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러시아 방주'를 역사영화로 읽기 하편 [영화]

방주를 떠나기 위해 항해하는 타자들
글 입력 2021.04.08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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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영화로 읽기 시리즈, 영화 <러시아 방주>를 역사영화로 읽기 하(下)

-영원히 항해하는 타자라는 배우


*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연극화’된 러시아



둘의 비대칭적 대면을 잘 드러내는 장면은 유럽인과 시각 장애인 여성이 조우하는 부분이다.

 

영화에는 8살에 사고로 시각을 잃은 예술가 타마라 쿠렌코바를 캐스팅하였다. 그녀는 실제로 시각을 잃기 전 에르미타주를 자주 방문하여 박물관의 작품들을 감상하였고 그로 인해 손으로 느끼며 감상할 수 있는 조각과 더불어 회화에 대해서도 놀라운 해석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영화 속에서 반 다이크의 작품을 해석하는 그녀에게 유럽인은 놀라워하며 상찬하지만, 이후 루벤스의 그림을 등지고 서게 한 채로 루벤스에 대한 평을 요구하는 행위를 한다.


 

Custine discusses Rembrandt's Peter And Paul with a modern Russian atheist.JPG

 

 

영화 속 유럽인은 그녀가 조각이 아닌 그림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일이 불가능할 것을 전제하면서도 상당히 모호한 조롱을 이어나간다. 마치 그녀의 수준 높은 해석은 타인이나 책 등의 매체를 통해 수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하고 싶어 안달이 난 듯 보이기도 한다. 영화 내의 이러한 사건은 러시아의 유럽 예술에 대한 이해가 맹목적이고 비실체적인 것이 아니냐는 유럽인의 꾸준한 태도와 연결된다.


유럽인은 수시로 에르미타주라는 공간을 비꼰다. 러시아인들은 모방에 있어서 제일 뛰어나다고 말하기도 하며, 예카테리나 여제의 오페라 리허설을 관람한 이후에 “극장이군! 배우들! 의상들!”이 라고 말하기도 한다. 에르미타주를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라고 중의적으로 말하는 것이고 유럽을 흉내 내는 연극을 러시아가 수행한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 ‘에르미타주’라는, 혹은 ‘러시아’라는 거대한 극장 속에서 말이다.

 

이는 사이드가 자신의 저작「오리엔탈리즘」에서 제시한 ‘연극화’라는 개념이 연상되는 부분이다. ‘연극화’는 오리엔탈리즘이 구성하는 동양의 모습과 그를 취하는 서양을 잘 드러낸다. 즉, 상편에서 언급된 개념인 상상의 지리를 통해 구획된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그것이 본질적인지, 사실인지 아닌지와는 상관없이 연극화되어 극적인 요소처럼 유통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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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을 ‘동양화’하며 연극을 올리는 서양은 동양에 대해 하나의 틀 안에서 반복되는 관념을 제시할 뿐이다. 사이드는「오리엔탈리즘」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들은…이미 내린 판단을 기반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동양을 한정화하기 위한 판단은, 그 분야의 조탁과 세련 그리고 그 결과로 생긴 명석한 표현에 의해 유지되고 생명을 연장한다.”

 

이렇듯 기이한 연극 무대를 바라보며 ‘누가 극적 서사를 만들었는가?’, ‘현실을 얼마큼 직시했는가?’, ‘사용되고 있는 극적 이미지는 어디서 기원했는가?’, ‘연극 안의 개인들은 모두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해야만 한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며, 다양한 영상과 이미지를 텍스트로 접하는 상황에서도 해당할 수 있다.


서양이 만든 극적 서사는 현실의 존재를 단편화하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창조하기에 이른다. 한편, 연극화라는 비유는 타자가 내면화하는 방식까지도 설명할 수 있다. 짜인 위치로서의 무대 위 타자들은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는 오명과 함께 소환된 상태이다. 반복적으로 연극을 올리고 나면 타자들은 억압적인 논리가 정말로 자신의 목과 입을 통해서 나온다고 믿게 되기도 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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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유럽화를 자신의 의지로 진행해온 것일까? 근대화와 유럽화는 곧 같은 의미가 되어버리는 시대에, 방향성에 대한 도모는 주변화된 국가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이는 ‘아시아’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근대화의 선택지였다.

 

그러나 언젠가는 연극은 끝난다. 그렇다고 해서 연극과 극장이 의미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극과 극장에 대한 영화의 비유는 표면적으로는 러시아가 유럽의 옷을 입은 어정쩡한 타자라고 비난하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러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진단하고, 나아가 연극이 끝난 뒤, 어떤 것을 말하고 어떤 방향을 제시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도록 하는 불씨가 되리라 생각한다.

 

 


러시아는 어디로 갈 것인가?



유럽인은 초반부와 달리 마지막 무도회가 끝나고 나서는 에르미타주를 떠나고 싶지 않아 한다. 그가 남고 싶어 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유럽이 러시아를 관망한 뒤 러시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나아가 러시아에 애정이 생겼다고 해도, 그 사실이 러시아의 주체성을 담보하는가?

 

그렇게 보기는 힘들 것이며, 오독에 가까운 그러한 안심을 영화는 적극적으로 배제한다. 유럽인의 마지막 감정이 러시아에 대한 연민 섞인 애틋함일 수도 있고 순수히 러시아의 문화를 사랑하게 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판단’은 이미 몇백 년 째 이어져 오고 있다. 유럽은 주체로서 판단해왔고 러시아는 그 대상이 되어 왔다.


이는 영화의 엔딩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주변화되었던 당사자가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유럽인은 남겠다고 한다. 내레이터는 떠나자고, 그리고 떠나겠다고 한다.

 

어디로 가며 거기에 무엇이 있겠냐는 유럽인의 회의 섞인 물음에도 러시아인으로서의 내레이터는 거기에 무엇이 있을진 모르지만, ‘앞으로(forward)’ 가겠다고 한다. 그렇게 유럽인과의 이별이 이루어진다. 러시아, 내레이터, 시선이 작별을 고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유럽인에게였으나, 그가 진정으로 떠나온 것은 유럽 자체였다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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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그 방주에 남았고 러시아는 무엇이 있을지 확실하지도 않은 곳으로 나아간다. 러시아 방주라는 제목을 이러한 주변화된 러시아의 ‘말하기’에 집중하여 다시 해석할 수 있다. 러시아 방주는, 러시아의 정수라고 여겼던 과거의 찬란함을 가득 담은 공간이지만 동시에 이 아름다운 방주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영화 속 ‘러시아’는 알고 있다. 따라서 유럽(인)과 함께, 찬란한 ‘유럽적’ 과거를 뒤로하고 에르미타주에서 나서기로 한 것이다.


에르미타주는 러시아 문화와 예술의 방주의 역할을 해왔고 여전히 매우 소중한 공간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방주는 여전히 위험 속에 있다. 위험이 없다면 애초에 방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엔딩에는 “사면이 바다다. 우리는 영원히 항해할 운명인 것이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이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안개가 자욱한 바다를 비춘다. 앞서 내레이터는 어딘가로 나아간다고 하며 유럽(인)과 작별을 고했지만, 어느 방향인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항해라는 것은 육지를 걸어 나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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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나 기록, 역사를 우리는 종이에 그려진 지도인 것처럼 배웠다. 육지를 쭉 걸어와 목표지점에 도달하면 완성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은 마치 항해와 같다. 엔딩 직전의 마지막 무도회, 그리고 비춰지는 어둡고 황망한 그 안개와 바다는 그 막막함을 더한다.

 

그렇기에 오히려 무도회조차도 모두 끝나버린 영화의 시점에서 ‘forward’가 어느 방향일지, 그곳엔 무엇이 있는지 관객들이 직접 찾아 나서야 할 것이라는 묘한 엄포처럼 읽힌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멜랑콜리적인 시선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노아의 방주처럼, 러시아의 방향성 안에 긍정적 미래를 내포한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우리는 근대성과 부단히 싸우는 현대를 보내고 있다.

 

Birgit Beumers는 “1913년을 떠날 때, 소쿠로프는 유럽에 작별을 고하는데 그로 인해 소비에트의 과거는 배제하고 있다. 방주 안에 남아있는 것은, (중략) 러시아 자신만의 예술도 없는 화려한 과거이다. 유럽과의 연관성이 어려운 상태에서 방주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림보를 영원히 항해할 운명이다. 러시아의 정체성은 봉인되었고 숨겨졌으며 이해할 수 없다.”라고 암울한 운명으로 영화를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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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고민한 정체성의 항해는 동아시아도, 여성도, 그리고 그동안 주변화되었던 수많은 존재들도 고민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러시아적 운명을 고민하는 러시아적 정체성의 소 유자만이 고민할 영화는 아니다. 주체를 전제할 수밖에 없는 시점부터, 그동안 스스로를 주변화시켰던 존재와 어떤 방식으로든 작별을 고하는 과정까지 서사적이고 예술적으로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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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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