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느리고 긴 대화 나누기 – 프리즘오브 16호 비포 트릴로지 [도서]

글 입력 2021.01.0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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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책의 형태로 발행되는 매거진을 구독하거나 구매해본 적이 손에 꼽는다. 책을 사서 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매거진이라는 장르는 온라인에서도 발행되는 경우가 많은 탓에 종이잡지에는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매거진 B, 책Chaeg, 컨셉진 등 유명한 매거진들의 이름을 들어본 적은 많아도 정작 제대로 읽어본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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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과는 그리 친하지 않던 내가 프리즘오브 16호를 알게 된 건 순전히 친구 덕분이었다. 2020년 가을호인 16호에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트릴로지가 주제로 선정됐다. 친구는 이번 호의 인터뷰이로 참여한 후 받게 된 몇 권의 잡지를 내게도 한 권 선물해줬다. 사랑하는 친구가 참여한, 심지어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비포 트릴로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이번 호를 기대감에 찬 눈으로 하나 하나 읽었다.


영화잡지라 하면 보통 다양한 영화를 다루기 마련이다. 영화마다 별점을 매긴다던가, 어떤 기준에 따라 순위를 매기거나 여러 영화들에 대한 평론이 목차를 차지한다. 하지만 프리즘오브의 경우 조금 다르다. 매 호 하나의 영화만을 다룬다. 그리고 그 하나의 영화를 독자들과 편집부, 여러 명의 전문 필진들이 각기 다른 관점에서 풀어낸다. 가시광선이 프리즘을 통과하며 굴절되어 무지개색으로 분산되는 것처럼, 프리즘오브라는 매거진을 통해 하나의 영화는 다양한 시선으로 확장된다.

 

그 시선들은 라이트, 프리즘, 스펙트럼 세 개의 목차로 나뉘어 구성된다. 각각 관객 서베이와 감독의 행보, 영화의 주요 장면 분석, 키워드를 통한 영화의 주제를 조명한다. 각 섹션의 마지막에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에서 나눴던 대화들을 질문으로 재구성해 각각 20대, 30대, 40대 커플이 문답한 인터뷰가 실려있다.


 


내가 비포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



 

헥터: 독서에서 최고의 순간은 생각이나 느낌, 아니면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나만 그렇다고 느꼈던 것을 책을 보다가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지. 만난 적도 없고,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이 사람과 글속에서 바로 그걸 발견하는 거야. 마치 책 속에서 손이 나와서 내 손을 잡아주는 것 같이 말이다.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비단 책뿐만 아니라 우리가 향유하는 음악, 영화, 미술 등의 예술에서 이런 순간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나 스스로 정의한 관점들을 만나게 되는 순간, 내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명징하고 아름다운 언어 또는 이미지로 표현되는 순간 말이다. 내가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그런 순간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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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라이즈 스틸컷

 

 

비포 트릴로지에서 제시와 셀린이 나눈 대화 역시 그랬다. 나는 제시이면서 셀린이기도 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혼자 그들의 문답에 나만의 정의를 내리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제시의 말에, 또 어느 순간엔 셀린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나의 경험에서 비롯된 나름의 성찰을 그들의 입을 통해 마주할 때도 많았지만 그들의 관점이 너무도 마음에 들어 그대로 나의 가치관이 되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하나의 영화 속에서 깊이 유영하기



예술이 나에게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아줄 때처럼, 사람들과 그 감상을 나눌 때 역시 그와 같은 공감의 순간을 경험한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라는 이동진 기자의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가볍게 친구나 온라인에서 익명의 사람들과 후기를 공유하는 것부터 영화평론가의 평론, 수없이 양산되는 콘텐츠들로 영화는 다시 시작된다. 이 단계가 영화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짙은 여운을 남겨 가끔은 영화 자체보다 더 의미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프리즘오브의 매거진은 바로 그런 역할을 했다. 하나의 영화를 다각도로 해석하고 영화를 풍부하게 만드는 장을 만들었다. 온라인처럼 빠른 호흡은 아니지만 지면 안에 인쇄된 활자들을 천천히 읽어내려가며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느리고 긴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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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의 첫 섹션 "라이트"는 이름답게 본격적인 분석에 들어가기 전 비포 시리즈의 기억을 되살리는 가벼운 콘텐츠로 구성되었다. 시작은 우리가 비포 시리즈를 사랑하는 이유였다. “보자마자 삶에 집어넣고 싶어지는 영화가 있다. 영화라기보단 기억이었으면 좋겠다 싶은 영화.” 라는 김인정 기자의 첫 문장을 시작으로 가장 좋아하는 비포 시리즈 앙케이트, 독자들이 자기만의 언어로 정의한 비포 시리즈의 의미를 읽어내려가며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영화 하나로 엮이는 동질감을 느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그의 행보를 돌아보는 글에선 비포 시리즈의 개입이 거의 없는 편집 스타일과 “실제 삶의 느낌에 충실한(organic to how life feels)” 연출의 출처를 짐작했다.

 

뒤이은 페이지엔 셀린의 일기와 영화 속 장소들을 지도로 만날 수 있는 QR코드가 있다. 여행이 그리운 지금 구글맵으로나마 비포 트릴로지의 장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비포 선라이즈가 영화 마지막에 비엔나의 거리를, 비포 선셋이 영화 시작 파리의 거리를 비췄듯 나는 구글맵의 사진 속 빈 공간을 그들의 장면으로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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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섹션 "프리즘"은 비포 트릴로지의 주요 장면들을 연출 방식과 미장센으로 분석한다. <비포 선라이즈>는 꿈, <비포 선셋>은 셀린과 니나 시몬의 노래, <비포 미드나잇>은 현실 속에서 다시 역할극을 수행하고자 하는 씁쓸함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필진들의 글은 영화를 다시 감상하는 듯했다. 영상과 대사가 아닌 글로 이루어진 영화. 영화 속 흘러가는 시간 대신 느린 호흡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다시 쓰인 영화를 읽어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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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스펙트럼"에서는 영화 바깥의 시선들을 가져와 말, 시간, 산책, 신화라는 네 가지 키워드로 영화를 조명한다. 다채롭게 펼쳐지는 프리즘의 스펙트럼처럼 비포 시리즈는 에릭 로메르와의 연결성,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주조하는 시간의 모양새, 모더니즘 소설과 시지푸스 신화의 맥락 하에 재해석되었다.

 

 

 

실제 연인들이 다시 만들어낸 비포 트릴로지



비포 트릴로지가 아무리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고 사랑의 낭만과 현실을 다뤘다고 해도 픽션은 픽션이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각본 하에 꾸며진 이야기는 한편으론 더 이상적이고 닿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각 파트의 마지막에 실린 실제 커플들의 인터뷰가 더욱 의미있게 다가왔다.

 

20대에 꿈과 낭만 속에 만난 제시와 셀린의 대화는 질문으로 바뀌어 20대 커플에게 이어진다. 낭만과 현실 사이에 재회한 30대의 제시와 셀린의 대화는 30대 커플에게, 과거의 낭만은 이미 아득하고 주어진 현실이 버겁기만 한 40대의 그들의 대화는 40대 커플에 의해 다시 재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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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커플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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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커플의 인터뷰

 

 

제시와 셀린의 사랑이 시작되고 그것이 사그라드는 과정을 영화를 본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영화 속 인물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실제 커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겐 과거와 현재, 막연한 미래만이 놓여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만의 관점에서 작성하는 문답에는 미래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무지하기 때문에 희망찬 모습과 앞으로 다가올 갈등에도 쉽게 서로를 포기하지 않을 거란 믿음과 의지가 보였다.

 

제시와 셀린과 닮아 있는 이들의 모습은 영화가 픽션임에도 우리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는 영화야’ 라고 단념했다가도 그들의 문답을 보면 실제로도 이런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인터뷰는 각본에만 존재하는 제시와 셀린을 현재로 불러오고, 영화를 현실로 확장시킨다.

 

어린 날의 치기어린 사랑이 그리울 때, 당신이라는 환상을 믿고 싶어질 때, 낭만없는 현실에 지쳐갈 때 우리는 영화 속에 박제된 제시와 셀린의 이야기를 본다. 잠겨있던 감정이 떠오르듯 영화는 우리의 기억을 되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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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커플의 인터뷰

 

 

연인들의 인터뷰 역시 그렇다. 그들이 꿈꾸는 것들, 지키고 싶은 가치를 담은 문답은 현실에 잠식되어 옛 감정이 아득해질 미래에 서로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타임 캡슐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인터뷰이는 아니었지만 매거진에 실린 질문들을 하나하나 답해보고 싶어졌다. 이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타임 캡슐을 묻어두고 먼 미래에 꺼내볼 수 있도록 말이다.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종이잡지의 가치


 

이번 호를 다 읽고 난 후에 나는 많이 후회했다. 종이책이라면 모를까 종이잡지의 존재를 크게 고민하지 않은 나를, 이제서야 프리즘오브를 알게 된 내 좁은 시야를 탓했다. 심지어 과월호의 영화목록들은 대부분 내 취향이었다.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다양한 인사이트를 정리된 형태로 접할 수 있는 이 매거진을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잡지는 인터넷보다는 무겁게, 단행본보다는 가볍게 주기적으로 정보를 큐레이션하는 매체로서 생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어터플러스 [SPECIAL] 굳세어라 매거진 중 프리즘오브의 인터뷰 발췌

 

 

지금은 그야말로 디지털 콘텐츠의 시대다. 클릭 한 번으로, 손가락 터치 한 번으로 원하는 콘텐츠를 얼마든 읽을 수 있다. 간편하고 무료로 제공되는 콘텐츠도 많아 온라인에 이미 읽을거리가 넘쳐난다.

 

그럼에도 종이잡지는 여전히 존재한다. 누군가는 종이 매체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하지만 디지털 매체로는 대체될 수 없는 종이 매체의 특성이 분명 있다. 인터넷에 파편화된 정보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부여되는 서사의 힘. 양질의 글을 큐레이션해 배치한 매체의 가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프리즘오브의 16호로 뒤늦게서야 매거진을 제대로 접했지만, 이번 호로도 그 가치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잡지라는 매체의 정체성을 고수한 채 올해로 5년차, 16호까지 발행된 이 매거진을 응원한다. 아직 다루지 못한 더 다양한 작품들을 프리즘오브에서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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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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