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못난이 오렌지가 되겠어

과일을 보며 어쩌다 돌아보게 된 삶의 태도
글 입력 2021.06.15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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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일을 잘 못 깎는다. 사과는 물론이고 오렌지 같이 조금이라도 번거롭게 까야하는 과일이면 웬만해선 손대지 않는 편이다.


과일을 꺼내어 먹어볼까 하다 금방 포기하면서 그 이유를 묻기 위해 가만 돌아보면 '굳이' 싶었던 것 같다. 굳이. 굳이 해서 뭐해, 그냥 안 먹고 말지, 귀찮게. 사실 그렇게 애써서까지 먹고 싶지는 않았어. 하고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나는 과일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그런 식으로 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해본 적 없거나, 실력이 모자란 일에는 구태여 힘을 쏟지 않고 회피했다. 어떤 일에는 모자란 내가 너무 창피하고 견딜 수 없어서, 또 어떤 일에는 그저 그런 귀찮음으로.


그러다 문득 내가 그렇게 포기한 일들이 그간 얼마나 많았으며 또 나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할 뻔한 걸까, 그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아찔했다.


나는 '굳이' 그 고생을 해서 '고작' 사과 몇 조각 먹는 게 대수냐고 생각해왔지만, 그러는 동안에 스스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 한 가지를 아무렇지 않게 포기하게 된 것이다. 눈 쌓인 겨울날, 그 위로 햇빛이 비추면 전기장판을 켜 놓은 이불 속에 들어가 귤을 까먹는 행복은 알면서도 뜨거운 여름날 선풍기 앞에 앉아 찬물로 씻어내 정갈히 조각낸 사과를 아삭아삭 씹어 먹는 행복은 기꺼이 포기하는 것.

 

아는 만큼, 해본 만큼 살아가고, 모른 척하고 회피한 만큼 삶의 지평을 좁히는 일에 너무나도 안일하게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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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엉켜갔다. 한번 주저하고 나면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수백수천 가지로 증식해 스스로를 위안했다. 괜찮아, 이것쯤은 하지 않아도, 할 줄 몰라도 큰일 나지 않아, 하고 속삭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내가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일을 견디고 버텨서 결국 해낸 사람들이 참을 수 없이 부러웠다. 한 번만 더 도전해볼 걸 그랬나 하는 마음은 독이 되어 날 낡아가도록 만들곤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사랑하긴커녕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날들만 늘어갔다.


언젠가 대학 교수님께서 강의 시간에 해주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모른 척해도 될 것만 같은 아주 작고 사소한 순간이 모여 삶 전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그러니 일관되게 성실한 태도로 삶에 임해야 한다고.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이 자신마저 속이고 회피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손에 잡히는 일, 한 번이라도 해본 일,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보이는 일만 골라잡는 삶이 얼마나 하찮고 의미 없는 것인지를 깨닫는다. 남들은 알아채지 못할지 언정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번까지만, 딱 이번까지만…' 하면서 여태 지키지 못한 약속들에 대해 잔류하는 부채감 혹은 자책감을 꾸준히 등에 지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는 없다. 계속 아름아름 스스로를 속이면서 언제 들킬까 염려하고 살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작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어정쩡하고 서툴게 보일 바에야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겠다는 고집은 나를 더욱 망쳐놓을 것이 자명했으므로 이제는 그만둬야 했다.


엉성하게 깎인 못난이 사과가 되면 좀 어때.


못난이 오렌지가 되면 좀 어때.


마침내 다디단 열매가 접시 위에 놓이고, 내가 스스로를 가장 대접하는 사람이 되는 순간이 새롭게 태어날 텐데. 어떤 날엔 그런 별거 아닌 것 같은 순간이 간절해질지도 모를 텐데.

 

당장은 엉망으로 보이는 것들을 눈 앞에 두고서도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내 말마따나 고작 사과 같은, 고작 오렌지 같은 삶인 것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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