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슬픔에 이름 붙이기

글 입력 2024.05.10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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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혼란을 언어의 질서로 꿰매는 감정 사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이름을 붙인

가장 아름다운 단어들의 사전

 

 

요즘 영어권 대화 속에서는 간혹 '산더(sonder)'라는 말을 접할 수 있다. "눈앞을 지나가는 익명의 사람들 각자가 주인공인 이야기 속에서 자신은 그저 배후에 존재하는 엑스트라일 뿐이라는 깨달음"이라는 뜻의 단어다. 프랑스어 sonder(깊이를 재다)에 영어 wonder(놀라움, 놀라다)를 조합한 말이다. 어지간히 영어가 유창한 사람이라도 대개는 처음 들어보는 말일 것이다. 당연하다. 이 말은 원래 없었던 신조어니까.

 

잠깐 다른 말도 살펴보자. "평소에는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지금은 버려져서 조용한 장소의 분위기"를 뜻하는 케놉시아(kenopsia)는 어떤가? 저녁의 학교 복도, 주말의 불 꺼진 사무실, 비수기의 박람회장 등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가리킨다. '공허'를 뜻하는 κενό와 '봄'을 뜻하는 -οψία에서 왔다.

 

데뷔(dès vu)는 "이 순간이 기억되리라는 깨닫는다"는 뜻으로,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 말의 뿌리가 데자뷔(dèjà vu)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경험하는 와중에 기억한다'는 뜻이라 어순이 반대다.

 

최근 이 신조어들을 자주 쓰게 된 사람들은 이 말이 없었으면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몰랐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몇 년 전부터 알음알음 회자되고 있는 이 말들은 사실은 사전에 등재된 정식 단어가 아니다. 유서 깊은 옥스퍼드 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모든 단어가 한 젊은이로부터 발명된 말들이기 때문이다. 신조어는 대부분 누가 처음 썼는지 밝혀낼 수 없고 의도적으로 생겨나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2009년부터 '슬픔에 이름 붙이기'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말들의 지은이는 분명하다. 처음에는 개인 블로그에서, 이후에는 유튜브와 책을 통해 12년에 걸쳐 '감정에 적확한 언어를 찾아주기' 시작한 존 케닉이 그 주인공이다.

 

이 방대한 십여 년의 '감정 신조어 프로젝트'를 집대성한 [슬픔에 이름 붙이기]는 앞에서 본 '산더'처럼 모호한 느낌들에 세심하게 이름을 붙인 신조어 300여 개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박학한 언어 지식과 섬세한 감각으로 만든 새로운 단어의 목록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느껴온 감정의 모음이다. 그야말로 방대하고 경이롭고 시적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상의 한계다." 존 케닉은 바로 이 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언어는 우리의 인식에 너무나도 근복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 자체에 내장된 결함을 인식하지 못한다." 한편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벽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벽을 피하거나 아니면 그냥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이 세계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딱히 똑똑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걸 깨달았다고. 이제 손을 뻗어 그 벽을 만져봐야 하며, 그것을 바꿀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걸 모두가 깨달아야 한다고. 저자 존 케닉도 그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즉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언어에 충분히 담을 수 없기 때문에 그 그릇을 만져보고 저변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어(死語)와 활어(活語) 사이를 누비며 새로운 말을 창조해냈다. 언어가 장벽이 된다면 그 반경을 무한히 넓히면 된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이 책의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신조어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한마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며, 그것을 어떻게든 표현해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때문에 긴 세월 동안 만들어진 이 책의 에세이는, 마치 시가 그러하듯, 한 편 한 편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고 지나간다.

 

"저는 많은 사람이 우리가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 때문에 갇혀 있는 느낌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단어들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제 단어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단어가 만들어진 거예요. 우린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우리를 연결시켜주지 못하는 어휘에 갇혀 있는 겁니다. 우리가 단어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수록 우리는 서로 가까워집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단어가 의미를 가진 게 아닙니다. 의미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인 빌 워터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가치를 반영하고 영혼을 만족시키는 인생을 만드는 건 드문 업적이다. 당신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 고생이 더 행복할 것이다.'" - 존 케닉, TED 강연 중에서

 

[슬픔에 이름 붙이기]는 언어에 가장 민감하고 또 잘 아는 시인이자 번역가 황유원이 번역했다. 그는 이 책을 "서로 다른, 외따로 떨어져 있는 우리, 너무 드넓은 우주의 점들 같은 우리 사이에 희미한 선을 그어준다"라고 말한다. 이것으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이 책은 사전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한 편의 긴 시와 같아서 "잠시 (...) 모르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볼" 수 있게 된다. 특히 중간중간에 배치된 긴 에세이는 존 케닉의 탁월한 언어 감각과 세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을 보여준다. 앞서 [마음사전]을 집필해 '마음의 뉘앙스'를 섬세하게 포착한 김소연 시인은 이 책을 보면서 "발에 딱 맞는 신발을 찾은 듯"하다고 말했다. 또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등을 쓴 신형철 평론가는 주디스 루이스 허먼과 스피노자를 언급하며 감정의 피라미드를 형상화하고, 그곳을 오가며 "적절한 단어와 정확한 비유로" 창작을 해내는 존 케닉에 감탄한다.

 

개인 블로그에서 시작한 '슬픔에 이름 붙이기' 프로젝트는 온라인상에서 먼저 유명해졌고, 이후 유튜브 영상으로 만들어 올리면서 소설가 존 그린과 비욘세에게 찬사를 받았다. 어떤 영상 작품은 조회 수 100만 회가 훌쩍 넘기도 하며 실생활에서도 그의 신조어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길을 걷다가, 창문 밖을 바라보다가, 이부자리에서 잠을 청하다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일 때 이 책을 펼쳐보자. 불완전한 언어의 빈틈을 메우는 이 책은 '슬픔'의 원래 의미를 회복하고 인간을 더 깊게 이해한다. 지금껏 보지 못한 섬세한 감정들과 언어에 내재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만나보자.

 

 

[박형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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