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 블라인드

나를 기억해줘. 네 손끝, 네 귓가에 남은 나를
글 입력 2021.01.16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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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

영화 <블라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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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루벤'.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고 짐승처럼 난폭해진 그를 위해 어머니는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고용하지만 다들 오래가지 못해 그만둔다. 새로운 낭독자로 온 '마리'가 첫만남에서부터 루벤을 제압한다. 마리는 어릴 적 학대로 얼굴과 온몸에 가득한 흉측한 상처와 남들과 다른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니지만 볼 수 없는 루벤 앞에서만은 자신을 드러낸다.

 

루벤은 [눈의 여왕]을 읽어주는 마리의 기품 있는 목소리와 단호한 행동에 관심을 갖고, 마리를 아주 아름다운 모습일 거라 상상하며 사랑에 빠진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는 것이 처음인 마리 역시 낯선 이 감정이 사랑임을 깨닫고 마음을 연다.

 

하지만 루벤이 수술로 눈을 치료할 수 있게 되면서 마리는 자신을 보고 실망할 것이 두려워 그의 곁을 떠난다.

 

이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된 루벤은 사라진 마리를 찾아 방황하는데...

 

 

네덜란드 영화 <블라인드>는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이국적인 발음들과 새하얀 설원이 펼쳐지는 풍경이 가득한 영화는 한 편의 기묘한 동화같았다.

 

동화 [눈의 여왕]은 눈과 심장에 거울 조각이 박힌 카이를 찾아 여정을 떠나는 겔다의 이야기이다. 추한 것만 비추는 거울은 카이의 눈을 멀게하고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잔인하고 짓궂게 변해버린 카이의 마음은 겔다의 진심어린 눈물에 녹아 다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 속 루벤과 마리는 둘 다 카이를 떠오르게 했다. 시력을 잃은 루벤은 집 안에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절망과 낙담, 분노 속에서 루벤은 점점 난폭해졌고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으려 한다.

 

마리는 자신의 외모를 비난하는 부모에게 어린시절부터 시달려왔다. 거울 앞에서 폭언을 듣던 어느 날, 거대한 유리가 무너져내렸고 조각들은 마리의 온몸에 박혀 수많은 흉터를 만들었다. 그 날부터 마리는 커다란 두건을 두른 채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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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지닌 두 인물이 만나게 되면서 서로의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루벤은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서스럼없이 대하는 마리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마리는 자신의 외모를 볼 수 없는 루벤 앞에서 좀 더 자유로워진다. 루벤은 마리를 통해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책을 읽는 마리의 목소리는 눈 앞에 생생한 장면을 그려내준다. 매번 감추기 급급했던 마리의 흉터는 루벤의 손끝에서 빛나는 눈꽃 결정으로 피어난다. 이처럼 둘은 서로에게 겔다가 되어주며 얼어붙은 마음을 녹인다.

 

[눈의 여왕]속 카이와 겔다는 얼음 조각을 맞춰 '영원'이라는 글자를 완성하며 해피엔딩을 맞는다. 루벤과 마리의 사랑도 영원할 것 같았지만 루벤이 수술로 시력을 되찾게 되면서 상황은 변했다.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보여질 것을 두려워 한 마리는 숨어버리고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루벤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뜨고 본 세상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제일 처음 보게 된 세상은 윤락가였고 많은 여행을 다녀봐도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고향의 어느 도서관에서 마리가 읽어주던 책을 찾던 루벤은 마리와 마주친다. 마리에 흉터에 놀라는 모습을 보이지만 향기와 목소리를 통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마리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보고 놀라던 루벤의 표정에 상처받은 마리는 다시 자취를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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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루벤,

이 편지를 읽을 쯤이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보고 있겠지. 허나 가장 아름다운건 네 손끝으로 본 세상일거야.

 

내 사랑, 나를 기억해줘. 네 손끝, 네 귓가에 남은 나를. 너로 인해 난 놀라운 사랑을 봤어. 가장 순수한 사랑. 진실한 사랑은 보이지 않아. 영원함도 그렇고.

 

 

마리의 편지를 곱씹던 루벤은 뾰족한 고드름 두 개를 집어든다. 그리고 그 위로 고개를 내리꽂아 자신의 눈을 다시 멀게 한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지만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던 루벤의 행동, 눈에 붕대를 다시 감은 마지막 장면에서 더 행복해보이는 루벤의 표정에선 순수한 사랑이 느껴졌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 눈을 감아야 보이던 광경들, 손끝으로 느끼던 감각들은 모두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선택이었지만 루벤의 희미한 미소에서 후회는 없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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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결말은 해석이 분분하다. 다시 돌아온 마리가 뛰어노는 장면일 수도 있지만 나는 루벤의 환영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의 배경이었던 설원과는 대비되는 푸르른 녹음이 가득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눈의 여왕]을 다시 읽은 뒤에는 조금 다른 생각도 든다. 동화의 결말에서 사랑을 되찾은 카이와 겔다가 집으로 돌아오자 마을에는 여름이 찾아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자신을 보고 놀란 루벤을 보며 상처받은 마리의 표정을 생각한다면 둘의 재회는 루벤의 상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더 크다. 마리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났고, 루벤은 보이지 않는 삶을 다시 택했다.

 

영화 <블라인드>는 어둠으로 들어간 두 인물이 어디선가 행복하길 바라게 되는 먹먹한 영화였다.

 

 

[정선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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