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숫자애호

홀수의 폭신한 매력에 대해
글 입력 2021.07.02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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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숫자를 마주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학창 시절에는 수학을 극도로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즐기지도 않았기에 문과를 선택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숫자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고별식도 없이 숫자는 나와 멀어졌다. 그런데 얼마 전, 다시 보이기 시작한 숫자가 머릿속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숫자가 다시 나타난 것은 모두 ‘컴활’ 때문이다. 컴활은 컴퓨터활용능력의 줄인 말로, 스펙을 위해 너나 나나 취득한다고 하는(그러나 합격률은 매우 낮은) 자격증이다. 나는 지식이 전무한 엑셀과 엑세스 프로그램을 마스터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네모 칸, 문자, 그리고 숫자와 함께 보내고 있다. 네모 칸에 갇힌 숫자와 문자의 모습은 정말 낯설다.

 

사실 문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자가 결박된 모습은 행정직 공무원이 문서작성을 하는 것만큼 당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칸마다 입력된 문자는 정갈하고 안정된 모습이다. 하지만 숫자는 그렇지 않다. 비좁은 새장을 뚫고 나가려는 새처럼 안쓰러운 모습이다.

 

 

숫자들.jpg

 

 

한 번 눈에 밟힌 숫자는 일상의 곳곳에 침투해버렸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숫자가 불쑥 튀어나온다. 달력에 적힌 2021년, 물병에 적힌 2.0L, 휴지의 크기를 나타내는 180mm*140mm, 과자 봉지에 적힌 20g과 80kcal. 저마다 다른 문자와 함께한다. 사실 문자가 필요 없을 때도 있다. 6월 30일은 0630으로도 뜻이 통하기 때문이다. ‘월’과 ‘일’ 사이에 끼인 모습보다는 숫자만 있는 0630이 마음에 든다.

 

주변을 떠나지 않는 숫자를 호통치기보다는 차라리 예뻐해 주기로 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2, 0, 1,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의 5, 7, <디스트릭트 9>의 9, <넘버 3>의 3, <8월의 크리스마스>의 8, <4월 이야기>의 4, <여섯 개의 형상들>의 (보이지 않는) 6. 모든 것에서 숫자만 떼어내 찬찬히 쓰다듬어 주기로 한다.

 

*

 

0부터 9까지 하나씩 음미하다 보니 특정 숫자에 대한 애호가 꿈틀꿈틀 자라났다. 2보다는 1이 좋고, 7보다는 5가 좋고, 짝수보다는 홀수가 좋다. 생각해보면 꽤 오래전부터 홀수를 좋아했다. 언제나 2468보다는 1357이 풍기는 느낌이 좋았다. 짝수보다 홀수가 더 둥글둥글하다고 해야 할까? 포근하고 폭신한 맛이 있다.

 

그래서 난 내 생일이 좋았다. 5월 23일. 홀수가 2개나 들어있다. 홀수 사이에 불청객처럼 껴 있는 짝수 2도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다. 5와 3의 푹신함이 2의 딱딱함도 약간은 덜어줄 것 같다. 523에서 2가 차지하는 부피는 실제보다 적다. 풍성한 구름 사이 슬쩍 보이는 비행기 정도의 느낌으로.

 

홀수는 놀이터다. 3의 곡선에서 미끄러지기도 하고, 7이 내건 그네를 휘청휘청 흔들며 탈 수도 있다. 5를 잡고 콩콩 뛰어다닐 수도 있고, 1을 타고 내려올 수도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홀수를 상상하는 일은 즐겁고 신난다. 그에 반해, 짝수는 막혀 있는 구석이 많아 도망치려는 나를 잡아 제 속에 붙들 것 같다.

 

짝수는 어려울 때 찾아가면 2로 단번에 나뉘는 제 성질처럼 단호하게 나를 내칠 것 같다. 하지만 홀수는 제아무리 2로 나눠도 결국 하나를 남기듯 그 떠나가지 못하는 미련 앞에서 나를 보살펴줄 것 같다. 지폐도 6만 원권이 아니라 5만 원권이 있어 참 다행이다. 홀수는 정겹다.

 

다시 엑셀로 돌아가 칸에 갇힌 숫자를 보려니 마음이 아파진다. 이렇게 된 이상 시험에 합격해서 네모로 가득한 세계를 장악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주인이 되면 가장 먼저 숫자를 꺼내주어야지. 여기저기 신나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해 주어야지.

 

 

[임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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