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순애는 할 말이 많다 [문화 전반]

글 입력 2020.11.1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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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전지적 참견 시점'

 

 

“순애야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렇게도 탐이 났단 말이냐”


몇 십 년의 세월을 거쳐 내려온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의 명대사다. <이수일과 심순애>를 들어본 적이 없는 지금 세대 역시 이 대사는 익숙할 것이다. 연인 ‘이수일’을 저버리고 다이아 반지에 홀려 ‘김중배’를 택하는 매몰찬 ‘심순애’. 그야말로 돈에 환장하여 사랑을 저버리는 여성 인물과 배신 당한 남성 인물이라는 오래된 전형의 시작이다. <이수일과 심순애> 속 대동강 부벽루 이별 장면과 이 명대사는 각종 코믹 변사극, 드라마 및 영화, 구전되는 유머 등으로 한 세기가 넘게 전해내려왔다.


우리나라 대중 서사에 자리잡은 수많은 전형들 중 하나임에도, 이 대사가 가지는 의미는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이 대사가 오랜 시간 명대사로, 농담의 소재로 자리 잡아 왔다는 것은 ‘다이아 반지를 그렇게도 탐낸’ 심순애를 허영적 여성의 대표격으로 세우고, 그녀의 이미지로 하여금 ‘허영스러운 여성’에 대한 전형적인 비난이 약 한 세기 동안 내려오는 데 일조시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수일과 심순애’ 유머가 사멸하고 있는 현재에 우리는 이 파렴치한 ‘심순애’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 유머에 실린 정당한 해명의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지조 있는’ 이수일에게 ‘간부(姦婦, 간통한 여자)’라는 저속한 비난까지 받게 된 심순애에 대한 평가는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 그 평가의 잣대가 어떠한 문제를 띠고 있는 것인지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이 바탕을 두고 있는 소설 <장한몽>을 중심으로 그 맥락을 좀 더 들여다보자. 과연 순애는 다이아에 환장한, 사랑도 정도 모르는 파렴치한 속물인가. 그래서 결국 결코 긍정적인 여성에도 끼지 못한 채 천대받아야 할 인물인가.


 

 

1. 인기의 시작과 신파극에서의 변형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이수일과 심순애>는 1913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조중환의 번안소설 <장한몽>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동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장한몽>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부모를 여의고 아버지 친구의 집에서 자란 남자주인공 이수일은 그 집안의 딸 심순애와 서로 사랑하여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그러나 어느 날 김중배라는 부자가 심순애에게 청혼하고, 심순애는 김중배와 결혼한다. 심순애의 결혼에 배신감을 느낀 이수일은 고리대금업자가 된다, 심순애는 후회하며 (<장한몽>의 표현에 따르자면) ‘순결을 지키며’ 이수일에게 사과하지만, 이수일이 그녀를 용서하지 않자 자살에 실패한 후 미쳐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제서야 이수일은 심순애를 용서하게 되고, 김중배와 이혼한 심순애는 이수일과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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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5월 13일 '매일신보' 1회 연재 당시 <장한몽>

 

 

1913년 5월 13일부터 10월 1일까지 총, 119회에 걸쳐 연재된 <장한몽>의 인기는 대단했다. 연재가 미처 완료되지도 않은 시점에 전반부의 내용이 단행본으로 간행될 뿐만 아니라, 연재 당시의 전개된 내용을 토대로 곧바로 연극 무대에 올려졌을 정도로 명실상부한 베스트셀러의 위치에 있었다. 이후 신파극 <장한몽>은 식민지 시대에만 20여 번 공연될 정도로 인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후 이 신파극의 제목은 주인공의 이름을 따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제목과 섞이게 된다.


그런데 소설 원작의 작품을 극으로 올리는 과정에는 단순히 매체의 종류 뿐만 아니라, 작품에 대한 많은 변형이 따른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방대한 양의 소설 속 어느 부분을 극으로 올릴 것인지에 대한 취사선택의 과정이 불가피하다. 무대에 올려지는 장면이 있는 반면, 버려지게 되는 장면도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 신파극으로 올려지는 과정에서, <장한몽>의 포커스가 소설의 초반에 맞춰지며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순애야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렇게도 탐이 났단 말이냐”라는 희대의 명대사가 등장하며 우리 문화사에 길이 남을 속물적 심순애 이미지가 남겨지게 된다. 이 명대사는 심순애가 김중배의 청혼을 받아들인 직후, 이에 분노한 이수일이 그들을 따라 몰래 평양까지 쫓아갔을 때 나온 대사다. 그런데 앞서 요약한 바, 해당 장면은 <장한몽>의 초반부이며, 소설 <장한몽>의 대부분은 심순애가 김중배와 결혼한 후 7년 간의 이야기이자 순애가 속죄하는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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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키 고요, <금색야차>의 일본어판 표지.

남성 주인공이 여성 주인공을 발로 차고 있다.



소설 <장한몽>은 애초에 순애에게 매우 불공평해보이는 서사를 띠고 있다. 서사 자체가 순애에게 내려진 ‘후회-자살 시도-광기에 이름’이라는 처벌과, 그에 대한 이수일의 용서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작품 내내 순애는 괴로워한다. 얼핏 고난을 겪는 것 같은 이수일의 힘든 여정 역시 사실상 순애에게 그녀의 선택이 잘못됐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자학일 뿐이다. (이영미, 2016)


지금 시점에서 보기에는 순애가 괴로워하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과도한 벌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작품 속에서 순애에게는 별도의 처벌이, 그것도 두 번이나 자살 시도와 광기라는 형태로 가해진다. 그리고 <장한몽>의 원작으로 인정되고 있는 오자키 고요의 <금색야차>와 <금색야차>의 원작이라고 최근에 밝혀잔 샬럿 메리 브레임의 <여자보다 약한>을 비교했을 때, 여자 주인공 순애는 이수일에게 이른바 ‘배신’을 하고 난 뒤, 조금 이르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후회를 하기 시작한다. 대동강에서 분노에 찬 이수일의 일장연설과 함께 발길질을 당하고난 후, 이수일이 씩씩거리며 그녀를 남겨버리고 떠나자마자 8년 간 계속될 후회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수일의 대사는 순애에게는 당황스러울 정도의 비난인 셈이다. 심순애는 이수일의 감정섞인 부사인, ’그렇게’까지 다이아를 탐하지 않았다. 탐했을 수 있으나, 이수일과 그의 사랑을 ‘내팽겨치고’ 아무 일 없이 살아갈 정도로 탐내진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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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8월 명보극장에서 공연한 <장한몽> 포스터

 


신파극 <장한몽>은 소설 <장한몽>이 줄거리상에서 일차적으로 초점을 맞추던 ‘심순애의 속죄와 각성’이 아니라 ‘두 젊은 남녀의 사랑과 여자 주인공의 배신’의 장면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극의 주제가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때 이미 소설 속 심순애의 일면이 잘려서 형상화 된 신파극 속에서 또 한번 명대사가 따로 잘린 채 전해지게 되면서, 심순애는 전에 없이 속물적이고 파렴치한 여성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파극 <장한몽>은 소설의 후반부를 축소시킴으로써 심순애에게 그 어떤 해명이나 속죄 따위의 기회를 줄였고, 그 속에서 나온 명대사는 그 해명의 존재마저 지워버린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일단 여기서 첫 번째 심순애에 대한 오해가 하나 풀린다. <장한몽> 소설을 좀 더 읽다 보니, 그녀는 그렇게 매몰찬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에게 가해진 '돈에 눈이 멀어 사랑을 저버린 속물적 여성'이라는 비난에 대해 조금은 맞받아칠 말이 생기게 된다. 그녀는 그렇게까지 파렴치하고 매몰찬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후의 이야기 내내 그녀는 과도하게 속죄하고 후회한다.

 

그런데 도리어 무언가 더 나쁜 인상이 덧씌워진 것만 같다. 아니, 그렇다면 그녀는 가부장제의 논리를 뼛속까지 체득하고 있던 여성이었단 말인가?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이수일에게 굴욕적이다 싶을 정도로 사죄하는 심순애는 당대 독자들에게 순종적인 순결한 순애의 사랑을 심어주며 1913년이라는, ‘근대’가 물밀듯이 도래하고 있던 그 시기를 도리어 역주행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순애가 파렴치한 인간이라는 오해를 걷어내더라도, 여전히 '김중배'의 다이아를 일시적으로나마 선택한 순애의 결정이 남아있다. 이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속물'이라는 비난이 가진 혐오적 맥락을 일단은 차치하고서라도, 순애가 내린 계산적인 결정을 우리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순애의 '속물성'은 오직 비난의 대상으로서만 머무르고 있는가?




2. ‘선택하는 주체’로서의 심순애



두 질문 모두에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줄거리만 놓고 보았을 때, 장한몽은 계몽주의의 목적을 띠고 창작된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계몽적이고 통속적라고 비난받으며, 우리 문학사의 ‘퇴보’라고까지도 말해지는 이 <장한몽>으로 대표되는 번안소설들은, 불과 1년도 안되는 시기에 신소설을 매우 빠른 시간 내에 밀어냈다. 이것은 신소설과 차별되는 무언가가 있고, 이것이 시대의 독자들의 요구와 맞아떨어졌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된다. 그것은 결코 ‘계몽적’인 것에만 머무르지는 않는 무언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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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환 (2007)

'매일신보' 연재 당시 실린 <장한몽> 제4장 삽화

 

 

계몽적인 서사의 일면에서 우리가 간과해서 안되는 것은, 바로 ‘선택하는 주체’로서의 심순애의 존재다.


최근 현대어 풀이되어 출판된 <장한몽>은 그 쪽수만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다. 이 대장정을 함께 하다 보면 끊임없이 움직이고. 후회하고, 변화하는 심순애와 끊임없이 화가 난 채 심순애를 용서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기만 하는 이수일을 마주하게 된다. 심순애는 자살을 시도하고, 이혼을 요구하고, 미치고, 도무지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반면 이수일에게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사실상 심순애의 사건으로부터 유발되거나, 또다른 여성 인물(최만경)의 유혹에 의한 것이다.


<장한몽>은 심순애의 계몽이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서사의 중심이 되는 것은 심순애로 대표되는 여성 인물(최만경 역시 포함시킬 수 있다)이며 정작 이수일은 주인공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서사를 추동하는 데 있어 “주변적이고 방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권보드래, 2018)

 

이것은 신소설에서부터 자리잡힌 “한국 소설사 특유의 현상이다”. 여성 주인공 ‘심순애’는 끊임없이 집 안이 아니라 집 밖으로 나가며, 그것은 연속적인 수난을 감행하는 행위다. 어린 시절 이수일과 자유연애를 함으로써 최초로 가정을 벗어나고, 이수일과의 암묵적인 약혼 관계를 깨고 김중배를 택함으로써 또 한 번 몸담고 있던 가정을 벗어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중배를 떠나 이수일과 가족을 형성함으로써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고 급진적인 경우였던, 법적 이혼까지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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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태, <인물일대: 화운>, 1944, 종이에 채색, 210x148.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박진영(2005)은 <장한몽>이 바탕을 두고 있는 근대 자본주의 도래기의 조선에서, 심순애야말로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법칙, 교환 논리에 따라 사고할 수 있게된 인물이라고 평한다. 삼각관계의 구도, 그리고 그 속에서 갈등하며 소위 저울질을 시작한 심순애라는 인물, 그녀를 가부장제에 귀속된 여성이나 속물적 인물로만 보기에는 너무도 현대적이며 주체적이지 않은가? 자신의 능력이 가진 선택의 가능성을 차근차근 생각하며, “한 집안에서 남매같이 십여 년을 자라난” 이수일과 금강석 반지로 대표되는 김중배 사이에서, 이른바 자본주의적 교환 논리에 의거한 심순애의 ‘선택’이 시작됐다.


앞서 언급한 ‘중심적 여성 인물’로서의 심순애가 신소설에서부터 이어진 흐름을 따른 것이라면, ‘선택적 주체’로서의 심순애는 이것은 기존의 고소설이나 신소설로부터 또 한번 달라진 지점에 서 있는 것이었다. 고소설 <춘향전>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17세기 후반  무렵 창작되었다고 알려지며 20세기 초까지 인기를 구가하던 <춘향전>의 인물구도 역시 삼각관계를 띠고 있으나, 여기서 두 남자주인공 ‘변학도’와 ‘이몽룡’은 ‘춘향’의 공정한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변학도는 강압적인 악의 세력으로서, 이몽룡은 ‘선’으로서 크게 구분된다. 그리고 춘향은 이몽룡과의 사랑을 ‘지켜’내지, ‘선택’하지 않는다. 그리고 심순애는 춘향에 비하면 얼마나 나약한 ‘인간적’ 인간인가. 돈의 유혹 앞에서 흔들리고, 게다가 일차적으로 김중배를 택했다. 그리고 후회한다. 욕망 앞에서 흔들리는 주체라니, 이 얼마나 근대적인 인물인가. 이전의 소설들이 결점없는 완전한 여성을 그리고 있다면, ‘심순애’는 이러한 인물형에서 탈피를 고했다. (박진영, 2005).


*


실연으로 인한 분노로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쏟아져 나오던 이수일의 감정적인 말들 속 한 대사, “순애야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렇게도 탐이 났단 말이냐”는 백 여 년 동안 명대사가 되어 맥락이 지워진 채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인물과 둘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게끔 했다. 그러나 해당 장면에서 이수일이 애인이던 심순애에게 가한 신체적 폭력이나(그는 심순애를 말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정도로’ 걷어찼다), 발언을 기회를 박탈시킨 채(해당 장면에서 이수일은 말을 꺼내려는 심순애를 몇 번이나 “듣기 싫다!”는 말로 일축한다) ‘간부’니, 본인의 ‘인생을 망치’려 했다느니, 같이 죽자느니 등의 언어 폭력을 일단 잠시 넣어두고서라도, 심순애는 충분히 이수일에게도, 그녀 자신으로부터도 필요 이상의 처벌을 받고 계속해서 속죄를 구했다. 다만 그 당시에 이수일보다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를 택했을 뿐, 심순애는 이수일과의 사랑을 하루 아침에 저버리는 파렴치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하고, 끊임없이 집을 나서며 흔들리는, 이수일보다도 한발 빠르게 근대를 살아가던 ‘선택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비난받는 순애의 '속물성'은 오히려 자본주의적 교환 논리를 작품 속 그 누구보다 먼저 체득한 인간이 취한 합리적 계산이라고 볼 수 있다.그러한 행동하는 주체적 인간의 연속적 삶 속 한 장면에서 전근대 가부장제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이수일이 그녀를 한낱 ‘다이아 반지에 팔린’ 여성으로 낙인시킴으로써, 심순애의 폭풍우 같은 삶은 20대 초반 대동강 부벽루에서의 모습 그대로 역사 속에 못박혀 버렸다. 이제는 심순애를 꺼내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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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권보드래 외 12명,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 민음사, 2018.

조중환, 『장한몽』, 박진영 엮음, 현실문화연구, 2007.

대중서사장르연구회,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1 : 멜로드라마』, 이론과실천, 2007.

이영미, 『한국대중예술사, 신파성으로 읽다 : 장한몽에서 모래시계까지』, 푸른역사, 2016. 권두연, 「『長恨夢』연구」, 연세대 석사논문, 2003.

박진영, 「1910년대 번안소설과 '실패한 연애'의 시대- 일재 조중환의 『쌍옥루』와 『장한몽』」, 『상허학보』 15권, 상허학회, 2005.

 

 

[장은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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