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간과 데이터의 줄다리기 [문화 전반]

글 입력 2021.04.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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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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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년 전 어느 주말, 오랜만에 집 근처에 있는 복합쇼핑몰에 갔다가 로봇이 만드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부스에 들렀다. 회원 가입을 하고 핸드폰으로 원하는 메뉴를 골라 간단히 결제를 한 후 받은 커피는 사람이 만드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으며, 심지어 가격도 합리적이었다. 빠르고 간단하게 커피를 만드는 로봇의 곁에는 이러한 방식이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에게 이용 방법을 안내해주는 직원 한 명만 있었을 뿐, 사실상 커피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내주는 기존 방식을 로봇 혼자 100% 수행하고 있었다. 이처럼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 배우던 ‘로봇 또는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는 세상’은 내가 성인이 된 지금 점차 현실화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변화에 점차 속도를 붙일 것이다.

 

 


데이터교와 알고리즘


 

로봇이 커피를 만드는 것과 같은 일은 우리 일상생활에 실제로 도입되어 인간의 삶을 보다 편리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일면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기도 하지만, ‘로봇이 사람을 대신하여 일을 한다’는 생각 자체는 21세기 현대 첨단 사회에서는 대체로 한물간 생각에 가깝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는 단순히 사람의 일을 대신 해 주는 로봇의 도입을 넘어 사람을 대신하여 생각하는 인공지능(AI)이 등장했고, 빅데이터 등의 각종 정보와 데이터는 개인과 집단이 스스로 제공해준 방대한 양의 정보를 바탕으로 이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인간보다 인간을 더 잘 이해하는, 새로운 존재들이 등장한 것이다. ‘데이터교’란 이러한 일정한 알고리즘과 데이터에 기반하여 인간을 넘어, 우주 전체를 이해하려고 하는 새로운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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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과학과 생물학에 그 토대를 두고 있는 데이터교는 인간의 기본적인 생명 유지 활동에서부터 그들의 사회적 활동의 산물이라 여겨지는 정치학 등의 분야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전부 데이터에, 그리고 일정한 알고리즘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는 오늘날 지구를 지배하는, 가장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유기체인 인간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데이터교가 주장하는 것처럼 유기체는 정말 단순한 알고리즘에 불과한 것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 과정에 불과한 것인가?


지금까지 지구에 남겨온 인간의 궤적과 발자국을 보았을 때, 이 말은 타당하다. 오랜 전 아프리카 대륙에서 처음 발원되었다고 전해지는 최초의 인류는 다양한 대륙으로 건너간 후 각각 다른 환경과 기후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농업혁명, 산업혁명, 그리고 21세기 디지털 혁명으로 이어지는 일정한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직접 살아왔던 인간들의 후예인 우리들의 머릿속에는 사람이라면 일정하게 거쳐야 하는 삶의 양식과 절차가 있다고 생각함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고 체계들이 다수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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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OSMOLEARNING)

 

 

예를 들어 선진국 사람들이 개발도상국을 방문했을 때, 또는 개발도상국 사람들이 후진국을 방문했을 때, ‘이 나라는 마치 우리나라의 60~70년대 모습을 보는 것 같다’라고 일종의 향수에 젖어서 하는 이들의 말에는 ‘이들은 앞으로 50년 쯤 후에 지금의 우리와 같은 사회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라는 생각 또한 깔려있다. 자신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다른 나라, 다른 사회에서 자신이 살아온 사회의 모습을 찾는 것은 이 사회든 저 사회든, 일정한 절차와 알고리즘을 거쳐 발전하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인류의 발전에 축적되어 온 데이터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인본주의에서 최고의 가치로 여겨졌던 감정 또한 알고리즘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특정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오래 전부터 우리 조상들의 몸속에서 반복되며 형성됐고, 그 유전자는 우리에게도 전달되어 유용하게 사용된다.

 

더 나아가 데이터와 알고리즘은 영악하게도 이러한 ‘감정’이라는 인본주의의 기저가 되는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인터넷과 SNS 상으로 새롭게 끌어들임으로서 오히려 현실 세계에서보다 넓고 깊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인간의 특성과 욕망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새로운 방식을 취함으로서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의존하게끔 만들며 점점 이들을 지배해나가는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의 이단아, 종교


 

종교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가장 모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권위 있는 학계에서도 종교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은 금단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비단 학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친한 사람과 2가지, 즉 '정치와 종교'에 관해서만은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도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신학 대학이 포함된 대학이 제1대학으로 불리며 대학 내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던 과거의 전통을 지금도 유럽의 다수의 대학에서 따르고 있다. 보편 종교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존재이며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존경받는 대리자가 있고, 경전과 교리가 존재하며, 이 것이 진리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유무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현재 살아있는 사람 중 누구도 그들이 존재, 또는 그들이 행하는 기적의 근거를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도 종교는 딱히 수그러드는 기세 없이 세계 곳곳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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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o Dei'란 하느님의 형상이란 뜻으로, 하느님은 그 자신의 모습 그대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즉 거의 모든 보편 종교의 신학적 개념으로서, 이러한 신성이라는 가치는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했다. 존엄성이란 특정 사회에서는 간혹 전쟁으로 인해 짓밟히기도 했고, 다른 가치에 비해 경시되기도 했으나 그것 자체의 가치는 언제나 사람들이 추구하는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는 특히 사회가 기존 지도자의 부패와 권위에서 벗어나야 하는 근거로 여겨졌으며, 언제나 국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난하고 낮은 곳의 있는 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종교가 존엄성이라는 이러한 매력적인 테제를 무너뜨리지 않는 이상 데이터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든, 또는 어떤 것이 세상을 지배하든 종교는 항상 그 각각의 사회에서 소외되는 인간을 구제하고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며, 따라서 종교는 계속해서 건재할 것이다. 이것이 그 생명력을 계속 공급받을 수 있는 원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의 건재함과는 반대로 지금 세상에서는 아래에서 설명할 현상과 같이 말 그래도 세상을 변혁시키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놀라운 침투(浸透)가 계속되고 있다.

 

 

 

미래 사회와 알고리즘, 그리고 변화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어 벌어지는 사회, 정치, 일상적인 변화는 지금도 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나를 스스로 알려고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항에 응답함으로서 자신의 성격, 또는 취향을 파악하는 적성 및 심리 테스트와 최근 여러 인터넷 쇼핑몰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고객의 구매 내역과 클릭 특성에 따른 상품 추천 기능은 인간을 자신의 감정이나 가치판단마저 알고리즘에 맡겨버리는고, 이에 지배당하게끔 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고 있다.

 

본래 인간 강화 프로젝트의 한 일환으로 개발되었던 사물인터넷(IOT)을 넘어 도달한 인공지능(AI)는 인간의 의도와는 반대로 인간을 더욱 쓸모없는 존재인 잉여 인간으로 만들고 말았다. 앞서 언급했던 커피를 만드는 로봇은 아직 실제로 사회에 상용화된 대수가 적은 관계로 지금의 우리들은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신기해하고 즐거워하지만, 이들의 수가 늘어 점차 더 많은 산업상의 요소로 도입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음을 안다. 공장과 산업체를 넘어 인류 대부분이 종사하고 있는 서비스 산업에서의 이들의 도입은 곧 삶에서의 배제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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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SBS 뉴스)

 

 

몇 년 전 택시기사들의 카카오 카풀 반대 집회가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 이는 단순하게는 한 개의 강력한 권력 집단, 이해 집단 중 하나인 택시 업계가 자신들의 생계, 즉 소득에 목숨을 걸고 이를 지켜나가려는 투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더 큰 의미에 초점을 맞춰야 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반대편에는 국내 거대 포털 사이트인 ‘다음 카카오’가 서 있으며, 이 투쟁은 그 이전에도 있었던 사회적 현상이 아닌, 현 시대가 직면한 데이터 및 그로 인한 갈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카풀(car pool)은 목적지나 방향이 같은 사람끼리 한 대의 승용차에 같이 타고 가는 것을 뜻하는 말로, 이 용어는 최근에 도입된 신조어가 아니라 오히려 1990년대 에너지 절약을 위한 국가 운동의 차원에서 등장한 말이었다. 즉, 오늘날 이것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그 새로움 때문이 아니라 이것을 둘러싼 상황의 변화 때문이다. 과거에는 아날로그적 방식, 즉 입으로 서로 목적지를 맞춰보고 오프라인에서 서로 관계가 있는 사람들끼리의 카풀이 이루어졌다면, 오늘날에는 이러한 번거로운 관계없이도 ‘카카오’라는 커다란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회사가 중개인이 되어 손쉽게 카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서로 엮어주는 방법이 새로 도입된 것이다. 택시기사들은 이전까지 카카오 콜택시를 통해 손쉽게 고객을 유치하고 수익을 창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을 위협하는 또 다른 방식의 데이터에는 적극적으로 반기를 드는 방식을 택했다.

 

그렇다면 과연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3년 전의 이 사태는 한 택시기사의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 형태의 반발로까지 이어지며 결국 카카오 모빌리티의 서비스 중단이라는 결과로 마무리지어졌다. 겉으로만 보면 기존 체제의 승리이다. 그러나 이 승리는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90년대의 에너지 절약을 위한 카풀과는 달리 2010년대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끼어든 새로운 방식의 카풀은 이미 그 존재를 사람들 앞에 드러냈다. 비록 그 짧지만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이것이 결코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위의 카풀 사례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새로운 변화는 이제 사람들에게 있어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며, 머지않아 항상 그래왔듯이 사회에 서서히 스며들 것이다.

 

 

 

나가며



2018년 말 750만 관객을 넘기며 역대 한국에서 개봉한 음악/뮤지컬 영화 부문 흥행 1위를 달성한 것은 물론, ‘퀸’의 모국인 영국과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 시장인 미국마저 제치고 한국에서 전 세계 흥행 1위를 달성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열풍은 이러한 의문에 더욱 더 불을 지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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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교가 주장하는 효율적 알고리즘에 따라 설사 일정한 주기로 돌아오는 ‘복고, 레트로’의 유행에 편승하여 이 영화가 어느 정도 일정한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예측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이 이유가 이 영화를 ‘퀸’을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라이브로 들어본 적도 없는 20~30대가 유독 열광하는 이유에 대해서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을 수 있을까?

 

보헤미안 랩소디가 소비되는 방식은 인간이 고전을 소비하는 방식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탄생하던 시대에 그 내용은 그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사유를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비난받기도 하며, 향유하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고,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그 자질과 도덕성 또는 인간성에 엄청난 의심과 질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는 그 시대착오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진리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 이것은 이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 교리로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일종의 종교와도 비슷한 기능을 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안에 기능하고 있는 그 무언가에 대해 우리는 한 마디로 간단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사람의 마음을 건드는’과 같은 모호한 수식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감각을,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과연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그것이 때로는 기존의 알고리즘에 따르지 않는 너무나 비합리적이고 효율적이지 않은 사고방식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 할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그저 쓸데없기만 보이는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의 고뇌를 다루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 고리타분한 고전에 매혹되며 끊임없이 향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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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1909

 

 

호메로스의 저서 <오디세이아>에서 신의 미움을 받은 인간인 오디세우스의 고향 이타카를 향한 열망은 그 자체로서 무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인간적이며, 따라서 매력적이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 나오는 소년 한스는 최고의 가치인 지식을 지닌 소년이지만 그것보다 덜 가치 있는 의식 아래에서 무너지고, 의미 있는 삶을 획득하는 데 실패한다. 데이터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서사는 그 자체로 너무나 바보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삶에 대한 고뇌와 그로 인한 인생에서의 도태라는 ‘인간의 실패’를 다룬 이 문제작은 출간된 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고전으로서의 지위를 명백히 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고전은 오늘날에도 많은 형태의 문학, 영화로 사회에 답습되어 있기도 하다. 부모와 일족의 복수를 눈앞에 두고 있던 주인공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의해 순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바보 같아 보이는’ 선택을 하기도 하며, 반대로 이 사랑과 가족애라는 감정은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들을 초월적인 힘으로 이기게 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생화학적 알고리즘으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이러한 인간 문화의 계속되는 흐름을 데이터교는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 못하는 듯 보인다.

 

현대인들은 날이 갈수록, 그리고 점점 삶이 심화될수록 삶에서의 리스크, 즉 위험을 최소화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한다고 한다. 초, 중, 고등학생들의 선호 직업이 예전과 달리 점차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업에 쏠리고, 실제 취업 시장에서도 ‘안정적인’ 직장인 공기업에 청년들의 선호도가 쏠리는 사회 현상도 이러한 추세의 한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인터넷과 SNS 등 각종 정보 매체와 데이터에 둘러싸인 우리 삶의 특성상 점점 더 효율적인 방향으로의 계산을 하기 쉬워진 환경 탓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다변적이며, 그것은 아마 데이터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럴 것이다. 교육은 과거 교과 중심 교육과정이라는 서열식, 경쟁식의 교육 방식으로부터 경험 중심, 학문 중심, 그리고 현재의 통합 교육 과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해왔다. 교육이 발전해 온 단계는 현대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어쩌면 점점 더 둔화되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양한 특성을 가진 학생들을 단 몇 가지 기준으로 줄세우고, 이 기준에 따라 누구는 우월하니 열등하니 같은 판단을 내리는 것 이상으로 쉬운 평가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은 점차 교육이라는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에 과연 효율성, 그리고 공정성이라는 단순한 프레임을 덧씌우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위의 이러한 교육 트렌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대다수의 교육학자들이 내린 답은 ‘아니다’이다. 정보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여겨지는 가치가 적어도 교육과 같은 몇 가지 분야에서는 더 이상 적용되지 못하는 것이다. 지능이 의식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이미 이러한 전제에 굴복했다면 이미 교육은 물론 사회의 타 분야에서도 이를 거스르려는 흐름은 등장조차 하지 않았어야 옳다.

 

마찬가지로 '정확성'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인간을 매혹시키는 특성이 될 수는 있어도 인간이라는 존재를 궁극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가치가 되지는 못한다. 데이터가 우리 삶을 지배한 지 불과 몇십년도 되지 않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의 가치에 대해 벌써부터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에 적극적으로 반발하는 등의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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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저자가 제시한 앞선 2가지 양상의 사회 변화에 대해서는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하였으나, 결론적으로 마지막 3번째에 해당하는 변화의 양상에 대한 질문, 즉 '의식은 지능보다 더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렇다, 라는 답을 내놓고 싶다. 무한한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과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알고리즘도 결국은 의식을 가진 인간의 산물이므로, 그들이 그것에 대한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순간, 그리고 싫증을 느낀 순간 얼마든지 다른 형태의 대체물들이 이들을 대신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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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면 많은 것들이 새롭게 바뀌어 가곤 하는 요즈음, 이미 예측 가능한 범위을 넘어선 과학 기술과 정보의 발달은 많은 이들에게 일종의 공포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리고 이는 필자에게도 역시 그렇다. 아직도 노트북보다 공책에 필기하는 것을 선호하고, 또래 친구들이 하는 SNS를 잘 이용하지 않는 필자에게 있어 아날로그 시대의 산물들은 일종의 아름다운 과거의 추억으로 느껴지는 반면,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각종 최신 기술은 두려움 그 자체다. 유발 하라리는 이 책, <호모데우스>에서 필자가 느꼈던 것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분명히 파악하고, 이에 대해 더 극단적인 문제 제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비록 이 책이 예언서의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지만, 작중 하라리의 비관적이고 싸늘한 말투는 적어도 그 묵시록적 성격을 분명히 해내고 있는 듯 보인다. 줄다리기에서 양 편에 위치한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는 동안 그 균형은 매우 팽팽하게 유지되지만, 한 쪽이 자칫 삐끗하여 손이 미끄러지는 순간 균형의 추인 줄은 걷잡을 수 없이 다른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인간과 데이터는 지금 이 경계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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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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