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개성 없는 개성 사회에 대한 고찰 - 2편 [문화 전반]

글 입력 2021.05.2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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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없는 개성 사회에 대한 고찰 - 1편'에서 이어집니다.

 

 


3. 혐오 표현까지 개성으로 포괄하는 ‘한국 개성사회’


 

앞선 1편에서는 개성의 개념에 대한 개인적인 고찰과 함께 현대 개성사회의 등장 배경, 또한 몰개성이 정말로 사회적 문제가 되는 지에 대한 고찰을 이어갔다. 하버마스의 사상을 통해 개성은 사회 발전을 증진함을 밝혔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 한국의 개성사회가 지닌 고질적인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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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의 중산층 부모들은 육아에 있어 ‘개성 있지만 튀지 않는 아이로’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한국 사회는 현재 전통적인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가치가 혼재되어 있고, 이러한 과정에서 자식이 개성있는 동시에 튀지는 않는 방향으로 자라길 바란다는 다소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들은 아이가 또래 집단에 의해 배제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다른 아이들과 동일한 교육 과정을 밟아 보장된 안정망 속에서 성장하기를 바란다. 동시에 ‘특별히 두드러지는 재능’이나 ‘독창적인 서향' 등을 일정 부분 겸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성 사회에서의 몰개성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자, 명백한 사회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부모들이 아이가 '배격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한다는 것이다. 개성의 표출이 자유롭고, 다양한 개성의 형태에 대한 접근성이 높은 사회에서 이를 걱정하는 것은 모순적임을 넘어서 허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앞선 1편에서도 설명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모순적인 개성 사회에서는 오히려 몰개성화가 발생하고 있으며, 이는 곧 특정 집단을 비정상화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부모들의 걱정이 그저 기우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는 현실에 해결점은 점점 더 희미해져만 간다.

 

앞서 개성의 개인적인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살펴보았고, 개성 있는 개인이 손 뻗칠 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넓은 지에 대한 논의도 이어갔다. 몰개성은 사회 발전을 저지하고, 정상 범주와 그렇지 않은 범주를 구분해 특정 집단을 배제하며 혐오 표현의 난무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사회 발전 역시 저지한다. '개성적이지만 개성적이지 않음'을 요구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연히 부모가 심어준 판단 근거 하에 두드러지게 튀는 아이,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아이, 무난하지 못한 성향을 지닌 아이 등을 타겟으로 삼는다. 정확히 말하면, 혐오의 타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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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눈에 띄는 개성을 두려워한다. 특정 이들을 혐오하고 고립시키는 행위는 배격되지 않아야 한다는 부모의 공포심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결과일 것이다. 이는 최근 다시 큰 사회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학교 폭력과도 크게 유리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어린 청소년들의 입에서 너무도 쉽게 회자되는 혐오 표현들이 '다름'으로부터의 안정망을 이룬다는 착각은 계속된다. 이를 단단한 교우 관계 형성의 일부로 여기는 아이들은 물론 집단적 개성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개성 표현이 자유로운 개성 사회에서 혐오 표현 또한 하나의 개성으로 인정 받을 수 있을까? 청소년 집단에서뿐만 아니라 최근 우리 사회는 난무하는 혐오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혐오 표현이란, 어떤 개인·집단에 대하여 그들이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차별·혐오하거나 차별·적의·폭력을 선동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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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소수자성을 지닌 이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내쏟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특히 타집단 사람들을 ‘충’이라는 표현으로 벌레 취급하기는 기본이다. 예를 들어 학생들을 ‘급식충’이라고 표현하거나 아이를 지닌 여성을 '맘충'이라고 일컫는 것, ‘김치녀’, '된장녀’ 등의 단어 사용을 통해 특정 성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례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사례이다.

 

인종, 성별, 신체적 조건, 성적 지향 등의 선천적인 요소들에 대한 혐오는 물론이고, 한 사람을 규정 짓는 사회적 조건 역시 혐오의 대상에서 빗나가지 않는다. 앞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에 관해 논했지만, 이러한 혐오는 타인의 개성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혐오 표현 자체를 개성의 표현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도 문제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 상당한 기간을 걸쳐 누적된 역사적 결과이기 때문에, 좀처럼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다. 공개적인 혐오 표현은 모욕죄 등에 인해 법적 규제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여전히 처벌에 대한 논란이 많다는 점에서 사회는 아직까지 해결의 열쇠를 찾지 못하고 있다. 타집단에 대한 혐오를 멈춰야 한다는 이상적인 지향점은 존재하지만, 혐오의 전시 자체가 특정 집단의 개성이 되어 버린 뒤틀린 개성사회에서는 보다 실질적인 방안이 필요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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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표현과 개성의 관계성은 명확하다. 혐오 표현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이 개성 사회의 도래와 궤를 같이 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성 개념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사람들은 스스로의 개성이라 판단되는 특정 표현이 일부 집단을 해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로부터 촉발된 혐오 표현은 후에는 혐오에 대한 인지가 거세된 채 개성이라는 이름의 포장만 남은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공고히 하여 특정 이들의 사회적 삶을 붕괴시키는 상황은 분명 우리가 상정하는 이상적인 개성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게다가 이러한 혐오 표현은 긍정적인 개성 표현의 장을 저지한다는 점에서 또한 문제가 된다. 개성의 자유로운 표현을 기저에 두고 있는 개성 사회의 기반이 오히려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성 표현과 혐오 표현은 완전히 분리되어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개성을 표출할 수 있게 될까? 개개인의 경각심만으로 해결되는 문제일까? 개성의 사회적 개념과는 또 다르게, 인간이 개별적인 특징을 지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민주주의라는 사회의 하부구조는 이러한 인간들의 개성이 조화를 이루기를 도모하는 목적을 분명 지니고 있다. 특히, 나와는 다른 배경이나 신념을 가진 이들에 대한 존중과 관용의 가치가 중시되는 사회이다.

 

다만 우리 사회는 그러한 민주 국가의 국민으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들로 넘쳐날 뿐이다. '관용'의 태도는 이상에 뜬 개념이라 비판 받을지는 몰라도 분명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개성을 존중함으로써 나의 개성 또한 존중받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혐오표현을 개성이라 말하는 이는 혐오표현 외 모든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고 개개인의 창의성이 제약됨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정한 관용을 통해 이룩한 개성사회에서라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혐오 표현과 관련해 진정한 개성이 표현의 장이 위축되는 것은 개성 사회에 오히려 개성이 사라지는 현상의 또 다른 원인이기도 하다.

 

 

 

4. 개성에 대한 정의를 다시 세우자


 

김춘수 시인의 대표작 <꽃>은 매년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시에 이름을 올릴 만큼 국민적 정서에 큰 영향을 준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꽃>은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오.’라는 구절을 통해 ―표면적으로― 누군가에게 나만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싶다는, 즉 특별해지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낸다. 필자는 이 시의 내용이 현제 개성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전형적인 욕구를 보여준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해지고 싶고, 자신만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 받고 싶지만 그것이 전체 사회나 규모가 큰 집단에 의해 행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후자는 개성있음의 표지가 아닌 '고립'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집단에 대해 개성있다고 정의되는 것은 오히려 박탈감과 소외감 등의 여타 불안 심리를 자극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다른 사람들과 삶의 일정 부분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언젠가는 그들에 의해 완전히 배제될 수 있다는 불안은 사회적 동물으로서의 인간을 괴롭게 한다.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이 개성을 원하지만, 전체 사회에 의해 배격당하지 않을 정도의 개성만을 원한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제한된 의미의 개성이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해 말하자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개성화(indivisuation)는 `남들과 구분되는 독특함` `나만이 가진 특별함`과는 다르다. 독특함, 특별함이 개성화의 일부가 될 순 있지만 꼭 동의어라고 볼 수는 없다. 즉, 독특하고 특별한 어떤 것을 정립해야만 개성화 작업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개성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욕구를 지니고 있는 개인과 사회 전체의, 개성을 둘러싼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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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이 설명한 '개성화' 개념



평범하기 보다 특별한 존재로서의 인정을 받기 위한 욕구는 보통 다음과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해지고 인정받고 싶은 법이다

이는 본연의 자연스러운 욕구다

하지만 이 욕구는 적절히 통제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지나치면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연하고 허무하기까지나 한 논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법은 개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통된 인식을 잘 보여준다. 과연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과 욕구의 출처는 어디인지, 그 근원에 대한 설명을 배제한 텅 빈 논법이지만 제한된 형태의 개성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는 공감을 얻는 부분이기도 하다. 앞서 설명했듯이 심리학이 말하는 개성은 독특함이나 남들에 비해 튀는 어떤 것과 동치 관계는 아니다. 심리학자 칼 융이 제시한 개성화의 개념에서 그것을 잘 찾아볼 수 있다.

 

칼 융은 ‘개성이란 내면의 근본’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한 개인의 표상적인 말이나 행동을 야기하는 근원적인 부분으로, 그러한 표지들이 보이는 독특성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는 개인의 언행이나 행동을 결정짓는 이 내면의 근본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다분한 영향을 받아 생성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근본이 야기한 언행과 행동은 곧 삶의 목적이 된다. 이 삶의 목적은 비가시적이고, 타인에 의해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의식의 아래에 있는 내면에서 발생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내면 형성에 외부 환경과 사회가 큰 영향을 끼쳤기에, 개인은 사회의 일정한 법칙에 따른 언행과 행동을 하게 된다. 융이 말하는 개성 있는 사람이란 바로 이런 개인들이다. 삶의 목적으로부터 뻗어 나온 내면에 기초해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독특함’이나 ‘남들과 다른 빼어남’을 개성의 핵심 가치로 인식하는 현대 사회의 시각과 명확히 다른 노선이다. 그러나 융의 논리에 마냥 괴리감이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융의 말처럼 사회 체계와 법칙 속에서 재단된 말과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이를 자연히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기고 배제하는 경우도 잦다. 다만 이렇게 법칙에 충실한 자들을 ‘개성 있다’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개성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이다.

 

이는 앞서 설명한 하버마스의 논리와 개인화 과정을 거쳐 탄생한 개성 있는 개인들에 대한 설명과 모순되지 않는다. 융이 말하는 개성, 즉 사회와 외부 환경을 잘 내면화한 개인이란 결코 사회의 병리적인 부분에까지 순응하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몰개성화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특정 범주의 사람들을 비정상화하고 배제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야 함을 뜻할 뿐이다. 사회 규범을 내면화 하는 과정은 단순히 수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잘 정립된 자아로 이것을 소화하고 그중에서 찌꺼기라고 인식되는 부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행위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애초에 개성의 통상적인 의미에 대해 재고해보는 시도 자체가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 개성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내가 주장하는 바는 개성이라는 표현에 무거운 부담을 느끼는 우리들을 그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자아 찾기의 과정은 더욱 용이해질 것이고, 우리는 사회적으로 재단된 나의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까지도 모두 이해하고, 타인의 그것마저 포괄할 수 있는 개인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개성의 재정의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자아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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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논리로 보자면 현대 사회에서 개성 있는 사람들의 범위가 더욱 넓어진다. 사회 법칙을 잘 내면화해 자신을 표현하는 이들 모두를 개성 있다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성화는 일종의 인격 발달의 과정 중 하나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경험한다. 개성에 대한 정의가 수정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외부 세계를 잘 내면화한 상태에서 자신을 특징지을 수 있는 무언가를 표현할 줄 아는 상태야 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개성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 SNS에는 일명 개성의 전시가 유행처럼 번진다. 지금은 개성을 전시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개성으로 자리 잡은 사회라고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종류의 표현, 예를 들면 최근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는 혐오 표현들이 난무한다. 쉽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를 입히는 언행들이 개인주의의 가치에 대한 의식 증진과 함께 개성으로서 인정되는 경우가 잦다. 이런 과정에서 실제로 피해를 경험한 지인들이 많기 때문에, 과연 개성의 사회적 범위를 어디까지로 봐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이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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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일화된 삶에 지루함을 느끼고, 자신만의 인생을 꾸려가고 싶은 욕구는 아주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 그러나 ‘개성’이라는 단어의 이미지와 개성에 대한 암묵적 강요가 사회 구성원들을 극단으로 내몰고 있음은 확실하다. 남들과 확연히 다른 점을 드러내야 하고, 이로 인해 주목 받아야 한다는 생각 하에 상식과 윤리를 넘어서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방지해야 한다. 자신의 개성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타인을 깎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칼 융에 개성화 개념에 의하면 이런 이들을 사실 ‘개성이 없는 이들’이라고 정의해야 옳다. 소명 의식이나 삶의 목적과 같은 근원적인 동기가 아닌 그저 남들과 달라보이고 싶은 원초적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인 셈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사회적 외부세계를 내면화한 상태에서의 개성적인 개인이란, 외부에 의해 가능성이 제한된 상태가 아니라 외부 조건을 잘 활용하는 상태이다. 개성의 개념과 그 확고한 이미지에 반기를 던지는 개성 있는 개인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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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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