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담담하고 날카로운 위로 - 타인의 고통 [음악]

김윤아 4집 [타인의 고통]
글 입력 2020.11.0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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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각자 다른 성격과 생각, 다양한 형태의 삶을 사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란 분명 불가능하다. 타인의 고통을 내 방식대로 해석하거나 유추하며 고통을 이해할 뿐, 타인이 느끼는 고통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에서는 자극적인 사진과 영상을 소비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미디어를 통해 타인과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타인의 것으로 남게 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이 미디어를 통해 포르노처럼 소비되는 세상에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 더 어렵게 된 시대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타인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와 나의 감정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줄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능력이 닿는 데까지 공감하고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타인을 이해하려 하는 것, 바로 김윤아 솔로 앨범 4집 [타인의 고통]이 지향하는 바이다.


자우림 앨범에서는 주로 '사회 속 나'의 이야기를 한다. 사회의 부조리를 익살스럽게 고발하고, 사회 속에 있는 '나'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출한다. 여기서 나는 '너'에게 나를 쏟아낸다. 미워하지만, 그 속엔 애정이 가득한 모순적인 감정을 보이기도 하고, 나의 분노를 거침없이 표출한다. 때로는 저주하고 나의 분노를 쏟아낸다. 다양한 감정을 보여주는 만큼 다채로운 음악들로 자우림 앨범을 채운다.

 

김윤아 솔로 앨범은 자우림의 음악과는 결을 달리한다. 가장 내밀한 이야기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오직 김윤아, 자신만의 색채를 담는다. 자우림의 보컬로서는 하지 못했던 내밀한 이야기를 솔직하고 대범하게 내보인다. 2010년 솔로 앨범 3집 [315360]에서는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김윤아를 드러내며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6년 후 발매된 4집 솔로 앨범 [타인의 고통]은 여러 음악들을 추리고, 고르고, 걸러서 모아 밀도 있는 앨범을 만들어 하나의 테마를 관통한다. 이번 앨범에서 관통하는 하나의 테마는 역시 ‘타인의 고통’이다.

 

 

저에게 음악을 한다는 것은

종종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는 일입니다.

 

김윤아

 


[타인의 고통]에서 ‘너’의 이름을 불러주고, ‘너’에게 담담한 위로를 건넨다. 상실의 시대, 타인의 고통에 관심 갖는 것이 어려운 시대다. 생존에 급급하고, 각자도생이 하나의 키워드로 자리 잡은 현대에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타인의 고통을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감이 어려운 시대에 김윤아는 타인의 고통을 외친다. 상실, 고통, 고독…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들을 노래한 앨범이다. 발매한 지 4년이 지난 앨범이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 유효한 지점에 서 있다. ‘내’가 부르는 ‘너’를 위한 음악은 결국 ‘우리’를 위한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이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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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List

 

-

유리

키리에

은지

타인의고통

안녕

다 지나간다

 

 

자신이 겪지 못한 슬픔의 위로가 타인에게 닿을 수 있을까. 느끼지 못한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타인의 고통을 나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 위로는 상대의 슬픔과 아픔을 나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타인의 고통] 첫 번째 트랙 ‘강’에서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영역으로 가져와 같이 슬퍼한다.

 

3집으로 잠시 거슬러 올라가 보자. 3집 [315360] 속 ‘검은 강’은 9.11 테러 추모곡이다. 그때 당시 나는 어렸고, 먼 나라의 빌딩이 폭파되는 장면이 와 닿지 않았다. 그래서 뉴스를 보고도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고. 게다가 뉴스에선 그 장면을 반복적이고 극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모니터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타인의 고통을 내 영역으로 가지고 오지 않았다.

 

김윤아 그도 이전에는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던 전쟁과 테러였지만, 9.11 테러를 기점으로 전쟁과 테러를 다른 의미로 자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희생자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느꼈던 절망과 무력감에서 시작한 3집 속 수록곡 ‘검은 강’이 있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왜 사는 게 이리 슬픈가요.

죽음도 삶도 슬퍼서 눈물이 멈추지 않아요.

(중략)

검은 강의 품속에 한탄을 묻고

강을 나는 물새도 슬퍼 말을 잃네.

 

검은 강 中

 

 

그 후로 10여 년이 흐른 2014년 4월 16일, 국민들을 슬픔으로 몰아넣은 사건,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다. 나에게도 세월호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건 중 하나다. 대한민국이 멈췄던 그때를 나는 기억한다. 그때 수학여행을 다녀온 지 며칠 되지 않을 때라서 그 일이 마치 내 일처럼 느껴졌고, 내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아파했었다. 내 일이라고, 나의 고통이라고 인식함으로써 내게 와닿는 아픔의 크기는 달라진다.

 

공감에 무감각한 나조차 세월호 참사는 큰 사건으로 다가왔을 테니, 뉴스에서 영감을 얻는 그가 세월호 참사를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강’은 MBC ‘비긴어게인’에서 밝혔듯, 세월호 참사 추모곡이다. 첫 트랙에서 세월호 참사 추모곡 ‘강’을 배치한 이유는 역시 ‘타인의 고통’과 연관이 있다. 타인의 고통을 내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의 시작을 알린다. 비단 희생자뿐 아니라 대한민국 모두에게 상처와 죄책감으로 남아버린 세월호 참사를 위로하는 ‘강’이다.

 

 

 

 

인트로 ‘(-)’는 파도 소리만이 들린다. 파도와 바람이 뒤섞여 만드는 음악은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작게 깔린다. 마지막, 곡이 끝나기 전 그의 호흡이 작게 들린다. 바로 뒤이어 두 번째 트랙 ‘강’으로 넘어가면서 ‘(-)’과 이어진다. 초반에는 물소리, 바람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등장한다.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 것들을 그리워한다. 바람 소리처럼 공기를 머금고 있던 목소리는 후반에서 강렬한 에너지를 터트린다. 참아온 울음과 북받친 감정을 터트리면서 다시는 볼 수 없는 ‘너’를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그리워’한다고 표현하기에는 그 느낌과 의미를 완전히 표현할 수 없지만) 목소리와 건반, 현악기가 섞여 강을 이룬다. 그리움이라고 표현해야 건반과 현악기로만 이루어진 ‘강’은 그렇게 흐른다.

 

 

 

너무나도 나약하고, 모순적인 인간이란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또한,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모순적이다. 타인에게 데이고 서로를 할퀴면서도 결국 타인에게서 위안을 갈구한다. 이런 우리를 ‘유리’ 같다고 한다.

 

 

 

 

깨지고 서로를 할퀴고 상처 입히면서도 끌어당겨 결국에는 꽃을 피워내는 모습, 한 숨의 위안을 얻으려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보여주는 우리의 모습을 ‘유리’에서 그린다. 절망과 좌절 속의 인생이라도 행복이라는 꽃을 피우려 애를 쓰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순적인 인생을 보여준다. ‘우리는 유리처럼 나약해’를 반복하면서도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귀결됨을 역설한다. 음악에서도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들 사이를 위태롭게 건너고 있다. 날카로운 바이올린과 부드러운 첼로 사이를 목소리가 그 사이를 건넌다. 어디에도 취우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가로지른다.

 

우리는 모두 꿈을 꾼다.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착취한다. 아무리 불가능하고 불확실하다 해도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는 낙관적인 믿음에 기반해 환상을 꿈꾼다. 이룰 수 있다는 믿음에서 기인한 꿈은 현재의 삶을 유예하도록 만든다.

 

꿈이라는 환상에 빠지게 된 계기는 사소하다. 불행과 불평등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꿈을 꿀 때만은 평등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과거 자기계발서가 붐을 일으켰을 때 ‘누구나 꿈을 꿀 수 있다’는 말 내지는 ‘꿈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이 우리를 현혹했다. 이제는 그 말이 ‘간절히 원하면 모든 것이 이뤄진다’는 말과 결합되어 ‘누구나 간절하게 꿈을 원하면 결국에는 이뤄진다’는 말로 변해버렸다. 알지 않는가?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는 것은 곧 ‘내가 간절히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뤄지지 않을 거라 말한다.

 

 

 

 

‘꿈’에서는 꿈이라는 존재가 지닌 양면성에 주목한다. 나를 초라하게 만들고 무거운 짐이 되게 만드는 굴레이지만, 나를 일으켜주고 다시 걷게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이 웃으며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는 말은 꿈을 향한 나의 노력과 고뇌, 자신과의 싸움을 그저 한순간의 망상으로 평가절하한다. 꿈에 대한 담담한 고백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간절하게 원한다면 모두 이뤄질 거라 말하지 마 마치 나의 꿈은 꿈이 아닌 것처럼”이라는 가사에서는 신경질적인 샤우팅에 가까운 분노가 일렁인다. ‘꿈’은 꿈에 대한 담담한 고백이다.

 

‘꿈’이라는 주제를 노래하는 사람들은 꿈을 이뤄질 거라고, 내 안에 있는 가능성을 북돋는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 수록곡 ‘꿈’에서는 꿈을 좇으라, 또는 네 안의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자신감을 가지라는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사실, 음악을 듣고 나서는 애매하다고 느꼈다. ‘그래, 꿈을 이런 의미가 있지, 그래서?’라는 의문이 생길 만큼 모호하다. 노래 마지막에서는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자’는 메시지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 좌절을 딛고 다시 꿈을 꾸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클리셰처럼 여겨졌다. 당연한 것은 없다. 아픔을 들어주고 분노해주고 공감만 해주어도 상대는 위로를 받는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 다시 일어나라는 것을 종용하지 않는 배려가 묻어 있는 곡이다.

 

 

 

고통은 어째서 나를 죽일 수 없나



직접적인 가사와 심장을 내리치는 강렬하고 덜컹거리는 소리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한 인물의 내면을 보여준다. 이 음악을 들으면 저절로 인상을 쓰게 된다. 심장이 불에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고, 죽고 싶지만 죽을 수 없는 저주받은 육신을 원망한다.

 

 

 

 

쉴 새 없이 가슴을 내리치는 이 고통은

어째서 나를 죽일 수 없나

가슴 안에 가득 찬 너의 기억이, 흔적이

나를 태우네

나를 불태우네

울어도 울어도 네가 돌아올 수 없다면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야

꿈이야

불러도 불러도 너는 돌아올 수가 없네

나는 지옥에

나는 지옥에 있나 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의 ‘키리에’는 절망과 고통에서 찢어지는 마음을 노래하는, 절규에 가까운 노래이다. 앞선 수록곡 ‘강’에서는 타인의 죽음의 길을 ‘강’이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했다면, ‘키리에’에서는 ‘고통’, ‘죽음’, ‘지옥’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해 절대로 다른 것으로는 설명하지 못할, 그럴 여유도 없는 고통의 시간 속에 놓여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음악에서는 건반의 눌림과 퍼커션의 강렬함과 동시에 전자음이 증폭된다. 이 음악에선 전자음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은 전자음이 증폭되면서 자연스레 내가 느끼는 고통도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전자음은 마치 심장이 점점 멈추는 듯한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며, 혹은 의식 없는 자의 산소호흡기 소리처럼 들린다.

 

정말 많이 듣고 울었던 노래 ‘독’.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다. 미디어에서 흔히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단순한 감기라고 단정하기에는 언제 나아질지 알 수 없고, 끝없는 자기혐오에 빠져 있어야 하는 우울증은 그보다 더 고통스럽다.

 

 

 

 

나의 영혼이 나의 육체를 바라본다면 나는 그에게 어떤 말을 할까. ‘독’이 내포하고 있는 절망과 우울이 우울증이라는 심연을 잘 나타낸다. 영혼이 되어버린 ‘나’가 내 육체를 보면서 하는 중얼거림. 아무도 나를 구할 수 없는 절망감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연상된다. 희미한 의식처럼 희미한 가성이 허공을 떠돌고 있다. ‘아무도 너를 구할 수 없어’라는 이미 체화된 냉소가 느껴진다. 몇 번이고 희망에 배신당해버린 나는 기꺼이 냉소를 택했다. 내 안에 스며든 우울은 시간도 결코 해결해줄 수 없으며, 누구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희망을 끝내 저버리지는 못한다. “내가 널 구할 수 없었을까 누군가 너를 구할 수 없었을까” 라며 희망을 버렸지만 희망을 완전히 저버리지 못하는 굴레에서 살고 있다.

 

자신을 불태워버린 여성의 상실을 노래한 ‘은지’. 풋사과 같던 은지가 일상의 건조함 속에서 회색의 재가 되어버린다. 다른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불태워버려 회색의 재가 되어버린 자신을 인식할 때 몰려오는 허망함이 느껴진다. 은지를 부르는 목소리는 울다 못해 흐느낀다.

 

나는 절대로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나의 모든 걸 태워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왔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는 여성들을 보면서 말이다. 나는 절대로 너처럼 되지 않을 거라는 다짐은 너에 대한 연민으로 바뀐다. 서늘한 별빛처럼 빛나던 너의 눈빛이 색을 잃어버린 것을 알았을 때의 안타까움과 슬픔. 우리들은 그렇게 은지가 된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관하여


 

어쭙잖은 위로보단 따뜻한 침묵이 필요하다. 앨범 동명의 수록곡 ‘타인의 고통’에서는 어설픈 위로보단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같이 울어주는 것뿐’이라는 따뜻한 침묵이 진정으로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는 것이다.

 

 

 

 

미안해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았어

비겁한 무력한

이런 나라서 너무 미안해

한 방울 한 방울

너의 눈을 적시던

눈물을 헤아려보네

하나 둘 한없이

너의 마음에 쌓이던

의문을 되뇌어보네

 

이 세상은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모순에 가득 차 있고

사람들은 말하지

우리들은 아직 어리고 

어리석을 뿐이라고

한 방울 한 방울

너의 눈을 적시던

눈물을 헤아려보네

하나 둘 한없이

너의 마음에 쌓이던

의문을 되뇌어보네

 

잔인하고 슬픈 얘기들을

사람들 아무렇지 않게 해

네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너에게 상처만 준 걸 알아

미안해 너무 미안해

너의 눈물을 닦아주고파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려고 온 감각을 섬세하게 곤두세운다. “미안해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았어. 비겁한 무력한 이런 나라서 너무 미안해”라며 너에게 온전한 위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노래를 시작한다. 너의 눈물을 닦아주고, 의문을 해결해주고 싶은 나의 마음이 타인에게 전달되길 바라는 진심이 묻어난다.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처럼 여기기 때문에 다음 트랙 ‘안녕’에선 흘러가는 타인에게 웃으면서 작별 인사를 건넨다. 억지로 붙잡을 수 없는 인연임을 인정하고, 조용히 흘러가는 인연을 바라볼 뿐이다. 밝은 분위기와 멜로디 속에 얽힌 가사는 덧없는 관계를 나타내며 차갑게 빛난다. 이러한 가사를 쓰기까지 느낀 그의 고뇌와 고통이 압축되어 느껴진다. 덧없음을 느끼기 전에는 흘러가는 인연을 붙잡으려 발버둥 쳤고, 떠나보낸 인연을 슬퍼했던 감정이 가사 속에 스며들어 청자는 가사에서 느껴지는 씁쓸함을 음미할 수 있다. 아름답고 슬픈 음악이다.

 

 

 

 

‘타인의 고통’과 ‘안녕’에서 보여주었던 위로,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며 건네는 위로는 씁쓸하다. 역시 마지막 트랙 ‘다 지나간다’에서도 느껴지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괜찮아, 다 지나갈 거야’는 상투적인 위로를 건넬 수밖에 없는 자신과 상실의 시대에 대한 자조와 슬픔이 뒤섞여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임을 집착하듯, “다 지나간다”에서 에너지를 토해내며 증명한다.

 

이런 위로는 생각보다 큰 힘을 지닌다. ‘다 지나간다’는 위로를 건네는 것은 기꺼이 타인의 책임을 지는 행위다. 나 자신을 책임질 수 없을 때 ‘괜찮다’고 말해준 타인의 탓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위로는 나를 기꺼이 내주는 행위이자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는 일이다. 첫 트랙 ‘강’에서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마지막 트랙에서 건네는 담담한 위로로 타인의 고통에 공명한다.

 

**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런 행복한 시나리오는 역시 김윤아 음악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은 무기력하고 상실의 시대에서 ‘꽃길’만 걸을 거라는 그런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동경과 환멸 속에서도 행복을 찾아 비틀거리는 우리는 ‘다 지나가고, 다 잊혀질 거니 괜찮을 거라’는 말을 반복한다.

 

우리에게 꽃길은 없다. 지옥이든 가시밭길이든 지금 내가 있는 곳을 걸어야 한다.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의 순례길에서 너무 슬픔에 함몰되지 않도록, 그렇지만 일상의 건조함에 무디지 않도록 그 옆에서 건네는 담담하고 날카로운 위로가 필요하다. 그런 위로를 건네는 김윤아 4집 [타인의 고통]이다. 음악을 듣는 내 모습이 초라하고 슬펐지만, 음악이 너무나도 좋아서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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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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