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타건하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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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치는 삶
돌이켜 보면 피아노는 언제나 곁에 있었다. 악기를 배우지 않았던 때에도 클래식을 종종 듣곤 했기 때문이다. 클래식이라는 장르가 낯설지 않게 다가왔던 건, 아마 모차르트의 음악으로 태교를 한 어머니 덕이 아닐까 싶다. 어린 나이에도 동요만큼 연주곡이 좋았으니 말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그 시절 많은 친구들이 그랬듯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계기는 다음과 같다. 당시 유치원에서 음악 시간에 멜로디언을 배웠다. 음악 수업을 한 날이면, 하원 후 어린 동생과 어머니를 앞에 두고 멜로디언 연주를 하거나 종이에 건반을 그려서 배웠던 곡들을 선보이곤 했다. 고사리 같은 손을 움직이며 흥얼대던 딸의 모습을 보고, 그 길로 부모님은 동네 피아노 학원에 등록을 해주셨다. 좋아하는 걸 해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 아니겠나.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우면서 음악에 대한 마음은 점점 커져갔다. 그렇게 음악은 어느새 삶의 일부가 되었다. 8년 간 학원을 다니며, 한때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을 정도로 연주에 푹 빠졌었다. 연주자에 따라 같은 악보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농이나 체르니 같이 기본기를 다지는 곡보다는, 소나티네나 쇼팽 혹은 슈베르트의 악보를 연주할 때 재미를 느꼈다. 악보가 손에 익을 때까지는 힘들지만, 이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게 피아노 연주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멜로디와 악상을 익히고, 곡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실어 온몸으로 연주하는 걸 즐겼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어린 시절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돌이켜 보면 산만함을 아주 건설적인 방향으로 잘 표출했다는 생각이 든다. 선율에 따라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한 음 한 음 정성스레 누른 행위의 조합이 하나의 멋진 곡이 된다는 것은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참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곡을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했구나' 하는 만족감이 들 때의 뿌듯함은 말할 수 없을만큼 컸다. 이렇게 글로 기억을 더듬다 보니, 기분 좋게 학원을 나서서 집에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피아노 앞에 앉아 홀로 연습했던 모습이 눈 앞에 선하다.
지금은 거의 연주하지 않지만, 여전히 피아노 연주곡을 자주 감상한다. 듣고 있으면 편안함이 마음에 찾아든다. 일부러 여러 연주자의 영상을 보며 감각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있다. 마음 한 켠에 다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로 그들의 마음을 어루 만져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취미 하나가 생겼다. 바로 키보드다. 몇 해 전부터 눈독 들이고 있었지만, 학생에게 무슨 돈이 있었겠나.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하는 족족 생활비 혹은 친구들과 노는 데에 쓰기 바빴기 때문에 취미에 돈을 쓰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키보드 전문 유튜브 영상을 보며 대리만족하는 것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달래곤 했다.
축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 또 손수 키를 하나하나 윤활하고 또 흡음재를 넣는 등 사용자의 손길을 거쳐 달라지는 키감과 독특한 소리는 정말이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전자기기를 굳이 바꾸지 않아도 키보드라는 제품을 통해 매일 새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글을 쓰는 재미도 배가 될 거라는 이상한 믿음이 키보드를 향한 갈망과 함께 커져갔다.
그렇게 늘 상상만 하던 키보드를 처음으로 손에 넣게 된 것은 5년 전 어느 연말이었다. 이별 후 헛헛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이런 저런 활동을 하던 시절, 시집에 빠져있었던 나는 필사를 다른 방식으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길로 지갑 사정에 맞는 키보드 제품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원하는 디자인의 키보드를 좋은 가격에 들일 기회를 포착했고, 곧바로 매장에 달려가 새로운 시집과 함께 구매했다. 그 후 몇 개월 동안은 열심히 키보드를 사용했다. 잃어버리기 전까지 말이다.
본격적으로 입문한 것은 작년 초다. 당시 코로나에 걸려 1주일이라는 격리 기간을 거쳐야 했기에, 얼떨결에 휴가를 얻게 되었다. 내향형 인간이지만 혼자 밖에 나가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곤 했기에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였다.
어떻게 그 시간을 알차게 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글이나 써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키보드 매물이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실 사용을 거의 하지 않은 세 제품. 이전부터 제품을 구입하려고 열심히 찾아보았던 터라, 현재 쓰고 있는 기기와도 호환이 아주 잘 되고 또 가성비가 좋다는 것을 익히 알던 모델이었다. 안 사고는 못 베기겠어서, 그 길로 친구에게 대신 거래를 부탁했고 그렇게 첫 번째 키보드를 손에 넣게 되었다.
꿈에 그리던 물건을 손에 넣었으니 얼마나 신났겠는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있을테니까. 손에 넣은 직후부터, 몇 달 간 신이 나게 키보드를 사용했다. 키를 하나하나 해체하여 간이 윤활도 하고,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덮개를 씌우는 등 애지중지하기 바빴다. 꾸준히 사용을 하다 보니, 아쉬운 점이 하나 둘 보이긴 했지만 아무렴 좋았다. 키보드를 빌미 삼아, 휴일에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글쓰는 시간이 기대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키보드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커졌고, 그 결과 현재 총 4개의 키보드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휴대성이 좋은 키보드부터 무접점 키보드까지 다양하게 갖고 있는데, 기분에 따라 키보드를 바꾸거나 때와 장소에 맞게 사용할 수 있어 괜히 든든하다. 사실 소모품이라 한 번에 이렇게까지 많은 가짓수가 필요한가 싶은 순간이 많지만, 언제나 그렇듯 취미는 자기 만족이니까.
행위의 유사성 : 타건
어느 날, 문득 자판을 두드리다가 든 생각이 있다. 건반을 누르고 자판을 치는 일 모두 ‘타건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어릴 때부터 시작된 습관이라고 한다면 습관인 건반을 누르는 행위가 또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두 행위는 감각 기관 중에서도 손, 그러니까 손가락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실재하는 감각기관을 통해, 무형의 것을 만들어 내는 데에 소질이 있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 피아노도, 글도 그 무엇 하나 아직까지 완벽한 수준에 이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타건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사실만은 자명하다. 꼭 완벽하게 해내야만 만족감이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러한 행위에서 그토록 기쁨을 느낄까?”
곰곰이 생각하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선 키보드와 건반은 원하는 세계를 직접 내 손으로 그려내도록 도와준다. 흰 도화지에 그림 그리는 듯한 느낌은 마치 탄산음료를 마신 것과 비슷한 기분을 준다. 시원하고 짜릿하다. 그래서 끊을 수가 없다. 머리로만 그리던 원하는 세계를 현실로 가져오는 ‘타건’은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려준다. 마음 속에 담아두던 것을 문장으로 엮는 일, 오선지 위에 있던 음표가 건반 위에서 뛰놀게 하는 일. 그러니까, 표현하기 전까지 세상에 살아있지 않던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 그 일은 성스럽게 느껴질 만큼 의미 있기 때문에 기쁘다. 한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낳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만남을 ‘나라는 세계가 또 다른 세계를 만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내가 타건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 또한 이와 비슷하다. 그것이 나를 한 번 거쳐 나온 것일지라도, 내가 발 딛고 있는 세계에서 직접적으로 만난 것과는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마치 본 적 없던 것을 마주한 느낌이 들 때도 있고, 알고 있었지만 드디어 만났다는 느낌일 때도 있다. 호기심이 워낙 많은 편이라 새로운 것을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데, 타건으로써 그런 기분을 해소하는가 싶기도 하다.
또한 쓰고 치는 순간, 손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온몸으로 해방감을 느낀다. 인간에게 자유가 중요하다는 것은 자유에 관해 이야기하는 수많은 철학자만 봐도 알 수 있다. 세상에는 얼마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많은가. 그런 삶 속에서도 자유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잊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행동하는 것뿐이다. 내가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은 내가 가진 이야기를 손으로 풀어내거나 보고 들은 음표에서 느낀 감정을 손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적고 연주할 때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상태를 경험한다. 그렇게 자유를 느끼며 오늘도 살아있음을 깨닫게 해주고, 인간다움을 잃지 않도록 도와준다.
때때로 이것들은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앞서 말한 해방감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해방감을 느끼고자 할 때, 우리는 어떤 것에 몰두해야 한다. 무언가에 몰입하는 경험은 아주 귀하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은 쉽게 얻지 못한다. 내가 했지만 생경하게 느껴질 만큼 자신이 한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순간, 나를 거쳤지만 내가 아닌 것. 때로는 온 힘을 다해 나임을 외치는 것. 한 가지에 오롯이 집중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이 모든 것이 몰입이 주는 선물이 아닐지 싶다.
감각기관이 잘 발달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래서 섬세하다는 뜻이지만, 예민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예민할수록 몰입의 시간을 경험하기 어렵다. 방해꾼들이 도처에 널린 현대사회에서 하나에 골몰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다. 나의 경우 무언가에 골몰할 때 나타나는 특징은 겉으로 보았을 때 담담해 보인다는 것이다. 예민한 사람에게 담담해 보인다는 것은 안정되어 보인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 나에게 안정이라는 단어는 칭찬에 가깝다. 인간의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기에 본래 우리의 삶이 불안정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예전엔 불안에 떨던 내 모습이 밉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삶에 변수를 놓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겁쟁이가 되어가는 걸까 싶다가도, 타건을 할 때면 담대한 마음을 갖게 된다. 변수 따위는 상관없다는 담담한 얼굴을 지나, 언젠가 심장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그때 깨달았다. 타건을 할 때의 내가 무척이나 기쁘고 활기찬 상태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 남들이 보기에는 무용하고 돈이 되지는 않는 것에 공을 들이지만 어쨌든 무언가에 집중하며 행복을 좇는 스스로가 퍽 멋지게 느껴진다. 좋아하는 행위에 몰입하고 거기에서 행복을 찾을 수만 있다면, 실제로 겪는 불안도 줄어들고 타건하는 경험이 쌓여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타건은 세상과 나를 연결 짓는 수단이다. 이 세계는 개인의 합 그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에서 개인의 합만큼을 뺀 나머지 영역은 개인들의 부산물이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부산물이라고 하면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 모두를 일컫는다. 그중에서도 쓸모없는 것에 조금 더 초점을 두고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흔히 부질없다고 말하는 것들이 여기에 들어갈 것이다. 개인마다 ‘부질없음’에 대한 정의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것이라고 명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의 경우 때로는 이런 부질없는 것들을 타건의 행위로 연결 지으며 삶의 의미를 찾았다. 또 세상에 내가 있다고 외칠 때에도,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을 때도 타건은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
모든 것은 머무르지 않고 흘러간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렇게 시냇물이 흐르듯 시간과 그 시간 위에 생긴 모든 사건과 인연들을 자주 흘려보낸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꼭 있다. 그리고 타건하는 순간만큼은 그것들을 붙잡아 둘 수 있다. 부질없을지라도 이미 나를 떠난 것들을 한 번 품었다가 보내줄 때, 비로소 내 것이 되는 느낌을 받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앞으로도 건반과 자판을 끊임없이 치는 것으로 불안정하게 흘러가는 삶의 바짓단을 종종 붙잡으며 기쁨을 느끼고, 세계와 나를 연결 지으며 살아가겠지.
[강윤화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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