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자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모험담 [영화]

영화 <에놀라 홈즈> (Enola Holmes)
글 입력 2020.10.01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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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놀라 홈즈>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낸시 스프링어의 소설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영화 <에놀라 홈즈>가 지난 9월 23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다. 셜록 홈즈에게 여동생이 있고, 그 여동생 또한 재기 발랄한 추리력을 가지고 탐정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는 게 주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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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에놀라의 16살 생일날 엄마 유도리아 홈즈가 사라진다. 10년 넘게 연락 없이 지냈던 두 오빠 마이크로프트와 셜록이 집에 찾아와 유도리아의 행방을 추적하고, 마이크로프트는 신부 수업을 위해 에놀라를 기숙학교에 보내려 한다.

 

에놀라는 자신이 직접 엄마를 찾기로 결심하고, 오빠들 몰래 혼자서 런던으로 떠난다. 그 과정에서 선거법 3차 개정과 관련된 튜크스베리 자작 실종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처음에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제 갈길을 가지만, 생명의 위협을 받는 튜크스베리 자작을 외면할 수 없어 그를 돕기 시작한다. 에놀라는 오빠들의 시선을 피해 엄마의 행방을 찾아야 할 뿐만 아니라, 튜크스베리를 둘러싼 사건을 파헤쳐야 한다.


 

 

모험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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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라는 추리의 대명사가 이 영화에 붙어있으니, 우리는 <에놀라 홈즈>에 긴박감 넘치는 추리게임을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낸시 스프링어의 <사라진 후작>을 기반으로 한 이 영화는, 에놀라의 놀랄만한 활약과 그에 따른 탄탄한 추리게임을 보여주기보다는 모험을 통해 에놀라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여준다. 동시에 해당 텍스트가 어떠한 가치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명확하게 제시한다.

 

<에놀라 홈즈>는 코난 도일의 원작 그대로 빅토리아 시대(빅토리아 여왕의 통치기간 : 1837~1901)가 배경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산업혁명이 진행되며 여성들이 다양한 직종에 진출한다. 그러나 여성의 노동은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했고 임금 또한 낮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이상적인 가정 모델은 남편이 돈을 벌고, 아내는 아이를 키우고 가족의 행복을 책임지는 ‘집안의 천사’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은 ‘아버지의 딸’과 ‘남편의 아내’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에놀라는 아버지의 딸이 아닌, 어머니의 딸이었다. 에놀라는 엄마와 단둘이 지내며, 책도 마음껏 읽고, 주짓수, 과학, 체스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자유롭게 지냈다. 엄마는 에놀라에게 가정교사를 붙이지 않고 직접 가르쳤다. 에놀라는 엄마의 가치관대로, 당시의 다른 여성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에놀라의 목표는, 당연히 ‘누군가의 아내’가 아니다.

 

에놀라의 오빠 마이크로프트는 에놀라에게 “현재 네 상태로는 도저히 남편을 맞이할 가망이 없다”며 정숙한 여인이 될 것을 요구한다. 에놀라는 자신을 기숙학원에 보내 신부 수업을 받게 하려 하는 마이크로프트와 그를 방관하는 셜록을 뒤로하고, 자신의 힘으로 엄마를 찾기 위해 런던으로 떠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에놀라가 어떻게 그의 전설적인 형제 '셜록 홈즈'의 발자취를 따라가는지가 아니다.

 

셜록 홈즈의 여동생이라는 타이틀과 비상한 추리력을 가지고 있지만, 에놀라는 셜록과 다를 수밖에 없다. 원작 소설에서 에놀라 홈즈는 오빠 셜록의 ‘논리적 마인드’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여성들이 속한 세계에서만 사용되는 별개의 의사소통 암호를 이해하고 복잡하게 얽힌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나간다고 묘사된다.

 

소설에서 에놀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빠의 ‘논리적’ 마인드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여성들이 속한 세계에서만 사용되는 별개의 의사소통 암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모자의 챙과 남녀불평등에 대한 저항이라든지, 봉인용 밀랍과 우표의 위치에 담긴 메시지라든지, 명함과 언제든 나를 숙녀로 보이게 해주는 위장용 옷과 소품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큰 어려움 없이 코르셋 속에 나를 지키는 데 필요한 물품과 생활용품은 물론, 심지어 무기도 지닐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에놀라는 오빠들의 감시망을 피하게 위해, 오빠들이 자신에게 결코 상상 못 할 모습인 '숙녀'로 변장한다. 에놀라는 이를 이용해 코르셋 안에 돈을 숨기고, 이를 방패로 사용한다. 끓는 찻주전자를 무기로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관찰을 토대로 추리를 하는 셜록과 달리, 에놀라는 사건 해결을 위해 과감하고 거침없는 육탄전을 벌인다. 기차에서 뛰어내리고, 성인 남성과 맨 손으로 대결하기까지 한다. 확실히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이 과정에서 에놀라는 위험에 빠진 소년 튜크스베리 자작을 돕고, 대신 나서서 싸우고, 소년을 위해 희생하기까지 한다.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서사 구조와 정반대다.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생기긴 하지만, 결말이 로맨스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집에 머물러도 된다고 말하는 소년에게, 에놀라는 "친절한 제안이지만 사양한다"라고 말한다. 엄마를 찾는 과정에서, 에놀라는 엄마에게 배운 것들을 토대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으로 성장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놀라 홈즈>의 지향점은 더욱 확실해진다. “제 이름은 에놀라예요. 거꾸로 조합하면 ‘홀로’란 뜻이 되죠. 홈즈 가문의 일원으로서 제 갈 길은 스스로 개척해야죠. 두 오빠들이 그랬고, 또 엄마가 그랬듯. 저도 그렇게 해야 해요. 하지만 지금은 혼자라고 해서 꼭 외로운 게 아니란 걸 알아요. 엄마는 제가 외롭길 바란 게 아니죠. 엄마는 제가 자유를 찾길 바랐어요. 스스로의 미래와, 스스로의 목표도요. 저는 탐정이에요. 암호 해독가이자, 길 잃은 어린양을 구하는 사람이죠. 제 인생은 제 거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 있죠.”


시대의 요구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독립적인 에놀라 홈즈의 모습, 그 자체가 바로 <에놀라 홈즈>가 주는 메시지다.


 


여자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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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놀라 홈즈>의 특징은, 무대와 관객 사이의 가상의 벽을 일컫는 '제4의 벽'을 깨고 에놀라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는 것이다. ‘홀로(alone)’라는 뜻을 가진 에놀라는 사실상, 그의 여정 내내 관객과 함께 한다. 에놀라는 적극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다. 농담을 건네고, 조언을 구한다. 영화 러닝타임 내내 관객은 에놀라의 모험에 가담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적 경험을 가장 특별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일 대상은 분명하다. 지금 이 시대에 자라나는 어린 여자아이들이다.

 

<에놀라 홈즈> 같은 영화가 필요한 이유는, 유도리아의 친구이자 에놀라의 주짓수 선생인 에디스와 셜록 홈즈의 대화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에디스는 셜록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권력 없이 사는 인생이 어떤 건지 모르기 때문이죠. 당신은 세상을 바꾸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에요. 본인에겐 이미 딱 좋은 세상이라서. 당신은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하나같이 다 진실이라는 걸 알아요.”

 

당시 참정권 이슈와 관련해 부유한 백인 남성으로서 셜록 홈즈의 특권을 에디스가 지적하는 장면이지만, 이는 지금 우리가 미디어를 바라보는 시선과도 연결시킬 수 있다. 이미 입맛에 맞는 콘텐츠들이 넘치는 딱 좋은 세상이라면, 미디어 지형을 굳이 바꿀 이유가 없다. 하지만 여자아이들에게 지금의 미디어 지형은 어떠한가. 어릴 적부터 접하는 미디어 콘텐츠의 대부분은 남자의 가치와 이야기를 대변한다. 여자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그러한 시선을 내면화하고, 화면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마주하지 못한다.

 

<에놀라 홈즈> 같은 이야기가 많아진다면, 우리 이후의 아이들은 다양한 세계를 담은 이야기를 만나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꿈꿀 수 있다. 영화가 에놀라 역을 맡은 밀리 바비 브라운에게 첫 주연과 함께 첫 제작이라는 타이틀을 주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에놀라 홈즈>가 우리에게 주는 믿음은 명백하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자기 스스로를 뭐든 할 수 있는 존재,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보고, 또 그렇게 자라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

 

간간이 느껴지는 영화의 허술함과 비판점은, <에놀라 홈즈>가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제작되었다는 걸 감안하면 눈 감아줄 만하다. 또한 원작 소설이 6부작이라는 걸 고려할 때, 이번 영화에서 다소 부족했던 미스터리함과 긴박감은 후속작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품어본다. 첫 발을 내디뎠을 뿐, 에놀라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셜록 홈즈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에놀라 홈즈>를 본다면 분명 실망스러울 것이다. 대신, 독립적인 삶의 주체로 서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기꺼운 마음으로 봐주었으면 좋겠다. 지금 세대의 어린 소녀들은 에놀라를 보고 더 많은 꿈을 그려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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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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