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실화를 바탕으로 할 때 마음가짐 [영화]

“크리스마스엔 돌아오겠다던 엄마가 돌아오지 않았다.”
글 입력 2020.12.14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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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바탕"



가끔 어떤 영화들은 홍보를 위해 이 문구를 예고편과 포스터에 본격적으로 내세우곤 한다. 흥미진진한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에 버젓이 존재했던 사실이라는 점이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에서이다. (믿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인 감정을 “실화냐?”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 정도로 ‘실화’라는 건 놀랍기도 한 일이 된다) 영화의 소재로 가져오는 실화 대부분은 정말 감동적이거나 끔찍한데, 여기서 우리가 정말 “실화냐”고 묻게 되는 영화는 아마 후자, 비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가져온 영화이다.


그렇다면 그 비극적인 실화를 어디서 듣게 되나. 바로 뉴스다. 인터넷과 티비로 어딘가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접하는 건 우리에게 더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건 정말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몇 개월 전, 실시간 검색어에서 좀처럼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 실화를 접했다. 비극적인 실화였다. 나는 그 실화 속 사람, 일반인 A가 겪은 일을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뉴스 카테고리를 클릭했다.

 

여러 언론사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A의 이야기를 기사로 내놓았지만, 곧 언론사를 구분하는 의미를 모르겠을 정도로 그 내용이 일관되어 있음을 알아챘다. 모든 기사가 사건을 똑같이 서술하고 있던 것이다. 단락마저도 똑같은 그 문장들은 일종의 주문(呪文)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A는 그냥 ‘그런 사람’이 되었으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A의 삶은 ‘그런 삶’으로 짧게 요약되었고, ‘그런 사람’으로 평가되어 실컷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되어서야 실시간 검색어로부터 내려와 비로소 잊힐 수 있었다.


나는 결국 A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알 순 없었다. 뭘 더 알고자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알 수 없게 되었다. 주문 같은 문장을 읽으면서, A가 겪은 사건의 규모나 끔찍한 정도를 떠나 그 사건이 A의 삶 전체를 꿀꺽 삼켜 버리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A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래서 한때는 그런 게 궁금했다. 깔끔하고 납작한 택배 상자처럼 배달 오는 뉴스 속 비극을 영화의 소재로 가져오는 이유를 말이다.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할 수도, 복잡하게 얽혀 가져와진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영화라는 허구적 시공간에 비극적인 실화를 가져온 이상, 적어도 ‘어떠한 마음’은 먹고 시작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정확히 뭔진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최근, 꺼내본 영화 하나가 그 ‘마음’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아무도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04



아무도 모른다 영화 포스터 11.jpg

 

 

“크리스마스엔 돌아오겠다던 엄마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 문장은 영화 <아무도 모른다>가 담고 있는 내용이자,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1988년 도쿄에서 일어난 ‘니시스가모 네 아이 방치 사건’을 바탕으로 이 영화의 각본을 썼다.


저 문장의 바탕이 되는, 실제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장남이 초등학생이 되기 전 아버지가 떠났고, 어머니는 백화점에서 일하며 이후에도 몇몇 남성들을 만나 임신과 자택 출산을 반복했다. 아이는 다섯 명이 있었는데(장남, 장녀, 차남, 차녀, 삼녀) 그중 차녀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아이들은 모두 출생 신고가 되어있지 않아서, 학교도 가지 못했고 집에서만 지냈다.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으로 아이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다. 영화의 제목 <아무도 모른다>가 아마 이 지점에서 지어졌을 거라고 본다.)


장남이 열네 살이 되던 무렵, 어머니는 애인과 살기 위해 네 아이를 두고 집을 떠났다. 간간이 어머니가 등기우편으로 보내주는 생활비로 버텨왔지만,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그러다 장남의 친구들이 울음을 그치지 않는 삼녀를 벽장에서 떨어뜨리는 행위를 반복하였고, 결국 삼녀는 사망했다. 장남은 삼녀의 시체를 보스턴백에 넣어 지치부의 잡목림에 묻었다. 그 후 집주인이 아이들만 사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경찰에 신고했고 어머니는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아무도 모른다 333.jpg

 

 

<아무도 모른다>에 나오는 도쿄 가정집엔 공식적으로는 엄마와 장남인 아키라야기라 유야 둘만 사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사실 아이 세 명이 더 살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 이 다섯 식구는 비밀스러우면서도 꽤 사랑스럽다. 비밀스럽다는 건, 출생 신고가 되어있지 않은 아이들이 세상에 몰래 존재하기 위해 발코니도 나갈 수 없었던 모습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고, 사랑스럽다는 건, 나갈 수 없는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손수 다듬어주는 엄마와 그렇게 다듬어진 자신의 머리가 썩 맘에 들진 않지만 머쓱하게 웃어 보이는 아이의 장난기 어린 눈이 그랬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엔 돌아오겠다던 엄마의 외출을 시작으로 영화는 네 아이만 사는, ‘아무도 모르는’ 집 안의 삶을 지켜보기 시작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엄마가 떠난 후 아키라야기라 유야의 묵묵함이었다. 왜 아키라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동생들을 버리지 않은 걸까. 그렇게 도망친 엄마처럼 말이다. 생활비가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도 아키라는 동생들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았다. 자신들을 버리고 간 엄마가 해맑은 목소리로 공중전화 너머에서 아키라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그건 아마 떠나기 전 식당에서 ‘나는 행복해지면 안 돼’냐고 투덜대던 엄마의 말을 아키라가 기억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여느 아이들이라면 그랬을 것처럼) 울지 않았고, 울지 않는 눈은 나를 슬프게 했다. 아키라는 엄마의 전 남자친구들을 찾아가 생활비를 부탁하고, 고작 12살짜리가 알바를 할 수 있는지 여쭤보았다. 그리고 엄마가 아닌 다른 어른에게 세뱃돈 봉투에 동생들의 이름을 써달라는 부탁을 무릅쓰며 엄마가 돌아올 거라는 동생들의 믿음을 지켜주었다. (하지만 차녀는 알고 있다. 작년 세뱃돈 봉투에 적혀져 있는 엄마의 글씨체와 올해의 것이 다르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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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사라진 엄마 대신 세뱃돈 봉투에 글씨를 적던 어른은 아키라야기라 유야에게 묻는다.


 

“경찰이나 사회 복지 센터 같은 데 연락하는 게 좋지 않아?”


(고개를 단호하게 젓는다) “그러면 다 뿔뿔이 흩어지잖아요”



그 말을 하는 아키라에게서 짐작해보았다. 어쩌면 아키라는 동생들을 많이 사랑했을지도 모른다고. 뿔뿔이 흩어지지 않은 너희들에게서 행복이 있었구나. 엄마가 사라진 이후에, 그래도 그들은 어느 순간은 행복하기도 했구나. 그리고 그 사랑은, 지금은 너희를 버리고 사라진 엄마로부터 배운 것일지도 모르지.


이 영화가 비추는 네 아이의 집 안은 ‘니시스가모 네 아이 방치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납작한 택배 상자의 틈을 상상으로 풀어본 풍경이다. ‘니시스가모 네 아이 방치 사건’에서 그들은 ‘무책임한 섹스를 한 나쁜 엄마’와 ‘방치된 안타까운 아이들’로 정리되었지만, 적어도 영화는 그렇게 쉽게 정리될 수 없는, 삭제됐을지도 모르는 짧은 행복을 상상하도록 돕는다. 이 상상의 공간에선 어떤 인물에게서도 뉴스 기사를 보던 때처럼 얄팍한 도덕적 판단을 쉬이 내릴 수 없다. 심지어는 아이들을 버리고 떠난 엄마조차도 나쁘다고 단정할 수 없는데, 엄마는 아이들을 방치하고 부모로서의 중요한 의무를 해내지 못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결국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만들어준, ‘사랑’을 처음 나눠준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도 모른다>의 영화적 상상은 무례하지 않다.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대본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실화를 어떻게 반영했는지를 유심히 보다가 어떤 부분에서 혼자 조금 감동했다. 삼녀의 죽음과 관련한 부분이었다.

 

실제 사건에서 삼녀는 장남의 친구들이 반복적으로 옷장에서 떨어뜨려 끝내 사망했지만, 영화에서 삼녀인 유키시미즈 모모코는 의자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지면서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실제 사건에서 삼녀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장남의 친구들을 잊지 않은 듯 보였는데, 영화에서 아키라야기라 유야의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 게임을 하는 신scene이 그렇다.

 

차남인 시게루키무라 히에이가 아키라의 친구들을 귀찮게 굴자 그들 중 한 명이 손으로 시게루를 밀쳐 뒤로 넘어진다. 웬만해선 나쁘다, 나쁘지 않다 같은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가 힘든 인물들 속에서 유일하게 그 친구들의 장면이 “나빴다”라고 얘기할만한 모습처럼 보이는데, 그 장면은 내게 실제 삼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잊지 않겠다는 단호함처럼 읽혔다. 나는 이런 지점에서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일에 있어서 적어도 ‘어떠한 마음’은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건 일종의 책임감 같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엔 돌아오겠다던 엄마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방치되었고, 힘겹게 버텼다.)



우린 다시 이 문장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이 영화를 다시 한번 봐야겠다는 나의 말에 친구가 영화의 러닝타임을 물었다. 두 시간 반 정도 하는 영화라고 대답했더니, 친구는 그 정도로 긴 러닝타임이면 큰맘 먹고 봐야 한다며 웃었다. 나 역시 동감했다. 위의 요약된 문장의 틈에서 찰나의 다채로움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하는 데에 성공하기 위해선 최소 두 시간 반은 필요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의 얄팍하고 가벼웠던 맘들이 떠올랐다. 두 시간 반은 긴 시간이었지만, 길지 않기도 했다.


겨우 이 정도의 러닝타임으로 실제 그 삶의 다채로움을 나로서는 절대 알 수 없으리라. 두 번, 세 번, 다섯 시간, 열 시간을 보더라도 조심스레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일은 분명 비극적이었지만, 그들의 삶 자체가 비극은 아니었을 거라고.


나는 다음엔 또 어떠한 마음을 먹을지 고민한다. 뉴스 속 비극을 주문처럼 받아들이겠노라는, 먹기 쉬운 마음인가. 일종의 책임감 같은 마음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조심스레 상상해보리라는 두 시간 반짜리 마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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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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