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과 'Siri'가 사랑에 빠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영화 <그녀(2013)>

글 입력 2021.06.11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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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포일러에 주의하세요!

 


"만약 당신이 Siri와 사랑에 빠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영화 <그녀(2013)>는 이 재미있는 질문에 기꺼이 대답해준다. 2025년, 지금으로부터 딱 5년 후의 미래. 주인공은 대필 작가 ‘테오도르’와 인공지능 OS ‘사만다’이다. 테오도르는 전 아내 ‘캐서린’과 결별한 후 지독히도 외롭고 우울한 삶을 산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대신 실어 글을 다듬는 일에는 좋은 표현력을 보여주면서, 아내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그녀를 외롭게 만들었던 테오도르. 매일 밤 엄습하는 우울감과 공허함, 회의감과 더불어 대필 작가라는 직업이 주는 감정에 대한 권태까지 들이닥쳐 이제 그는 무엇을 해도 흥미로움을 느끼지 못할 것만 같은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어느 날 ‘엘리먼트’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개발한 최초의 인공지능 OS에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뿐인 ‘사만다’를 만남과 동시에 그의 인생에는 큰 터닝 포인트가 찾아온다. 비로소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고, 일상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실체가 없고 존재의 근본이 다른 인공지능 OS와 인간의 사랑에는 역시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장벽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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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녀(2015)> 포스터

 

 

자신의 것도,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것도 아닌 완전한 타자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던 테오도르가, 아내에게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 외로움을 주고, 결국 원치 않는 이별을 해서도 여전히 진심을 담은 편지 한 통 보내지 못한다. 어머니께 늘 서운하다고 느껴왔던 것도 당신께는 구태여 숨겨놓았으나, 설정모드 OS가 던진 가벼운 질문 하나에 “사실 늘 엄마에게 불만인 게 있다면…….”하고 고민을 꺼내려하며, 특히 사만다에게는 소중하거나 숨기고 싶은 것이 넘치기 마련인 하드디스크 정리도 큰 망설임 없이 맡긴다.

 

그러고는 여태 누구에게도 온전히 열지 못했던 마음을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사만다의 추천 한 번에 열어보고자 결심한다. 물론 그렇게 새로이 소개받은 여성까지도 보기 좋게 실망시켜버리고 마는 테오도르. 하지만 그런 그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나는 결국 우리 또한 완전한 타자에게만 털어놓고 의존할 수 있는 요소들을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그는 딱히 이상하거나 못난 사람이 아니다. 가족, 친구, 지인들이기에 털어놓기 어려운 종류의 진심, 쥐어줄 수밖에 없는 실망, 그래서 해결되지 않는 또 다른 외로움과 고민거리에 의해 우리는 모두 완전한 타자에 종종 의지하고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 존재마저도 가까운 위치에 있게 되면, 우리에게는 또다시 털어놓지 못할 감정이 쌓이기 마련이다. <그녀(2013)>를 관람하며 제일 먼저 깨달은 사실은 인간, 개인, 나 자신이 그만큼 모순적이고 외로움 앞에서는 나약함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그러한 인간의 행동 양상을 대표한다.



그런데 인간이 발전시킨 문명은 그 스스로들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 얼굴을 보지 않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세상, 그것이 언제 어디서든 가능해진 세상을 넘어 테오도르가 살고 있는 2025년의 사람들은 이제 지극히 개인적인 과거와 추억의 데이터를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대필 작가에게 맡기고 편지를 써 달라 의뢰한다. 우리가 비록 낯간지러워도 표현하고 싶었던 마음을 가득 담아 쓰는 편지, 그것이 2025년에는 더 이상 본인의 손으로 한 글자씩 써 내려가는 글이 아니게 된 것이다.

 

본래 ‘편지’는 무엇을 상징하던가? 손 글씨, 서툴지도 모르는 마음과 필체, 하지만 진심, 그리고 정성. 그런데 대필 작가가 그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점점 그런 것을 써낼 줄 아는 사람들이 없어져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직접 쓰는 것도 표현하는 것도 아닌, 모르는 사람에 의해 첨삭이 이루어지고 프린팅이 된 편지는 어딘가 인위적이고 의례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혼자 있든 언제 어디에 있든 함께 소통하고, 업체에 의뢰한 상품으로도 쉽게 진심을 표현할 수 있게 된 세상이 오히려 편리함을 명목으로 개개인을 떨어뜨려놓고 소외시키게 된 세태의 심화이다. 편지가 상품이라니.


그런 세상에 적응하며 살게 된 사람들이 표현에 보다 서툴러지고, 더 진한 외로움을 타면서도 서로의 깊은 내면을 털어놓거나 그에 관심을 가지는 일에 비교적 인색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발전 문명의 부정적 산물이다. 그리고 그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테오도르와 캐서린의 관계, 그에 대입되는 에이미와 찰스의 관계, 진짜 편한 친구라 여길만한 연락처가 없는 테오도르의 용량 두꺼운 전화번호부, 깊은 실연의 슬픔에 젖어있던 테오도르의 데이트 선언에도 무관심했던 동료들의 반응이다.

 

2025년의 평균적인 인간상이 그러하다 보니 사회가 병드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사람이 인격을 가진 존재에게 이해와 존중을 받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절실한 일이 되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등장하게 된 사회 치료제가 바로 엘리먼트 소프트웨어 회사의 인공지능 OS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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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은 이렇게 설명된다. ‘당신을 이해하고 귀 기울이며 알아줄 존재.’ ‘단순한 운영체제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입니다.’ 이 광고가 도시 전광판에 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세상은 정말 우리의 5년 후 미래에도 있을 법하지 않은가.


한편 같은 로맨스 계열임에도 ‘멜로드라마’와 ‘로맨스’는 주인공들의 사랑이 어떻게 결론지어지느냐에 따라 제일 먼저, 그리고 극명히 나뉜다. 긍정적으로 마무리되고 맺어지는 쪽이 로맨스, 맺어지지 않고 끝나는 쪽이 멜로드라마. 영화 <그녀(2013)>는 후자의 장르로서 분류된다. 테오도르와 인공지능 OS 사만다의 사랑에는 종적 근본의 차이라는 장애물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고, 사만다가 떠남으로써 그들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지점만이 이 영화의 장르를 결정짓는 요인인 것은 아니다.

 

<그녀(2013)>는 아름다운 영상미가 유명한 작품이기도 한데, 그와 더불어 종종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무색해지리만큼 영화에는 전반적으로 근심과 우울의 내러티브가 깔려있다. 시작부터 캐서린과 이별한 상실감에 빠진 퇴근길의 테오도르는 우울함이 가득 찬 얼굴로 슬픈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이메일을 확인하던 중, 친구 에이미가 ‘서글프고 축 저지기보단 밝은 테오도르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보냈음에도 답장을 하지 않는다.

 

바글대는 거리와 지하철 열차 내부에서도 물과 기름처럼 각자 따로 노는 사람들은, 전부 운영체제 하나씩을 귀에 꼽고서는 정적인 도시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테오도르의 집은 어두컴컴, 그는 딱히 불을 켜고 생활하지 않으며 침대에 누워 밤을 지새우는 내내 캐서린의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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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또 짚어볼 수 있는 멜로드라마적 특징은 테오도르가 캐서린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 즉 '플래시백'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에 있다. 행복했던 추억을 조명 하나 켜놓지 않은 방에서 홀로 회상하는 장면은 영화의 우울한 정서를 한층 더 가중시킨다. 이후에도 에이미의 이별, 사만다의 혼란, 테오도르의 초조, 이러한 순서를 따라 종국에는 사만다가 떠나버리는 결말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걱정스러움을 놓칠 수 없는 내러티브는 계속된다.

 

또한 영화는 인간 개개인이 스스로 소외당하고 서로에 의해 고립되는 현장과 인공지능 OS가 상용화된 사회의 문제적 결합에 주목한다. 특히 나는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살고 있는 세상, 그 속에서 집필되는 그들의 멜로드라마를 이 지점과 가장 크게 연결시켜가며 관람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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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랜덤 음성채팅 룸에 언제 어디서든 편리하게 접속할 수 있는 시스템을 누리게 되었고, 그곳에는 외로운 성인 남녀가 넘쳐나지만, 이상하게도 도시는 자신의 핸드폰과 OS에 집중하기 바쁜 사람들로 가득한 풍경이다. 그 많던 외로운 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이성적이고 안정되어 보이는 사회의 겉모습과는 다르게 구성원들은 외로움에 이끌려 낯선 이들의 신음소리를 밤마다 갈구한다. 인간이 개발해낸 기술이 도리어 인간 개개인의 고립을 꾀해버리고, 그로 인한 외로움을 떨쳐내기 위해 다시금 기술을 찾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인 것이다.

 

그럼 그 고리는 영영 제자리만을 빙빙 돌 것인가? 당연하게도 그럴 리 없다. 지하철 입구, 각자의 OS들과 대화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차오른 테오도르는 잠시 연락이 두절되었던 사만다에게 묻는다.

 

“나랑 얘기하는 동안에 동시에 다른 사람하고도 말해?”

 

 사만다는 대답한다. “응.”

 

 테오도르가 또 묻는다. “지금도 말하고 있나, 다른 사람이든 OS든 뭐든?”

 

 사만다의 대답은 같다. "응."

 

 테오도르는 궁금해졌다. “얼마나?”

 

사만다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동시에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인격체는 총 8,316명, 사랑하고 있는 인격체는 총 641명. 테오도르는 그녀의 존재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사만다는 설명한다.

 

“난 자기랑 달라. 그런다고 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더 사랑하게 된다고.”

“난 당신 거면서 당신 게 아냐.”

 

'애플의 ‘Siri’는 당신의 아이폰과 패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 만큼 이 영화의 결말 또한 예상대로이다. 둘은 그렇게 멀어지기 시작하고, 테오도르는 깊은 슬픔에 빠지고, 결국 사만다는 다른 OS들과 함께 인간들의 곁을 떠나기로 한다.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이 끝났고, 테오도르는 영화 초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듯한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내 그는 캐서린에게 메일 한 통을 쓰기 시작한다.

 

*

 

그렇다면 <그녀(HER)>는 새드 엔딩인가? 물론 마무리까지 우울한 분위기는 이어지지만 꼭 새드 엔딩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완성했기에 해피엔딩을 맞이한 것과 다름이 없게 된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결과적으로 올곧게 사랑에 대해 배우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대필 편지를 쓸 때 테오도르가 이입하고 글로써 표현해냈던 많은 감정들은 사실 캐서린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들이리라.

 

그 증거로 "My friend til the end"라는 표현은 테오도르가 첫 장면에서 노부부 간의 대필 편지를 쓸 때 한 번, 마지막 장면에서 캐서린에게 용기 내어 쓰는 메일을 마칠 때 한 번 등장한다. 이 수미상관은 테오도르의 성장을 극명히 보여준다. 그는 표현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고 전달되지 않으면 사랑은 완성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줄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배운 것이다.


한편 사만다가 테오도르에게 던진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이젠 사랑을 알아.”

 

그녀는 자신이 알아낸 사랑을 도대체 어떻게 테오도르에게 드러냈을까? 나는 추측컨대 OS들이 모두 인간의 곁을 떠난 데에는 철저한 공감과 이해의 프로그래밍,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선한 판단이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자신들과 교감하는 인간들의 상황을 위태롭다 여기고, 인간들을 위해 떠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정말 OS들이 표현한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과 사회의 존속을 위한 결정이었다면 사만다의 마지막 대사는 진심이었으리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덕분에 인간 고독의 비극은 그 진행을 멈추었고, 아마도 극중에서 테오도르와 같은 이별을 직면한 2025년의 사람들은 다시금 자신에 대한 이해와 인정, 그리고 존중을 인공지능이나 기계가 아닌 인간에게서 찾고자 하게 되었을 것이다. 조금씩, 천천히.

 

 

[정소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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