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만화라는 선물

그 시절, 나는 왜 몸을 따라 그렸을까?
글 입력 2021.03.11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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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만화를 좋아하시는구나!

 

만화 출판사 편집장님을 우연한 기회로 만났고 그 자리에서 편집장님은 내게 말했다. 글쎄, 소위 덕후라 할법한 만화 애호가들 사이에선 그저 귀여운 수준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주변보다는 웹툰 및 만화책에 쏟는 금액이 높은 편이지만 막상 또 그렇게 높은 금액은 아니었기도 했고, 아직 보지 못한 명작도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지난달 만화 수업을 덜컥 신청했다. 첫 수업 날이 되기까지 마음속에 잔잔한 물음이 남았다.

 

 

 

'왜 이제 와서 이렇게까지?'


 

어렸을 적부터 이야기와 그림을 좋아했다. 오빠가 공책 몇 권 분량의 졸라맨 만화를 그려주면 난 그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초딩 동생이자 독자였다. 직접 연재하기도 했다. 아이돌 팬픽을 친구 세 명과 릴레이로 돌아가며 썼고,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는 공포 소설을 연재하며 나 역시 또래 독자들을 두던 시절도 있었다.

 

당시 내 공포 소설의 인물들로 등장하는 것은 친구들의 소소한 꿈이었는데, 화를 거듭할수록 사람이 죽어나가는 잔인한 내용임에도 그건 그들의 즐거움이 되어주었다.

 

남과 공유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어렸을 때 학습만화 『Why?』 시리즈 <사춘기와 성>을 보고 너무 놀라고 말았다. 어른이 되면 이런 몸이 되는 거라니. 처음 보는 적나라한 여성의 몸이었던 것이다.

 

이후로 그 책을 나는 서랍 안 보물로 여겼다. 매번 같은 페이지를 펼쳐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은 물론, 빈 공책을 펼쳐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전혀 야할 것이 없는 그냥 몸일 뿐인데도 그땐 그것이 정말 야하다고 생각했다.

사춘기와 성.jpeg

문제의 장면. 이 책을 보물처럼 꺼내보았던 내 눈빛이 어땠을지 가끔 궁금하다.

 

 

지금 보면 19금 축에도 못 끼는 우스운 그림이었지만 혹여나 누가 볼세라 구석에 고이 모셔놨던 '금기의 공책'은 중학생이 되고 나서 버렸다.

 

고새 머리가 좀 커버린, 다른 게 곧 틀린 거라고 배운 학급 분위기 속 중딩의 눈엔 초딩의 순진한 그림이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들켰다간 내 학교생활은 끝장이야!) 책 속 남녀의 몸에 닿았을 당시의 조용하고 뜨거운 눈빛을 상상했다.

 

 

그 시절, 나는 왜 몸을 따라 그렸을까?

보다 못해 연필을 쥐고야 마는 것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

 

 

이제 와서야 그 책을 왜 버렸을까 다시 보고 싶다며 혼자 킥킥댄다. 미술을 전공한 이후로 뭔가 그리는 것이 지겨워진 탓인지, 중딩 시절보다 더 완전한 사회적인 동물이 되고야 만 것인지, 더 이상 잉여 시간에 이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다시 만화를 그려보겠다고 공책 앞에 앉아있다.



보는 것도 보는 것이지만, 그리는 것을 왜 이렇게 오랫동안 그만두었던 건지! 더 이상 열렬한 초딩 독자는 없지만, 혼자 그려나가는 상상의 이야기가 썩 즐거운 요즘이다.

 

‘와, 만약 이러면 진짜 웃기겠다.’ ‘얘가 완전히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발칙한 상상부터 끔찍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공간이 그저 무해한 종이 위일 뿐이라는 사실은 내게 일종의 어떤 해방감을 주었다.

 

어쩌면 만화란 내내 속으로만 굴렸던 상상이나, 차마 묻어둘 수 없었던 각자의 금기를 풀어내는 공간이 아닐까. 하려는 말에 손짓, 발짓까지 얹어 열심인 사람처럼 아마 말로는 충분치 못한 사람이 그림을 보탤 것이다.

 

일본의 한 만화가는, 자신이 만화를 그리지 않았더라면 사회에서 어떤 범죄를 저질렀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 요새 나도 그 마음을 알 것만 같다.

 

 

사랑해야하는딸들.jpeg

근래 다시 꺼낸 만화. 엄마가 딸인 자신보다 어린 남자를 데려와 결혼을 선언하는 에피소드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길을 걷다가도 이 만화에 나오는 딸들의 어떤 표정이 문득 떠오른다.

 

 

어쩌다 집에서 끄적대는 게 아니라 ‘수업’까지 듣게 되는 바람에 요즘은 공부 목적으로 이런저런 만화를 찾아보고 있다. 초면인 작품은 새롭게 재미있고, 다시 보는 명작은 역시 뛰어나게 재미있다. 막상 잘 그리고 싶어지니 내가 대충 훑고 페이지를 넘기며 깔깔댔던 모든 작품의 만화가들에게 존경심이 들고 또 왠지 죄송하다.

 

다들 치열하게 생각하고 공들였을 이야기인데 감히 제가 호로록 넘겨가며 읽어도 정말 괜찮은 것인지 묻고 싶다. 하지만 아마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네가 그 순간 자유로웠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그게 만화의 존재 이유니까 말이다.

 

 

 

최혜민 컬쳐리스트.jpg

 

 

[최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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