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당신에게 '안티고네'는 어떤 의미입니까? - 안티고네 [영화]

소피 데라스페 <안티고네>
글 입력 2020.11.1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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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는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와 그의 어머니이자 왕비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는 안티고네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안티고네의 모습은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만들어졌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안티고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권력다툼을 벌이다가 서로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다. 새로 테바이의 왕이 된 크레온은 아르고스의 군대를 이끌고 조국을 공격한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게 한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폴리네이케스를 위해 장례를 치러주다가 잡힌다. 안티고네는 혈족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은 신들의 불문율이라고 주장하지만 크레온은 안티고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무덤에 산채로 가둔다.

 

크레온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약혼자인 하이몬이 크레온을 말려보지만, 그는 요지부동이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와서 천륜을 어기면 큰 낭패를 볼 것이라고 하자 그제야 크레온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무덤에 간다. 크레온이 무덤에 갔을 때, 안티고네는 이미 목을 매달아 자살했고, 아들 하이몬이 죽은 안티고네를 붙들고 있다. 하이몬은 크레온을 칼로 찌르려다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궁전으로 돌아온 크레온은 아내 에우뤼디케가 절망하여 자살했다는 비보를 접한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며, 그 해석에 대한 반응도 다양하다. 헤겔에게 <안티고네>는 친족의 법과 국가의 법의 대립이며, 그중 친족의 법을 대변하는 안티고네는 역사적 변증법으로부터 배제된 부정적인 인물이다. 밀즈에게 안티고네는 행위의 주체이자 자의식적 존재다. 이리가라이는 안티고네를 여성적 욕망의 상징으로 바라본다. 버틀러에게 안티고네는 성과 친족의 개념에 도전하는 급진적이며 저항적인 인물이다.

 

라캉은 안티고네를 통해 죽음으로 향하는 자유를 본다. 인종차별정책에 맞서 싸우던 만델라에게 안티고네는 대의를 위해 사적 가치(결혼)를 버리고 악정을 펼치는 통치자에게 저항하는 인물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 아래 파리에서 공연되었던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 또한 그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이렇듯 안티고네는 여태까지 다양하게 해석되고 창조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소피 데라스페 감독이 그려낸 안티고네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민자, 안티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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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티고네>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 <안티고네>를 캐나다 몬트리올의 거리로 소환한다. 영화 속 인물의 이름이 소포클레스의 원작 속 인물 이름과 같고, 원작 비극과 영화가 보여주는 논쟁의 지점도 유사하다. 소피 데라스페 감독은 여기에 난민 문제를 덧입힌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안티고네는 알제리 카빌리아에서 온 난민이다. 어린 시절, 오빠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언니 이스메네,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조국을 떠나 캐나다 몬트리올에 정착했다. 안티고네의 가족은 이곳에서 시민권을 갖지 못한 이방인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나름의 삶을 즐기고 있다. 불어를 못 하는 할머니, 지역 축구단 선수인 에테오클레스, 지역 갱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폴리네이케스, 미용실에서 일을 하는 이스메네, 장학금을 받아가며 공부하는 우수한 학생 안티고네. 이들은 함께 살아가며 '가족'의 '미래'를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불심검문을 받던 중 경찰이 우발적으로 쏜 총에 맞아 에테오클레스가 사망한다. 함께 있던 폴리네이케스는 이에 저항하다 경찰 폭행죄로 체포된다. 지속적으로 경범죄를 저질러왔던 폴리네이케스는 추방될 위기에 처한다. 공권력은 억울한 죽음을 맞은 에테오클레스의 항변을 들어주지 않는다. 폴리네이케스가 돌아가야 하는 조국은 죽음의 기억으로 가득 차있다. 이들이 캐나다 몬트리올로 이주하기 전, 안티고네의 부모님은 그곳에서 죽는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경위는 설명되지 않으나, 관객은 과거의 단편적인 장면과 대사로 혼란스러운 알제리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안티고네는 그곳으로 폴리네이케스를 돌려보낼 수 없다. 이민자이자 이방인인 이들은 살기 위해서 그곳을 떠났다. 그러니 죽음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안티고네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수감된 오빠를 탈옥시키기로 결심한다. 안티고네에게 이 일은 '해야만 하는 일'이다. 범죄 기록이 없고 미성년자인 자신은 쉽게 풀려날 거라 믿는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문신을 하고, 남자 옷을 입고, 면회에 가서 오빠와 옷을 바꿔 입는다.

 

이방인으로서, 낯선 곳에서 나름의 삶을 꾸려나가던 한 가족은 '법'이라는 국가권력 아래 무너질 위기에 놓인다. 여기서 안티고네는 가족을 위해 범법자가 된다. 그리고 법정에 선다. 두렵지만, 당당하게 말한다. “저는 제 오빠를 도와 여장을 시킨 뒤 탈옥하게 했습니다. 추방을 피하려고요.” 제도권 밖에 머무는 이들은 계속해서 그 가장자리로 몰린다. 오빠를 지키기 위해 안티고네가 할 수 있었던 건, 그 자신 또한 경계를 넘는 것이었다.

 

안티고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폴리네이케스의 범죄 유무가 아니라, 그의 추방 여부다. 폴리네이케스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누구인가가 중요하다. 폴리네이케스는 그의 가족이다. 고통의 기억으로부터 함께 도망쳐와, 낯선 곳에서 타자이자 이방인으로 함께 존재했던 이들이다. 안티고네의 행동은 근본적으로 그의 오빠에 대한 인간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에서 기인한다. 법정에서 안티고네는 외친다. “전 언제든 다시 법을 어길 거예요. 오빠를 도우라고 제 심장이 제게 말하고 있어요.” 안티고네를 인도하는 건 ‘사랑’이라는 파토스다. 이 끝에는 폴리네이케스라는 '존재'가 있다. '난민'이라는 존재가 있다.


 

 

우리의, 코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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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국가 권력에게 중요한 건 폴리네이케스가, 안티고네가, 이들이 어떤 짓을 저질렀느냐다. '난민'이라는 구조적 존재의 운명은 고려되지 않는다. 법의 틀에서 이들의 '행위'만이 심판받을 뿐이다. 그리고 이 치열한 대립을 둘러싸고, 빠른 리듬으로 편집된 SNS 스타일의 영상들이 코러스처럼 나타난다.

 

재판 초기에 안티고네는 SNS에서 범죄 조직에 가담한 불법 난민의 아이콘이 된다. 하지만 연인 하이몬과 친구들의 노력으로 인해 안티고네는 가족을 위해 범법자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저항의 상징이 된다. 이들은 재판 방청에 참여해 휴대폰 알림 소리로 재판을 방해하는 등 안티고네를 적극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중(코러스)은 영웅 안티고네를 노래한다. 재판을 성공적인 선전무대로 만들며, 안티고네는 승리하는듯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애써서 탈옥시킨 폴리네이케스가 다시 잡혀 와 법정에 선다. 시종일관 묵묵했던 안티고네는 무너진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 현대의 비극으로 이어지는듯하다. 안티고네의 할머니는 폴리네이케스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추방)을 선택하고, 하이몬 아버지는 가족을 잃은 안티고네를 후원하길 원한다. 극은 안티고네의 가족이 공항에서 이동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안티고네가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지는 않지만,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가족과 함께 추방당하기를 선택했다는 것을. 하지만 걸어가는 안티고네의 뒤로 재판을 방해했던 휴대폰 알림 소리가 한 번 더 울리고, 소리를 향해 돌아보는 안티고네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마지막으로 안티고네와 우리와 시선이 마주친다.

 

뒤를 돌아본 안티고네의 초상에서 무얼 느꼈는가? 안티고네가 뒤를 돌아보며, 관객은 자연스럽게 휴대폰 알람을 울린 위치에 자리 잡는다. 즉, 코러스의 입장에 놓인다. 과거 비극 작품의 코러스는 작가의 대변인으로 관객에게 무대 밖의 이야기를 전해줄 뿐이었다. 하지만 영화 속 SNS 이미지들이 안티고네의 재판(무대)에 영향을 미쳤듯, 지금 우리 시대의 코러스는 무대에 참여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코러스는 우리(대중)의 대변인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애처롭고도 미약한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안티고네는 그리스 비극에서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다. 원작에 따르면 그의 죽음을 슬퍼해줄 친구와 친척은 없다. 그는 ‘자살’로서 스스로 자신의 장례를 치른다. 하지만 영화 <안티고네>에서는 안티고네의 고통을 슬퍼하고, 노래해 줄 사람들이 있다. 하이몬이 그랬듯, 친구들이 그랬듯, SNS상의 대중들이 그랬듯. 무대에 직접 등장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우리(코러스)까지도 안티고네의 이야기에 손을 뻗을 수 있다. 이 손짓이 막연한 긍정은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비극'이라 일컬어지는 어떤 이야기에, 그 주인공에게 우리가 손 내밀어 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은 분명하다.

 

소피 데라스페 감독은 극의 모든 장면에서 그의 문제의식을 공유하지만,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는 우리(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건다. 이 노래의 코러스에 동참하지 않겠냐고. 그제야 우리는 생매장당하는 안티고네가 아니라, 삶을 이어나가는 안티고네를 상상할 수 있다. 개개인에게 안티고네는 저마다의 해석과 의미를 가지겠지만, 다만 나는 간절히 바란다. 지금 이 시대의 안티고네는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강한 신념을 표출하기 위해 생을 끝내는 게 아니라, 신념을 지켜나가고 그 의지를 이어나가기 위해 생을 지속했으면 좋겠다. 죽음으로 귀결되는 승리가 아니라, 생의 한가운데서 맞이하는 승리였으면 좋겠다. 21세기의 내가, 오늘의 내가 그리는 현대적인 안티고네는 그런 의미다. 꽃보다, 불보다 재보다 더 오래 살며 끝끝내 승리하는 존재.

 

그렇다면, 오늘날의 당신에게 안티고네는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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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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