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은 답이 있는 분야일까? [문화 전반]

소개하고 싶은 작가의 작품
글 입력 2021.06.19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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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이 답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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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다양한 형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뒤샹의 변기가 예술작품이 되면서부터, 어딘가 방치되었던 낙서 한 장이 예술이 되기도 하며 무심코 그은 선 하나가 전시장에 전시되었다. 그렇게 작품 안의 ‘개념’이 작품을 예술로 정의 내린다. 이렇게 예술이 다원주의로 변하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예술의 형식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고, 어디까지를 작품으로 보아야 할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정해진 진리는 없다.’ 일 것이다.


고대부터 중세시대의 미술은 일정한 진리만을 추구했다. 신의 뜻과 세상의 모습을 똑같이 담아내는 것만이 정답이었을 것이다. 일정한 진리를 위해 다른 정답들을 오답으로 간주하며 배제해왔고, 그것이 예술의 진보를 막았었다. 하지만 예술은 살아 움직이는 인간과 같은 존재이고, 우리 곁에서 함께하는 유동적인 형태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은 어디까지를 허용해야 하냐는 질문 그 자체가 답이 된다. 무엇이 예술일지에 대한 끊임없는 토의들이, 예술의 틀을 둘러싼 담론들이, 예술이 될 것이다. 즉 필자는 예술이 도출된 답을 탐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현재의 예술이 될 것으로 판단한다.


단 개념이 예술이 될 수는 있겠지만 모든 개념이 예술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개념을 작가의 의도라고 한다면, 작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예술 작품에 대한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작품도 예술이 될 수 있어!’라는 무조건적 확신이 아니라, 왜 그러한지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나가면서 예술의 가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타당한 근거를 두고, 논의하고 비평가들이 글을 쓰며 전시가 열리고, 관객은 담론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관객을 통해 다시 재생산되는 수많은 논의가 그 작가가 만든 예술 작품의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소개하고 싶은 작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현재 손문일 작가는 예술의 형식에 있어 알맹이에 접근하고 있기에,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평면이지만 입체적으로 보이는 작품을 제작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포스트 모더니즘 담론 속에서 예술의 형식에 대해서 답했던 작가이다.

 

 

 

물질의 알맹이를 드러내는 방법을 아는 작가, 손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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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일 작가, Relationship 1, 55 x 182cm

mixed media on fabric, 2011

ⓒ 손문일 작가 개인 홈페이지

 

 

손문일 작가는 총 6회의 개인전을 열면서 자신의 작업의 핵심을 이야기한다.

 

그는 “나의 작업은 물질을 다루면서 잉태되는 에너지”에 집중한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물질 자체에 본인의 예술적 근원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라 밝혔다. 이는 세계를 둘러싼 대상과 자신의 본질을 물으면서 새로운 시각적 형태의 작업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작품에서 발생 되는 에너지를 통해 예술의 근원을 답하고자 했다. 그의 대표 작업은 Object Artwork 중 [Relationship]이다. 양복을 입은 남자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신체 모습이 입체적으로 표현되었다. 하얀 배경 위에 작품만을 보면 입체적인 조각상 같지만, 사실은 2차원에 가까운 평면적인 작품이다.

 

3mm의 얇은 알루미늄 패널에 천을 덮어씌우고 에어브러쉬를 통해 음영 효과를 낸다. 폴리머의 재료 특성은 열가소성으로 열 때문에 형태가 변하기에, 작가는 형틀을 만들고 형상을 구축한다. 옷의 섬세한 주름 묘사와 걸어가려는 다리의 동작이 매우 사실적이며, 이로써 작품은 평면과 입체 사이에 위치하게 된다.

 

이는 3차원으로서 완벽한 조각의 형태를 연상하게 한다. 미켈란젤로와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이 그렇듯이 ‘조각’하면 굉장히 실제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작가의 작품들은 과거 조각에 대해 반문하고 이를 뒤집어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면서 과감히 머리부터 어깨까지 몸의 상부를 생략해버렸다. 이는 두꺼우면서도 얇고, 사실적이면서도 애매모호하다. 단순히 천만 입힌 채 아무런 음영도 추가하지 않은 이유를 작가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인간의 군상들은 희로애락의 에너지가 극대화되는 얼굴을 기하학적인 도형으로써 대체하여 관객의 경험적 기억 안에서 인식하는 인간을 떠올리게끔 만드는 장치다.”라고 말이다. 즉 작가는 현대인의 옷을 강조하고, 얼굴을 감추어 익명성을 부각했다. 그렇게 익명성 안에는 개개인의 얼굴이 대입될 수 있으며 인간관계에 있는 모든 이들이 될 수 있다.

 

손문일 작가는 불필요한 것을 제거함으로써 본질을 드러내는 작가로,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이야기한 모더니즘의 삭제 법칙을 적용한 화가라고도 할 수 있겠다. 모더니즘 시대 활동했던 비평가의 말을 현재 빌려오는 것이 어색할 수도 있지만, 어느 특정 시대에만 적용되는 표현은 아니고 다른 방향에서도 새롭게 해석할 수 있기에 인용하였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은 동세가 느껴지지만 살아있지는 못하고, 부피감이 느껴지지만 피상적이다. 인간의 군상을 과감하게 얼굴의 형태를 없애고 사람의 동세를 구축했다. 위와 같은 설정으로 우리에게 남은 본질을 생각해볼 수 있다. 또 3차원의 조각과 2차원의 평면의 관계성을 떠올리게 하고, 이분법적으로만 작품들을 단정 지었던 것은 아닌지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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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적으로 나누고, 빠르게 도출되는 답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 속에 예술은 도태되는 것일지 모른다. 답이 쉽게 정해지지 않아서, 난해한 현대미술처럼 어렵게만 다가와서. 등등의 이유가 동시대 예술에 대한 편견을 생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창의성은 경계들 사이에서 시작되고 수많은 논의와 의미들 사이에서 성장한다. 하나의 답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더 유익한 분야, 예술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손문일 작가의 개인 홈페이지에서 인용ㆍ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심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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