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식물의 사유

32편 편지에 담아낸 식물 세계를 통한 사유
글 입력 2020.09.2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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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사유』

_루스 이리가레, 마이클 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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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종종 시간을 보내러 가는 카페가 있다. 아스팔트, 콘크리트 미 가득한 대도로 곁에 지어진 다섯 층으로 이루어진 꽤 큰 규모의 카페다. 특징이 있다면 각 층마다 식물이 놓여있다는 것이다. 1층에는 유리창으로 이루어진 한 벽면의 전체가 덩굴 식물로 덮여있고, 2층은 베란다 같은 좁은 공간에 여러 그루의 나무가 심어져 있고, 3층 테라스에는 정원같이 꾸며 놓은 공간에 꽃과 나무 등 여러 식물이 심어져 있다. 멍 때리다 보면 그런 식물에 자연스레 시선이 간다. 인공적인 모노톤의 공간 분위기를 환기 시키는 것은 그런 식물만이 지닌 푸른빛이었다. 식물만이 주는 무엇인가가 있긴 한 것 같다. 바삐 살아가다 종종 지칠 때면 많은 이동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식물, 자연만이 주는 파릇한 기운을 찾아가곤 하니 말이다.


한편 ‘식물'이라 하면 ‘자연’이란 말이 떠오른다. 그것은 꽤 어려운 단어다. 어떻게 보면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단어이지 않은가. 식물, 더 나아가 동물들을, 대기를, 바다를, 저 깊숙이 우리는 알지 못하나 생동하는 기이한 법칙을 모두 자연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여기에 인간을 포함해보자. 그러자 나는 어딘가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까? 코로나19로 인간이 세상으로 나오지 않자 자연이 다시 회복되는 현상이 한창 이야기되던 때가 얼마 전이었다. "자연이 회복되었다”라고 할 때, 인간은 그 자연에 포함되어 있는 걸까. 그리고 이런 질문이 이어진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가”라고. 어쩌면 그 관계를 추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연과 인간 사이에 일종의 분리가 존재해왔음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이제는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옳은 걸까?


자연을 보호하자, 식물을 보호하자는 맥락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나는 그런 말을 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사람이다). 오히려 이번 글에서 리뷰할 도서 『식물의 사유』가 내게 안겨준 새로운 것은 바로 식물 존재를 통해 바라보는 인간의 존재였다. 어느 면으로는 식물계를 통해 이어지는 인간에 관한 사유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에 관해 반복적으로 이야기되며 익숙하고 당연한 것으로 고착화된 경계와 범위를 넘어서는 새로운 전환, “인간과 식물의 창조적 만남”이었다.

 

*


『식물의 사유』는 ‘페미니즘(성차) 철학’을 이어온 루스 이리가레와 ‘식물성의 철학’을 이어온 마이클 마더 두 철학자가 주고받은 서신을 한데 엮은 도서다. 식물을 통한 철학적 사유가 16개의 주제를 두어 32편의 글로 펼쳐진다.


여타 철학 도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전문적인 철학적 사유뿐만 아니라, 식물계에 머물며 사유를 이어나가게 된 그들만의 사사로운 이야기와 고백도 함께 담겨있다는 것이다. 각자의 상황 속에서 식물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시작하는 계기가 된 인간으로서의 결핍, 외로움, 불안정 등의 경험이 함께 이야기된다.

 

 

루스 이리가레는 박사학위 논문을 책(『검경』, 1974)으로 출판한 뒤 라캉 정신분석학교에서 추방당하고 파리 뱅센 대학의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그녀가 어떻게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을까? 교통사고를 당한 후 요가 수업에서 배운 호흡법이 어떻게 그를 인도 철학으로 이끌었을까? 감각과 영혼을 결합하려는 그의 노력이 어떻게 매일의 시 쓰기로 나타났을까? 우리는 이 책에서 그녀의 철학적 사유와 결합한 내밀한 독백을 들을 수 있다.


마이클 마더는 뿌리 뽑힌 이민자로 세계를 떠돌아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집 마당에서 식물이 뿌리 뽑히는 것을 보고 내면의 무언가가 복구될 가망 없이 영원히 상실되었음을 느낀 것이나, 빙설폭풍이 오타와 시에 불어 닥쳤을 때 도시적 삶의 취약성을 몸소 체험한 것이 어떻게 식물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 이어졌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철학을 삶의 맥락과 감각적 경험으로 다시 데려오는 이런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사유의 장소성과 신체성을 느낄 수 있다.

 

 

식물을 통한 철학적 사유를 시작하게 된 목적에 대해 이리가레는 서문에서 “우리가 이 책을 함께 쓰게 된 것은 현재 자연과 생명이 처한 상황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러기에 이들의 사유는 현재 공존하는 생명을 향해있기도 하다. 두 철학자는 식물 존재를 통해 식물의 존재에서 자연으로, 생명으로, 생명체의 요소로 간주되었던 4원소로, 생명이 호흡하는 공기로, 인간의 감각, 인간 되기, 문화, 공존으로 뻗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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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선 『식물의 사유』를 통해 기존의 사고방식과 설명에서는 마주할 수 없던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인간은 ‘자라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하이데거가 초기 그리스 철학에서 읽어낸, 죽어있는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스스로 자라고 변화하는 물질’을 의미하는 ‘퓌시스(phusis, 자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자기 안에 성장의 잠재력을 지닌 살아있는 존재인 퓌시스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존재는 ‘퓌톤(phuton, 식물)이다. 이로써 한곳에 뿌리내려 이동도 변화도 불가능한 존재로 간주되었던 식물을 통해 ‘자라고 변화하고 생성하는 존재’로서의 자연적 원형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는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를 읽어내는 새로운 길로 이어지고 있었다(옮긴이 해제 발췌).


“인간은 자라나는 존재다." 너무 당연한 말인 것 같은데 낯설었다. 인간을 표현하는 수많은 동사 중 ‘자라다’는 생명 자체에 집중하는 말로 느껴졌다. 그 순간에 일었던 잔잔한 낯섦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 충격 자체가 인간으로서 주어진 자연에서 자연스럽게 감각하고 느끼고 느낄 수 있는 것을, 생명으로 살아감에 필수적인 호흡을 기억하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나 자신, 혹은 사람에 대해 생각할 때 ‘생명’ 그 자체라는 관점으로 바라본 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일었다. 아니, 어쩌면 그럴 여지나 계기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인간은 자연을 통해 감각하고 생동할 수 있는 생명 대신 인공적으로 구축된 문화 속에서 코드화된 몇 가지 말과 기준에 자신을 맞추며 생존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된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이제 인간은 살아가며 생명을 생동하게 하는 것이 아닌, 생존하기 위해 생명을 소비한다는 통찰이 너무도 와닿았다.


오늘날 인간에게 생존하기 위해 생명을 마모하는 것이 너무도 익숙한 것이 된 것만 같다. 아이러니하다. 생명을 가지고 있기에 살아갈 수 있는데, 살아가기 위해 그 생명을 깎아내린다. 그리고 인간이 구축한 문화, 사회에서는 자연스레 인간이 생명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부분들이 너무도 쉽게 조건 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울에서 자취방을 구할 때 부모님께서 서울에서 살며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면 500만 원을 더 내야 한다며 우스갯소리로 던졌던 씁쓸한 농담을 떠올렸다.


 

만물은 경직되어 있습니다. 땅, 벽, 몸짓, 말 모두 단단히 굳어있습니다. (...) 반면, 자연에서는 모든 것들이 시시각각 변합니다. 나뭇잎, 꽃, 풀잎, 냄새, 소리는 매일 바뀝니다. 숲과 정원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영원하고 안전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도시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도시에서 변하지 않는 상태는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을 줍니다. 나는 내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대신 부호를 따라야 했습니다. 나는 그 부호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시에서는 낮과 밤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땅거미가 지면 도시는 환하게 밝혀지고, 높은 층에 사는 경우가 아니면 당신은 햇빛을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 당신은 차량이나 이웃의 소음, 근무시간, 상점의 개점과 교통수단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움직이고 성장할 수 있을까요? 나의 에너지는 하나의 부호에서 다른 부호로 전해지면서 점차 사라졌습니다. 모든 존재는 생명에 적합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 결과 방향을 잃게 되어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런 구성된 질서에서 나는 나 자신을 잃었습니다. 나는 로봇으로 변했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살지 못하고 살아남으려고 애썼을 뿐입니다.

 

- 루스 이리가레, "9장 인간들 사이로 돌아가는 위험을 무릅쓰기"

 


이에 이어 식물을 통해 주체성에 대한 어떤 자유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 역시 ‘생명’에 초점을 맞춰 바라본 주체성이라는 사유의 방향에서 일어났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인, 그 이외에는 어느 조건이나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생명이라는 것에서 말이다. 나로선 줄곧 정해지지 않은 상태, 외부의 자극과 조건을 내려놓고 나만 남은 상태에 대해 회의적이고 불안한 상태만을 이야기해왔는데 처음으로 그 상태가 주는 자유로움에 대해 음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가지던 그 답답함과 괴로움이, 나만이 남은 주체성을 사유해보고자 함에도 마이클 마더가 ‘객관적 진리’라 말한 것에 나를 끼워 맞춰가며 다시 설득시키려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파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생명으로서 내가 숨 쉬고자 하는 것, 느끼고자 하는 것, 다가오는 것들을 음미할 수는 없었던 걸까. 적어도 우리는 그런 휴식을 충분히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명이 생동하게 하는 움직임과 감각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단순한 발상일 수 있으나, 나는 사유의 중심에 인간이 개입한 조건 하나 없는 식물 존재가 놓여있다는 그 장면 자체에서 일종의 휴식을 가지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그것은 치열하게 어떤 결론이나 논리만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과정과 인상을 준 사유였다. 호흡이 트인 듯한 사유라 할 수 있을까. 반복되는 말과 완성하려는 말들에서 벗어나 식물, 자연 속의 생명을 통해 인간의 생명을 바라보는 과정은 다른 사유에서는 감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호흡이었다.

 

*

 

한편으론 두 철학자의 사유를 읽어나가며 이런 질문을 던졌다. 식물, 결국 생명에 관한 이들의 사유가 지금 우리 개개인에게 얼마나 가까운 것으로 다가올 수 있는가? 라는 부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장의 쓸모에 대한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 과정에서 나는 글의 시작에서 언급했던 인공적이기 그지없는 환경에 구태여 옮겨진 식물들의 풍경을 떠올렸고, 그러면서 문득 영화 <이퀄리브리엄> 속 세계 ‘리브리아’를 떠올렸다.


간단히 말하면 제3차 대전이 일어나고 새로이 건설한 세계 ‘리브리아’는 인간의 변덕스러움으로 인해 이러한 위험이 발생했다고 판단한 결과로 나타난 도시다. 독재를 통해 국민들의 감정을 통제하고, 감정을 일으키는 그 어떤 창작물이나 대상도 허가하지 않는다. 감정을 가지는 것이 범죄인 리브리아에는 식물, 자연이라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왜 그저 존재할 뿐인 식물도 모두 없애버린 걸까. 그리고 나는 그 광장 한가운데 나무 한 그루가 있다면 어떨지 상상해봤다. 아무도 모르게 수많은 ‘범죄자’가 그 앞에서 고요히 생동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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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퀄리브리엄> 장면

 

 

내가 사는 주변, 도시 곳곳에 겨우 남아있는 자연의 일부(그마저도 인공적으로 틀에 맞춰 옮겨진 것이지만 - 새삼 이것이 꼭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마저 사라진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면 어떨지 상상해보았다. 꽤나 많은 호흡과 감각이, 그저 느끼는 것으로 충분한 순간들이, 잠시 풍경에 시선을 두며 고민에서 벗어나 한숨 돌리는 순간들이 순식간에 지워지는 것 같다. 책을 통해 철학자의 사유를 만나고 여러 장면을 떠올려 보니 식물은 단지 땅에 뿌리내려져 자랄 뿐인 존재가 아닌, 그 자체로 자라고 변화하고 생성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각과 호흡을 일으키는 존재라는 것이 더 선명하게 이해되었다.



그런데, 왜 하필 식물이 현재 자연과 생명이 처한 위기에 대한 진단과 대안 모색의 핵심으로 간주되었을까? 인간중심주의가 지구 환경 파괴와 생태계 위기를 낳은 원인이라는 반성이 일면서 동물과 동물권에 대한 관심이 현대 담론의 뜨거운 주제로 떠올랐지만, 식물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식물은 가장 미발달된 생명 존재이고, 생산의 원자재이자 바이오 연료로 치부되어 왔을 뿐, 인간이 그 일부를 이루는 생명의 토대로 이해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식물적 존재로 돌아가는 것은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 생명과 연대하는 사유의 가능성을 길어 올리는 것이다. 생명의 에너지를 키우고 나누는 새로운 사유와 삶의 방식은 생태 지향성을 당연히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이 생태 지향성은 그것을 가로막는 사유 체계와 사회경제 체제의 해체와 극복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철학자로서 이리가레와 마더에게 이 작업은 서구 형이상학을 극복하는 일과 깊이 연동된다.

 

 

나로선 이러한 식물 존재를 통한 사유가 다른 생명과의 공존을 향하는 과정의 시작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현재 우리가 지금까지 여러 징후를 통해 짐작했음에도, 더 많은 것이 파괴되고 나서야 직시하기 시작한 자연의 파괴 문제와도 깊이 연관된 것일 테다. 우리는 앞으로 자연과 다른 생명과 어떻게 공존해나가야 할까. 마이클 마더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세계 못지않게 우리가 생명으로서 자연을 통해 감각하고 호흡할 수 있는 순간 또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사회 세계에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홀로 있는 것이 갖는 숨겨진 여분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객관적 진리’라는 거짓말이 아니라 진리에서 찾는 나타남의 형태를 수용해야 합니다. 이 진리는 사물에 대한 맹세이자 충실성으로서의 진리를 말합니다.


(…) 사유와 행위는 더 이상 자신을 우리가 태어나는 세계 위에 그 세계에 맞서 건설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유와 행위는 이 세계를 공유하면서 성장하고 무르익어갈 수 있습니다.

 

- 마이클 마더, 9장 "인간들 사이로 돌아가는 위험을 무릅쓰기"

 


이와 더불어 루스 이리가레는 10장에서 “사회적 삶은 생명의 소비를 위한 장소 이외의 어떤 것일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한다. 사회에 살며 분명히 누리는 이점이 있으나, 이것이 오히려 우리의 생명 자체에 해를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한다. 이러한 사유의 전개는 자연을 인간이 주체로서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라 말하는 것을 넘어서 생명으로서 상호 주체적으로 공존해야 함을 드러낸다. 각 생명이 존재하는 방식과 상태는 상이하나 결국 저마다 지닌 생명의 조건의 서로 개입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식물에게서 발견한 '생명'이란 관점을 통한 공존에 관한 사유는 지금까지 익숙하게 존재하던 대상과 주체를 구분하는 경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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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철학자의 식물을 통한 사유를 통해 여러 연상과 질문으로 생각을 이어나가며 자연과의 공존에 관한 문제는 단지 ‘환경문제’라는 범주에 두거나 그러한 관점으로만 보기에는 얼마나 개개인의 삶 자체에 깊이 침투한 문제인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식물을 통해 숨을 쉬고, 자연스러운 풍경에 놓이는 휴식을 온전히 배제하고 살아갈 수 있는가. 언제까지 자연 위에 문화를 건설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을 분리할 수 있는지, 언제까지 그렇게 자연을 지배하고 소비할 수 있는지, 자연과 다른 생명을 항한 인간의 태도는 얼마나 유효하고 충분한 성찰이 일어났었는지 질문하게 되었다. 『식물의 사유』는 그런 어긋난 상황 속에서 미처 일어나지 못한 사유의 한 갈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 시스템의 모순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생명 자체, 그리고 생명 최초의 몸짓이자 최후의 몸짓인 숨 쉬기에 대한 관심의 부족에 기초해 있습니다. 헤겔과 마르크스 두 사람 모두 공기와 숨 쉬기가 생명 유지나 정신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이들의 사상은 산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점이 타자와 생명을 공유할 수 있기 위해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생명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각자가 타자의 생명을 요구하는 그런 인간성으로의 귀결되는 것은 아닐까요? 공기와 숨쉬기에 무관심한 우리 사회의 모습은 또 어떤가요?

 

- 루스 이리가레, 3장 ”보편적 호흡을 공유하기”

 


다시 시작하면서, 나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자연의 삶과 사유는 거의 시작되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이데거조차 그런 것을 그려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책은 이 방향으로 내딛는 최초의 발걸음 중 하나입니다. 식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었습니다.

 

- 마이클 마더,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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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각기 ‘페미니즘(성차) 철학’과 ‘식물의 철학’이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자신만의 독창적 사유를 전개해 온 두 철학자가 ‘식물 존재’를 통해 자연과 문화, 물질과 정신, 감각성과 초월성, 주체와 타자, 여성과 남성, 비인간과 인간 등 서구 형이상학을 지배해 온 이분법과 동일성의 사유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식물의 사유』는 루스 이리가레의 서신으로 이루어진 1부, 마이클 마더의 서신으로 이루어진 2부, 마지막에 옮긴이의 해제로 구성되어 있다. 필자는 1부와 2부를 번갈아 이동하며 보다 두 철학자 사이에 대화처럼 오고 가는 사유를 읽어가는 독서 방식을 택했다. 책에 등장하는 철학 개념이 낯설거나 내용이 잘 잡히지 않을 때는 옮긴이의 해제를 통해 실마리를 잡았다.


이는 단지 식물에 관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식물의 사유』는 생명의 존재를 잊은 사람을 향해 있으며, 식물도 사람도 생명을 지닌 존재로서 앞으로도 공존해야 한다는 것에서 충분히 사유해 볼 가치가 있는 내용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에 관한 성찰은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 놓여있는 태도로,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을 바라보는 태도의 성찰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기존의 서양 형이상학적 사고의 이분법적, 동일성의 사유를 넘어서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만큼, 기존의 서양 형이상학적 사유와는 다른 사유를 살펴보기를 원하거나, 세상을 사유하는 새로운 관점을 모색하고 있는 분들께 한 번쯤 읽어보기를 추천해 드리고 싶다. 필자의 리뷰는 생명의 관점으로 본 인간 개인의 주체성과 생명의 공존의 방향으로 이어졌지만, 현재 우리가 선명하게 맞닥뜨린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려는 사유가 펼쳐지는 만큼 도서를 통해 독자마다 새로운 관점과 질문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도서 정보]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식물의 사유』

 

(최종) 표지 식물의 사유 0807 144 2103.jpg

 

 

지은이

루스 이리가레, 마이클 마더

 

옮긴이

이명호, 김지은

 

분야

인문/철학

 

가격

18,000원

 

쪽 수

360쪽

 

출판사

알렙

 

출간일

2020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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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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