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느 누구에게도 답을 할 필요가 없는 - 키르케 [문학]

글 입력 2021.02.24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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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라는 첫 문장으로 유명한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와 더불어 내로라하는 영웅들의 싸움을 노래하고 있다. 전쟁 이후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그린 <오디세이아>로 이어진다. 이 두 작품에서는 용기와 자신감, 화려한 검술까지 갖춘 영웅이 역사의 표지를 장식한다. 이 조건은 신화에 기록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다.

 

매들린 밀러는 전쟁 영웅 대신 하급 여신 ‘키르케’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능력도 없고 권위도 없는 하급 여신이 표지를 장식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키르케는 신에 능력이 출중한 것도 아니며, 신에 필적할 운명으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매들린 밀러의 선택이 기대되는 이유는 마녀 키르케를 어떻게 만들어낼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마녀가 된 이유, 영원히 오디세우스를 그리워할 것인가 등 이면에 감춰진 이야기가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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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하게 굴다 영웅의 칼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는 마녀. 기가 꺾인 여자들이야말로 시인들의 가장 주된 소재인 모양이다. 우리들이 바닥을 기며 흐느껴 울지 않으면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없는 걸까.”

 

P.266

 

 

<오디세이아>에서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방해하는 마녀로 묘사된다. 헤르메스의 도움을 받아 오디세우스는 무사히 키르케의 섬에 거할 수 있게 된다. 막상 키르케를 대면하니 키르케는 그에게 사랑을 갈구하고, 자신에게 머물고 떠나지 말기를 애원했다. 단순히 그가 인간을 돼지로 만들기 때문에 포악한 성격으로 수식하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다. 남성도 어찌하지 못하는 매력적인 ‘마녀’를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그려 놓았다.

 

소설 <키르케>는 키르케를 전면에 내세워 목소리를 부여한다. 그리고 단순히 하나의 모습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사랑에 눈이 먼 자, 욕망에 충실한 자,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신과 대적하는 강인한 자 등 다양하고 다채롭게 그를 묘사한다. 그가 왜 홀로 왕국에서 지내야 했는지, 자신을 찾아오는 인간들을 돼지로 변신시키는지, 오디세우스가 떠난 후 그의 삶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질문에 답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존 여성을 그리는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며 하염없이 오디세우스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여인으로 고고하고 지조를 지킨다는 여성이라는 틀에 가두지 않는다. 키르케뿐 아니라 오디세우스,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 등 키르케 외에도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찾아냈다. ‘원래’ 그런 인물은 없다. 모든 인물은 과거와 겹겹이 쌓여 현재를 이루고 있다. <키르케>는 발견되지 않았던 인물의 역사를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피를 흘리는 전쟁 대신 자신을 성장시키고 세계를 완성시킨다. 폭력과 파괴, 강한 힘을 가진 남성의 신화에서 부드럽고 견고한 힘으로 자신의 세계를 굳건히 쌓아 올린 키르케의 일생을 만나볼 수 있다.

 

 

 

내 이름은 키르케


 

키르케는 ‘신’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리지 않은 아이였다. 타오르는 태양의 힘을 가진 아버지에게서 어떤 능력도 물려받지 못했다. 자신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남동생과 여동생을 피해 다니고, 능력 있는 남동생에 의지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자신이 무능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미래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었다.

 

인간을 사랑하게 되고, 욕망이 생긴다. 그와 영원을 함께하고 싶다는 갈망. 그에게 약을 먹여 신이 되게 한다. 신들은 약초를 달여 인간을 신으로 만들 수 있으며, 님프를 괴물로 만들 수 있는 키르케의 능력을 두려워했다. 두려워한 나머지 그를 작은 섬으로 유배시킨다.

 

타인의 의지로 시작된 모험은 시작부터 휘몰아치는 파도와 같았다. 소용돌이를 만들어 그를 삼키려 했어도, 그는 기어이 자신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갔다. 미성숙한 그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며 휘몰아치는 운명의 흐름에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일어나 삶을 살아가고 자신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울면서 일어날지언정 쓰러지지 않는다. 그런 키르케의 모습은 신들에게는 꽤나 재미있게 느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을 닮았기 때문이다.

 

 

“노력과 끈기를 통해, 태양 아래에서 빛날 때까지 정원을 가꾸듯 기술을 연마해가며. 하지만 신들은 이코르와 넥타르의 산물이라 탁월함이 이미 손끝에서 터져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입증하며 명성을 쌓았다. 우리의 제단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그 모든 연기와 향기. 남는 건 재 가루뿐이었다.”

 

P.176

 

 

가늘고 매가 우는 듯한 목소리, 계속해서 능력을 갈고닦는 모습은 신보다는 인간의 모습에 가까웠다. 그의 실패하고 성장하는 모습조차 인간을 닮았다. 반대로 완벽하게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 영생이 보장된 신은 파괴를 일삼으며 자신의 존재를 부각했고, 지루한 그야말로 죽은 삶을 살고 있다. 실패와 시련을 통해 성장하는 키르케는 마지막에 큰 선택을 통해 성장에 마침표를 찍는다.

 

 

 

마녀 키르케


 

신들이 갖지 못한 능력은 곧 그들의 약점을 뜻한다. 주술과 약초를 사용하는 키르케에게 붙은 별명은 마녀다. 흔히 마녀란 남성도 어찌하지 못하는 여성을 뜻한다. 세게 말하자면, 남성의 권위를 거세하는 여성을 마녀 또는 악녀라고 부른다.

 

이런 특징으로 키르케는 마녀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악녀, 마녀라 불리는 인물은 아가멤논을 죽인 ‘클리타임네스트라’,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악랄한 여성으로 평가받는 ‘메데이아’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키르케는 클리타임네스트라와 메데이아와는 다른 마녀다. 남을 죽이지도 않으며, 기꺼이 환대의 법칙으로 손님을 맞이한다.

 

한 드라마 대사를 빌려서 표현한다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울지도 않고 대들지도 않고, 욕망에 눈이 멀어서 제 살 길만 강구하는” 인물이다. 타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스스로를 부서트리지도, 자신을 유배시킨 아버지와 신들을 원망하지 않고, 제 능력을 계발하고 이용해 삶을 살아간다.

 

이 모습은 기존 마녀의 모습과 다르다. 애초에 마녀는 인물의 성격을 가리우는 단어다. 대범한 클리타임네스트라, 또는 순종적이지 않고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메데이아, 부드럽고 통찰력 있는 키르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지만, 그들에게 붙여진 이름은 마녀다. 이제는 다양한 수식어가 필요하다.

 

엄청난 능력이 있는 영웅도 아니고, 모든 것을 불태우는 악녀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권위에 순종적이고 무해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반응할지를 몰라 그저 가두어야 할 존재다. 그렇기의 키르케는 특별한 위치에 놓인다.

 

키르케는 능력을 갈고닦아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타인의 것을 빼앗거나 위협하는 데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누구도 자신을 해치지 못하도록, 순진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도록 무기를 사용한다.

 

악녀, 또는 마녀라 일컫는 자들은 아무 이유 없이 살육을 즐기거나 남의 것을 빼앗으려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빼앗기거나 자신의 것을 부쉈을 때에 굴복하지 않고 똑같이 되갚을 뿐이다. 그럼에도 사회를 위협하고 붕괴시키는 ‘마녀’로만 남게 된다. 소설에서는 이 부분을 분명하게 조명한다. 단지 신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마녀가 되어버린 키르케를.

 

아버지에게 대들었을 때, 그때부터 마녀로서 키르케의 삶이 시작되었다. 폭풍에 휘몰아치는 운명을 해쳐내고 기꺼이 파도에 맞서며 성장하면서 그만의 역사를 축적했다. 그 결과 감히 아테나에게 대적하고, 아버지에게 대담하게 협상을 이끌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항해 끝에 스스로 존재에 대해 답한다. 마녀란 ‘무한한 능력을 소유한, 자기 자신 말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답을 할 필요가 없는’ 자로 말이다.

 

**

 

신화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출중한 능력의 영웅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클리타임네스트라처럼 대범해야 하고, 메데이아처럼 악랄하고 모든 것을 부숴버릴 정도의 성정을 지녀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성격이 되지 못했고, 그들처럼 되기를 포기해왔다.

 

이런 생각을 바꿔준 건 <키르케>였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였음에도 욕망대로 움직이고, 자기 자신에 확신을 갖는 키르케의 모습에 반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단단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마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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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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