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생존자, 공동체, 가해자, 사회를 치유할 회복적 정의 - 도서 '진실과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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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지하기로, 내가 처음 성폭력의 공포를 느낀 것은 고작 초등학생 때였다. 방학 특강을 듣기 위해 아침에 길을 걷고 있던 내 옆에 자동차 한 대가 섰다. 유리창이 내려가더니 그 안에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남자가 내게 길을 물어왔다. 남자는 초등학생이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을 쓰며 길을 물었는데, 몇 살 더 먹고 보니 그건 성매매를 할 수 있는 곳이 어디냐고 내게 물은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어렸지만 무시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거기에는 남자의 완전히 발기한 성기가 있었다.
남자의 성기, 그것도 잔뜩 솟아 있는 성기를 보기는 생전 처음이어서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인식이 안 됐다. 그런데도 저것이 굉장히 폭력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누군가 내 머리를 주먹으로 힘껏 때리지 않아도 사고가 정지되고 감각은 순간 차단되었다. 나보다 나이도 힘도 우위인 인간이 내 일상을 갑자기 ‘침해’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얼이 빠져 있는데 남자의 두 번째 질문이 나를 다시 현실로 불러들였다.
“어디까지 가요?”
나는 얼떨결에 학원에 간다고 답했고 남자는 내 대답을 듣더니 차창을 올리고 나를 지나쳤다. 남자의 자동차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뛰어야겠다는 ‘생각’을 비로소 할 수 있었다. 몸이 덜덜 떨렸다. 남자의 차가 굴러간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쉬지 않고 뛰었다. 혹시라도 차가 유턴해서 돌아올까봐 너무 무서웠다. 이 사건 이후 나는 한동안 한적한 길 걷기를 피했고 주변에 성인 남자가 지나가기만 하면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성인 남자라면 얼마든지 나를 해칠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고 나와 상관없이 지나가는 아저씨만 봐도 분노를 느꼈다. 이런 종류의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 겪어봤다. 내가 아주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기 전까지, 이 감정은 불쑥불쑥 올라왔다. 아마 그것은 내 첫 번째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이 사건을 한 번에 여러 사람 앞에서 얘기하기는 고등학교 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다녔던 여고에는 교내 행사로 반 별 수련회 같은 시간을 보내는 날이 있었다. 커다란 방 하나에 반 인원 전체가 모여서 하룻밤을 잤다. 수련회 날 밤 학생들은 당연히 일찍 자지 않았다. 우리는 비밀 얘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어느 순간부터 성폭력 피해 경험 공유의 장이 되어 있었다. ‘어, 나도 그런 적 있는데.’ ‘나도 비슷한 일 있었어.’ ‘나는 —에서 그런 적 있는데 너는 어디서 그랬어?’ 몇 명 얘기하다 끝날 줄 알았던 이 이야기는 ‘나도’라는 단어를 연결 고리 삼아 연쇄 작용을 일으켰다.(미투 운동이 있기 한참 전의 일인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이런 흐름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고, 한편으로는 세상이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같은 반 친구들이 겪은 일 중에는 경미한-사실 이 단어를 쓰기도 싫다- 사안부터 지금이라도 신고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심각한 사안까지 그 경중이 다양했다. 한편 우리가 불쾌하고 위험한 일을 당했던 장소들은 너무나 일상적인 곳들이었다.
나는 그날 우리 반 친구들 한 명도 빠짐없이 크고 작은 피해 경험이 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됐어. 우린 서른 명도 넘는데! 우리 아직 다 미성년자인데. 성인보다 보호받는 게 미성년자잖아. 그런데도 이 정도면 이거 진짜 큰 문제 아냐? 그렇다. 한 주제에 대해 여러 사람의 경험담이 공유되는 일은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체적인 맥락에 눈을 뜨게 한다. 그날 이후로 성범죄는 사회의 문제라는 흔들리지 않는 인식이 내 안에 생겼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Judith Lewis Herman, 1942~ )의 ‘트라우마 연구’ 3부작 중 마지막 책인 <진실과 회복>을 읽게 된 이유도 가정 폭력, 성폭력, 아동 학대 생존자들의 고통 발생 원인과 트라우마 치유를 사회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생존자들의 트라우마를 연구하고 그것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수십 년 간 힘 써 온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미국 하버드대학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교수이다. 트라우마 치료 및 연구 분야의 세계적 거장인 그는 저서로 가족 내 성폭력 피해와 그 트라우마에 대해 연구한 <근친 성폭력, 감춰진 진실>, 트라우마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당사자 치료를 다룬 <트라우마>를 저술했다. '트라우마 연구'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진실과 회복>은 트라우마 회복에 필요한 마지막 요소로서 사회적 역할을 조명하면서, 트라우마 회복을 위해서는 공동체 차원에서의 진실 인정과 정의 바로 세우기가 필수적이라고 역설한다. 허먼의 연구에는 그가 인터뷰한 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여러 구체적인 증언들이 등장한다.
이 책은 총 3부로 되어 있다. ‘1부 권력’, ‘2부 정의의 비전’ 그리고 ‘3부 치유’가 그것이다. 1부에서 저자는 트라우마의 원인을 지배, 종속 기반의 권력관계에서 찾는다. 이 권력관계는 독재의 원형이고, 독재는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수단으로 쓴다. 호혜, 상생을 방식으로 삼는 평등한 공동체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허먼은 가장 넓게 퍼져 있고 가장 오래된 독재의 유형으로 가부장제를 든다. 가부장제라는 독재를 유지하는 폭력은 저자가 오랜 세월 연구해 온 가정 폭력, 성폭력, 아동 학대와 떼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권력이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따라 정의의 빛 역시 약해지거나 강해지는데, 가부장제 헤게모니 아래 벌어진 폭력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최종적인 단계에는 결국 사회적 차원의 정의 실현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가 이 책 전반에 걸쳐 하는 주장이다.
‘2부 정의의 비전’에서는 생존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생존자들이 자신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사회에 바라는 정의의 모습에 대해 소개한다. 생존자 치유의 첫 단계에는 생존자의 발언, 공동체의 경청, 그리고 가해자의 범죄 사실 인정이 필요하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서, 가해자가 자신의 범죄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때 공동체는 ‘윤리 공동체’가 되어야한다.
허먼이 인터뷰한 생존자 중 많은 수가 가해자에 대한 응분의 처벌보다는 가해자의 인정과 사죄, 그리고 가해자의 재활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물론 가해자의 사죄를 결코 바라지 않는 생존자도 존재하며, 생존자가 응분의 처벌을 바란다하더라도 이는 지탄받을 일이 아니다) 생존자들은 공동체에 사건의 진실을 인정받고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받기를 바랐으며 안정감을 갖고 회복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를 바랐다.
상황과 자기 몸에 대한 통제력을 모두 빼앗긴 채로 무슨 짓을 어떻게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 그건 흡사 죽음의 공포다. 안전과 안정감을 회복해 나가는 데에는 생존자가 자신의 통제력을 다시 키워나가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허먼에 의하면 형벌주의인 현 사법 체계 재판 과정에서는 피해자가 통제력을 되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형사재판에서 사건은 국가 대 피고의 것이 되며 정작 이 과정에서 피해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나 시간은 매우 부족하다. 원고는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무죄 추정의 원칙으로 보호 받지만 증인석에 앉은 생존자는 원고의 변호사로부터 지난 날의 ‘행실’이나 옷차림, 언행, 인간관계 등을 공격 받으며 모멸감을 느낄 수 있다. 오랜 기간 지속되는 재판을 감당하는 시간과 비용의 문제 등도 존재한다. 성폭력은 신고 비율도 적지만 재판에 회부되는 비율은 더 낮으며, 사건이 재판에 간다 해도 가해자가 유죄 선고를 받는 일은 더 어렵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재판을 포기하는 생존자도 많다. 신고부터 기소, 재판, 선고까지 모든 과정을 감당한다고 해서, 가해자가 엄벌에 처해진다고 해서 생존자의 치유와 회복 과정이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니다.(물론 가해자가 솜방망이 형벌을 받는 것보다 엄벌에 처해지는 편이 회복에 도움 되리라 생각한다)
이런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허먼은 ‘회복적 정의’를 말한다. 그가 말하는 ‘회복적 정의’란 생존자의 통제력을 우선시하는 윤리 공동체가 생존자의 발언을 경청하고, 가해자로 하여금 생존자가 바라는 방식으로 보상하고 재활하게 만들어 가해의 여파를 ‘책임지게’ 하는 것이다. 이때 생존자가 바라는 사죄와 보상 그리고 가해자의 재활 방식 등은 피해자와 가해자 양측을 존중하는 사람들의 참여로 ‘조정’된다. 피해와 가해의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인정한다는 점에서 ‘조정’은 양측에 중립적인 태도로 임하는 중재와는 다르다.
회복적 정의란 본래 피식민 국가의 피해자들이 가해 국가의 전범들을 처벌하는 대신 그들의 철저한 인정과 상세한 가해 행위가 담긴 증언을 기록하는 것을 바탕으로 그들의 죄를 사하는 동시에 역사적 기록을 형성하는 일련의 움직임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이 개념을 성범죄 생존자의 치유와 회복, 가해자의 재활, 생존자와 가해자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윤리 공동체의 재생에 적용해 보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회복적 정의는 형법 체계 위주의 현 사회에 있어 가장 급진적인 대안인 셈이다. 그리고 저자 허먼은 이 대안이 실천되고 올바른 모습을 찾아나가며 종국에는 우리 사회에 뿌리 내리길 바라는 사람 중 하나다. 2부 6장 ‘책임지기’에서는 가해자에게 책임을 지게 한다는 것이 무엇일지 논하는 여러 생존자, 여러 단체가 탐색하는 비전들을 더 자세히 접할 수 있다. 다음은 책에서 말하는, '회복적 정의'의 의미와 목적이다.
생존자에게 정의란 공동체가 가해자와의 공모를 중단하는 일이므로, 생존자가 중심에 있는 회복적 정의란 가해자에게 명확한 책임을 묻고, 가해를 야기한 가해자의 태도를 바꾸려고 노력하며, 가해자와 공모한 사회문화 관습을 전환하는 방식으로 생존자와 공동체가 통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문제는 아직 가부장제 헤게모니가 유발한 폭력 트라우마의 치유와 회복, 그리고 가해자의 재활에 있어 아직 뚜렷한 성과를 보인 회복적 정의 시도의 성공적이고 완결성 있는 사례를 찾기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엄연히 ‘시도 중’, ‘적용 중’인 개념이며 크고 작은 집단에서 생존자의 요청을 바탕으로 윤리 공동체의 조정이 이뤄지고 있다. 회복적 정의에 입각한 조정은 현재 형법 위주의 재판에서 생존자가 할 수 있는 일에 비해 주도권과 안정감이 큰 게 사실이지만, 아직 선례가 마련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윤리 공동체의 조정을 이행하고 있던 가해자가 새로운 성범죄 가해를 저지른 사례도 있어 더욱 조심스럽다. 이 윤리적으로 실험적인 시도를 하고 사례를 쌓아나가기에 허먼은 '대학'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다양한 대안 시도와 적용에 적합한 장소가 되어주지 않을까 기대한다.
‘3부 치유’에서는 정의가 피해자를 치유할 뿐 아니라 가해자와 사회 전반을 치유할 수 있다는 논의를 더 발전시킨다. 생존자의 치유와 회복에 집중함은 물론이고, 가해자의 격리보다는 재활에 성공한 가해자를 사회가 어떻게 복귀시키는지에 또한 주목하며 사회적 차원의 트라우마 치유에 대해 논의한다. 마지막 장인 '결론: 가장 오래 걸리는 혁명'에서 저자는 2020년에 성폭력 생존자들이 발표한 '생존자 의제'를 제시한다. '생존자 의제'는 공동체의 쇄신, 남성 중심주의를 미화하는 문화의 변혁, 교육에 대한 공동체 투자를 확고히 단행하자고 주장하는 정의에 대한 청사진이다.
역사적 문제에서 회복적 정의의 개념이 와닿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는 만큼 억울하게 묻힌 목소리는 너무나 많을 것이다. 왜곡된 역사는 말할 것도 없다. 식민지배를 당한 나라의 국민들이 역사에서 정당한 발언권을 갖고 그간 입이 틀어막히느라 써내려가지 못한 역사의 페이지를 여러 권의 책으로 만들어 나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피해자의 수도, 가해자의 수도 두 국가의 국민 단위로 많아지는 만큼 한 집단에 의한 다른 집단의 피해를 바로잡고 회복하는 데에는 증언을 확보하고 역사 기록을 형성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복적 정의라는 개념이 성폭력, 가정 폭력, 아동 학대 생존자의 치유와 회복에 얼마나 적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이 문제들에 있어 회복적 정의가 가장 대중적인 방식이 된다면 가해자의 처벌을 바라는 생존자에게 새로운 압박이 생기진 않을지 걱정하는 것은 너무 이른 일일까? 어쩌면 회복적 정의가 가장 대중적인 회복과 사죄, 보상의 방식으로 자리 잡을 정도의 사회라면 지금의 내 걱정은 무의미할 정도로 성숙하고 호혜적인 사회가 되어 있을까?
이 책을 읽기 전 '성범죄 및 아동 학대 피해자 전담 수사반 (special victims unit)'의 이야기를 그리는 장수 미드 <로 앤 오더>를 보다가 ‘회복적 정의’ 개념이 언급되고 생존자 자매가 다른 범죄 사실로 수감된 가해자를 찾아가 가해자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라고 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회복적 정의를 시도하고 이 방안의 실질적인 형식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현 사회에서 일어나는 또 하나의 흐름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확실한 건 ‘회복적 정의’의 시도를 생존자가 바란다면 이루어져야 하고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개인 , 윤리 공동체, 사회 전반은 또 크고 작은 진통이나 아노미 상태 등을 경험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선한 것들도 그냥 공으로 얻은 것은 없으니까. 신분제가 사회의 기틀이던 시기에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신분제가 앞으로 없어질 거라는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사회는 진보한 것처럼, 회복적 정의의 가능성이나 형태 또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미래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경청하고 호혜와 공감을 노력하고 ‘자기 일’의 범위를 넓혀가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생존자는 생존자 사명을 갖고 이 일에 임할 수 있고, 방관자는 가해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가해자는 자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이 일에 임해야 한다.
몇십 년 뒤의 미래를 상상해 본다. 그때 우리 공동체는 과거에는 치명적이고 회복이 힘들다고 간주했던 어떤 고통을 사회 안에서 함께 회복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나누게 될까. 또 어떤 새로운 문제에 고뇌하고 있을까.
[신성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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