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러시아 방주'를 역사영화로 읽기 상편 [영화]

99분의 원테이크, 타자의 정체성을 고민하다
글 입력 2021.04.01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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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영화로 읽기 시리즈, 영화 <러시아 방주>를 역사영화로 읽기 상(上)

-타자의 ‘정체성’을 고민하다

 

 

영화 <러시아 방주(Russian Ark)>는 알렉산더 소쿠로프 감독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국립박물관을 배경으로 촬영한 영화이다. 1시간 39분에 걸친 원테이크의 기법의 촬영이라는 형식적인 놀라움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 <러시아 방주>가 주는 감격적인 지점은 단순히 기록적인 촬영 기법에만 있지 않다. 영화는 러시아의 정체성과 예술에 대한 메타포를 공간 그 자체에 녹여내어 늘여놓는다. 그를 통해 엔딩에 이르러서는 표류하는 공간으로서의 에르미타주의 운명에 대해 확대적으로 감상하게 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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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기호로서의 원테이크 기법과 에르미타주


 

러시아 영화의 상징적인 편집 기법으로 몽타주가 사용된다는 것은 익히 알려졌다. 몽타주는 영상을 해체하고 재결합하여 새로운 서사를 창조해내는 것으로 영화적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 같이, 내용과의 깊은 연관을 지니는 영화적인 기법은 그 자체로 의미기호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는 기법적으로는 몽타주와의 대척점이라고 할 수 있는 원 테이크를 통해 서사를 전달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원테이크와 몽타주의 공통분모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바로 사용된 기법, 즉 형식이 서사의 흐름과 융합하며 형식이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영화 <러시아 방주>는 300년의 시간을 에르미타주 위에서 오간다. 단절된 적이 없는 물리적 시간인 99분과 서사적 시간인 99분은 일치하지만, 환상을 걷어낸 서사로서 역사적 시간은 그와는 일치하지 않으며 그 균열하는 지점은 판타지적 요소로 채워진다. 따라서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과 서사적 시간 사이의 간극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며 원테이크라는 형식 자체가 하나의 의미 기호가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궁과 박물관의 연결고리 자체가 또 다른 서사적 의미를 제공하는데, 이 연결고리의 핵심을 엮어주는 것이 원테이크 기법이다. 시간적 흐름에 따른 생성변천이 하나의 축이라면, 그 축에 따라 공간의 본질인 ‘무언가’는 궁이었다가 박물관으로 변화한다. 동일하다고 간주되는 공간 내에서 많은 것은 변화하고 그 변화는 공간에 다시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동일한 것은 무엇일까? 그 좌표에 있는 공간이었기에 에르미타주는 동일한 공간인지, 질문하게 된다. 철학적 언어로서의 정체성, identity는 동일성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언제나 동일한(identical) 특성이 있는 것이 정체성을 구성하는 주요한 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따라서 영화는 정체성을 질문한다. 에르미타주 궁 안에서는 시간의 경계가 흐려지고 과거와 현재의 조우를 지속시키며 무엇이 변화하며 무엇이 동일한지 관객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하나의 호흡으로 이어지는 촬영은 역사가 비분절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와 닮아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원테이크라는 형식과 에르미타주라는 공간은 영화에서 그 자체로 거대한 상징을 긴밀한 방식으로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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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로서의 공간


 

제목의 ‘방주’는 무엇을 지칭하고 있을까? 방주는 최후의 보루이자, 그럼에도 가장 소중한 것을 간직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를 생각해본다면, 그 공간에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는 임시적인 방편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러시아를 담은 최후의 방주는 에르미타주일 것이다. 그곳은 불변의 소중함을 담고자 하지만 동시에 그 공간 안에서 미래를 도모해야 한다는 과업이 주어지기도 한다.

 

방주라는 비유는 엔딩에 있어서 강렬하게 작용한다. 일렁이는 겨울의 강 위에 표류하는 공간처럼, 에르미타주는 갈 곳에 대해 질문하며 떠다닌다. ‘궁’은 전근대성의 상징이며 ‘박물관’은 근대적인 공간이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주었던 영화 속 에르미타주의 위치 또한 매우 기묘하다. 바다를 간척하여 세운 도시인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유럽화를 위해 만들어진 도시이다. 도시 전체가 의도를 가지고 탄생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에르미타주라는 건축물은 박물관의 조성과 많은 특성을 공유한다.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주체가 직접 발화하는 날것의 공간이 아니다. 전시라고 함은 ‘대상’을 원하는 맥락 안에서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가공되고 관리되는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계획도시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모든 거리가 반듯하게 지어진 것과 같이, 본질적인 공허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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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분을 함께 따라간 관객은 마지막 무도회가 끝나고 쓸려나오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세련된 공간 속 화려한 옷을 입은 인파를 보면서도 왠지 모를 공허함이 느껴진다. 이윽고 안개가 자욱한 강가로 나아가는 어두운 문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그 허망함은 극대화된다.  그 강물을 마주하며,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관객도 고민하게 된다.

 

<러시아 방주>는 관객에게는 한 시간 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300년일 시간을 함께 쫓아오게 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영화 공간의 바깥과 다시 조우하게 만든다. 그 시점에서 관객은, ‘내가 함께 따라다니던 이곳이 방주였구나!’하며 깨닫게 된다. 따라서 영화의 제목인 ‘러시아 방주’는 작게는 에르미타주 궁일 수도 있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도시 전체일 수도 있으며 러시아 전체일 수도 있다. 나아가 ‘러시아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질문하는 개개인의 러시아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근대적 공간, 박물관


 

박물관으로 등장하는 영화의 공간은 역사적 맥락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흔히 박물관은 근대성의 상징 공간이기도 하나, 이때의 근대는 또한 ‘유럽의 근대’이다. 전리품의 보관 및 전시를 위하거나 국가 단위 구획의 정당성을 확실시하기 위해 탄생한 공간이 박물관이다. 민족국가를 만들고 공고히 하는 데에 역사가 적극 활용되었던 것처럼, 박물관은 제국주의적 의식 아래에 많은 존재를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시선을 창조해내는 가장 유럽적이고 근대적인 공간이다.

 

따라서 권력의 시선에 의해 구성된 공간으로 박물관을 설명할 수도 있다. 왕의 권력에서 ‘근대성’의 상징인 부르주아에게로 공간의 통제권은 이양되었으나 근대의 박물관을 과연 공공의 공간으로 명명할 수 있는 것일까? 에르미타주의 경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궁이었다는 점에서 영화는 이 근대성의 변화를 관객들에게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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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의 몫으로 이 고민이 남아있는 이유는 소쿠로프 감독이 의도적으로 권력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에 접근하지 않은 듯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적극적으로 근대성을 비판하거나 왕권으로 상징되는 권력 등에 대해 성찰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러시아 서구화의 구심점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에서 러시아의 정체성을 그려내는 영화라는 점에서 충분히 고민해 볼 만한 주제이다. 또한, 가장 많은 모순과 역설이 얽혀있는 공간을 설정하고 질문을 산출해내는 방식이 시도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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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과 러시아의 동행


 

영화에서 검은 옷을 입고 자신을 ‘유럽인’이라고 소개하며 시종일관 러시아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 사람과 ‘시선’은 동행한다. ‘시선’은 카메라의 것이기도 하고, 현대의 러시아인으로서 감독이자 내레이터라고 추정할 수 있다. 검은 옷을 입은 유럽인은 19세기의 실존 인물인 드퀴스탱 후작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는 러시아 여행 후 러시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저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낸 인물이다.

 

유럽인과 동행하며 다양한 공간에서 현재 자신의 위치와 나아갈 길에 대해서 고민하는 모습은 단순한 개인의 방황이 아니라 러시아의 방황을 나타내고 나아가 ‘러시아’의 방향성, 정체성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길을 잃고, 찾고, 다시 잃고, 유럽인과 만나고 헤어졌다가, 또다시 만나는 과정을 통해 러시아적 정체성의 변증법적 형성이 은유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의 유럽의 위치도 주의를 끈다. 유럽과 러시아의 관계에서, 그 만남이 대칭적인 만남은 아니다. 검은 옷을 입은 유럽인은 노골적으로 러시아를 싫어한다. ‘시선’은 에르미타주 속 수많은 사건을 마주할 때 유럽인과 함께하고, 유럽인의 감상을 빙자한 비웃음을 그저 바라보아야 한다. 근대적 시선의 주체인 유럽인 앞에서 러시아의 방주는 시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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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서 개념을 빌려 오자면, 서양과 동양의 경계는 ‘상상된 지리’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상상된 지리는 임의적인 구분일 뿐만 아니라, 그 경계를 통해 유럽의 자의식을 형성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설명이다. 즉, 동양의 ‘미개함’과 서양의 ‘우월함’ 사이에서 상상된 경계를 만들어 내고 구원자이자 해방자로서의 유럽으로 자의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서양과 동양의 구분이란 따라서 매우 유동적이며, 유럽화를 추구하며 달려왔던 러시아에 근대성과 서구는 정체성의 고민을 촉발시켰다. 이는 영화를 보는 다양한 ‘타자들’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맥락이다. 근대성과 주체라는 테제는 러시아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인으로서 러시아의 지난 시간을 볼 때조차도 유럽인이라는 존재를 동반해야 하는 영화 속의 상황은 이러한 구조에 대한 상징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유럽에 의해 타자화된 집단으로서의 러시아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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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19세기의 러시아 지식인들은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로 나뉘어 러시아적인 정체성을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들의 고민은 이것이었다. “러시아적인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러시아가 다시 러시아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타자는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며 주체가 구성한 프레임에서 벗어날 것을 꿈꾼다. 그러나 먼저, 무엇이 주체가 구성해놓은 것인지 구별해야 하는 모순을 돌파해야 한다. 영화 <러시아 방주>가 현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유가 된다.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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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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