, 외계인은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인물에게 요구한다. "아니, 그런 거 말고, 네가 생각하는 '금지' 말이야. 그래, 그거." 그 인간이 생각을 가다듬으려고 하면, 외계인은 가차 없이 인물에게서 그 개념을 빼앗아 간다.

 

이러한 장면은 우리에게서 평소 익숙한 단어들이 가진 의미에 대해서 정확히 그 의미를 알고 있었냐는 질문을 던진다. 정작 그 의미는 정확히 알지 못하거나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공허한 '정의'만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닌지 고민하게끔 한다.

 

더불어서, 작품에서 외계인이 인간에게 빼앗아가는 개념은 관념에 가까운 추상적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직접 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개념을 빼앗는 것이다. 우리는 관찰할 수 없었던 그 개념을, 무대 위에서 개념을 빼앗아가며 학습하는 외계인의 모습을 통해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개념의 의미들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 우린 소중한 것에 대해서 말하는 거 잘 못해."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 중에서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 중에서 외계인이 아닌 인간들이 했던 대사 중 일부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은 때론 우리에게 소중한 것들이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사랑'이라는 개념이, '자유'라는 개념이 그렇다.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구태여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핑계이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소중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익숙하지 않아 하며, 서서히 이야기하는 방법조차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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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원작의 매력을 끌어올린 섬세한 연출, 그리고 뻔하지 않은 SF


 

소재는 SF 적이지만 소재를 풀어내는 인물들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시민들이고, 배경 또한 일반적인 일본의 작은 항구 마을이다. 바로 이 점에서 뻔한 SF와의 차별성이 대두된다. 또한 극에서 외계인들은 "나, 외계인이야."라고 스스럼없이 밝히며 당당하게 지구를 정복하러 왔다고 밝힌다. 그런데도 별 타격은 없다. 주변 인물들은 외계인이라는 그 선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작품에서는 SF가 흔히들 가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외계인의 클리셰들을 모조리 박살 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통쾌한 웃음을 유발해낸다.

 

<산책하는 침략자> 희곡은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소설로도 출판되기도 했다. 일본 희곡 <산책하는 침략자>를 한국에서의 공연용 대본으로 번역한 이홍이 번역가는 작품의 프로그램 북에서 <산책하는 침략자>의 소설과 희곡의 다른 점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소설은 [나루미]와 [사쿠라이]를 중심으로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자세히 나오고, 극 중 배경인 마을의 정경도 생생하게 펼쳐진다고 한다. 동해에 면한 해안가 마을인 이곳은, 사실 작가가 만든 가공의 공간이지만, 실제 존재하는 동네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매력적인 지점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희곡에서는 장소가 주는 분위기를 느끼기는 어렵지만, 인물들의 내면이 가려진 상태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으로 하여금 더 큰 상상을 하게 해주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는 인물과 인물 사이의 관계성, 그리고 각 인물마다의 특징 있는 캐릭터성을 잘 녹여낸 작품이다. 외계인이 육체에 들어가 의식이 지배당한 [신지]를 다루는 주변 인물들의 반응은 [신지]가 어떤 인물이었을지 상상하는 재미를 안겨준다.

 

더불어 일상에 대한 권태를 느끼는 [마루오 세이치]와 그의 후배인 [하세베 와타루]가 나누는 대화 중 '차라리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게 나으니 전쟁이나 터져라'의 부분은 인상 깊다. 필자 또한 또래 친구들과 모이면 한창 바쁜 수다를 떨다가 멍하니 하늘을 보며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것 같다. "차라리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더 이상 최선을 다해 하루를 꽉 채워 살아가는 것도 지치고, 그렇다고 손을 놓고 카르페디엠을 외치며 욜로의 삶을 살기엔 벅차다. 마치 [마루오 세이치]와 [하세베 와타루]처럼 말이다. 오늘날 한국에서의 MZ 세대가 가진 일상의 권태와 무력감이 잘 녹아져 있는 대화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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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감각적인 무대와 독특한 음악의 사용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에서는 무대 디자인과 감각적인 음악이 돋보인다. 무대 디자인은 심플하고 단순하며 음악은 어딘가 불규칙하게 선율이 어긋나있다.

 

프로그램 북에서 이기쁨 연출의 인터뷰 내용에 의하면, 이기쁨 연출은 이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직업이나 어떤 유형의 사람을 대표할 수 있는 지점처럼 느껴졌다고 밝혔다. 특히 작품 중 등장하는 저널리스트, 경찰, 의사, 학생, 회사원 등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마치 '레고' 장난감의 사람 인형들처럼 말이다. 둥근 지구처럼 동그랗게 엮어진 가지각색의 세상 위에 오밀조밀 빙글빙글 돌아가며 산책하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를 통해 관객들이 마치 장난감 세상을 보듯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모여 복닥거리며 만들어내는 기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관망하듯 볼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무대 위를 끊이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단순한 '원'의 구조로 구성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프로그램 북에는 윤지예 음악감독의 글도 실려 있었다. 극의 진행과 주인공, 상황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화되어 변형되도록 의도했으며, 전반적으로 음악은 미묘하게 어긋나며 해결되지 않는 느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분위기를 형성하여 서서히 외계인에 의해 개념을 상실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영상 디자인은 장소 변화가 이루어질 때마다, 장소에 관한 설명이 문구로 무대 뒷 벽에 맺히도록 하였다. 잦은 공간 변화 속에서 관객들이 혼동하지 않도록 설명이 이루어졌다.

 

이렇듯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에서의 무대 디자인과 음악은 튀거나 어색한 것이 아니라, 작품 전체의 매력을 효과적으로 극대화했다. 미니멀하면서도 특징 있는 무대 디자인은 이기쁨 연출이 의도했듯이 무대 위에 선 인물들을 장난감 세상 보듯 관망하도록 했고, 신비감 있는 독특한 음악의 사용은 극에 더욱더 빠져드는 몰입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

 

지금까지 두산아트센터와 창작집단 LAS의 공동기획으로 만들어진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마에카와 토모히로 작 · 이기쁨 연출)의 리뷰였다.

 

독특하고 간결한 설정 속에서 점점 치닫는 사건의 진행과, 그 안에서 아옹다옹 살아가는 인물들을 관람하는 재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연극이 이끄는 대로 진행되는 드라마에 한껏 몰입하여 관람하다 보면, 어느덧 입가에 피식피식 미소가 맺히게 되고, 결국 맞이하게 될 결말에서 나루미와 신지의 모습을 통해 뜨거운 여운을 안을 수 있을 것이다.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 공연, 자신있게 추천한다.

 

 

참고 자료 출처

「대순회보」 철학과의 만남 : '개념'이란 무엇인가요? (연구위원 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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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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