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적어도 제자리는 아닐 테니 [영화]

한여름 밤의 꿈, 그게 운명이었든 의지였든
글 입력 2024.01.0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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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기스 플랜> (Maggie's Plan, 2015)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베론 : 이 자들이 잠에서 깨면,

이 모든 소동이 한낱 꿈이요 무익한 환상으로 보일 거야.

3막 2장 / <한여름 밤의 꿈>,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 영화는 혼자 아이를 갖고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인 것 같기도, 운명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야기는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그리고 어쩌면 보고 나서도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갇혀 있던 비눗방울에서 나오듯 명확해질 수도 있다.

 

마치 매기의 계획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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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기는 자신의 의지로 인생을 만들며 살아가겠다는 생각으로, 정자은행을 이용해서 혼자 아이를 낳아 살아가겠다는 큰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도 옮긴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소설 쓰는 교수인 유부남 ‘존’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혼을 해서 예쁜 아이 ‘릴리’도 낳아 함께 살게 된다. 혼자 아이를 낳아 둘이 함께 살겠다는 그 큰 계획은 갑자기 없어지고 생각지 못한 큰 변화가 찾아왔지만, 행복한 일상을 살게 되었으니 아무렴 좋았다.

 

하지만 점점 자신의 일에 집중하며 존의 두 아이 ‘저스틴’과 ‘폴’, 그리고 릴리를 돌보는 것에 소홀해지는, 거기에 전 배우자인 ‘조젯’과 너무 자주 연락하는 존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존이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도 점점 의문이 들고, 자신의 사랑이 식어가는 걸 느끼는 것 또한 무서울 지경이다. 갑작스레 시작되었지만 행복했던 결혼 생활은 이제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하고, 자신이 예상했던 행복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간다. 한마디로, 이 결혼은 실패한 것 같다.

 

그래서, 매기는 다시 계획을 세운다. 존을 다시 조젯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 이상하긴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간단한 계획이었다. 아니, 간단할 줄 알았다.

 

조젯은 처음에 매기를 (아무래도 매기 때문에 존이 자신과 이혼했으니) 탐탁지 않아 했고, 이 계획을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존을 사랑하기에 결국 매기와 그 계획을 함께 하게 된다. 그래서 두 여자는 매기의 친구 ‘토니’가 말한 것처럼 ‘상자에서 죄다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는 것’, 그 계획을 실행한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어가는 것 같은 그 와중에 두 여자가 모든 걸 계획했다는 걸 존이 알게 되고, 엉망이 된다.

 

매기는 운명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운명에 자신의 삶을 맡기지 않겠다는 신념도 갖고 있고, 적극적으로 뭔가를 계획한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모든 계획이 실패해서 매기, 존, 조젯, 이 세 인물들의 현재가 엉망이 되어버렸을 때, 다시는 자신의 운명에도, 남의 운명에도 끼어들지 않는 수동적인 삶을 살 거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마지막에, 모든 거품이 터지고 시야가 환해지듯 마치 원래 그럴 운명이었던 것 같은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매기의 아이인 릴리는 사실 존과의 아이가 아니라 매기가 원래 가지려 했던 ‘가이’의 정자 기증을 통한 아이라는 것이 암시되며 매기의 원래 계획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각자가 자신의 운명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운명은 정해져 있었으니, 결국엔 매기가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흘러간 것이 되었고, 그러니 우리의 운명은 모로 가도 정해진 대로 흘러간다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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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생각해 보면, 운명을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매기가 줄곧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 계획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매기가 처음에 계획한 대로 릴리를 가지게 된 건 운명 때문이 아니라 매기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인물들의 관계가 꼬였다가도 제자리로 돌아온 것도, 매기가 계획한 것에 대해 노력한 결과니까 말이다. 꽤 많은 실수를 거쳐오긴 했지만.

 

마지막에 친구 ‘펠리시아’는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 평화롭게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매기에게 ‘네 덕인지 운명의 힘인지는 모르는 거야’라고 말한다. 정말, 릴리가 태어나고, 한여름 밤의 꿈처럼 금방 타올랐다 금방 식어버린 존과의 결혼 생활을 잘 끝낼 수 있게 되고, 마찬가지로 한여름 밤의 꿈처럼 이상했던 그 계획이 모두가 평화로운 결말로 끝나게 된 모든 것이 과연 세상이 정해준 운명 덕일까, 매기의 계획 덕일까.

 

그러니까 매기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속에서 마법에 걸려 우왕좌왕하는 네 명의 연인 중 하나였던 걸까, 장난꾸러기 요정 퍽이었던 걸까.

 

어느 쪽인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영화 초반에 가이가 했던 말이 산뜻하고 의미 있게 다가왔다. 가이는 수학을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고 지금도 좋아하지만 피클 사업을 하고 있는데, 수학을 좋아하는데 왜 수학자가 되지 않았냐는 매기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수학이 아름다워서 좋아한 것뿐이야. 수학자가 될 생각은 없었어.

누구든 수학의 옷깃만 만져도 그 아름다움을 느낄 거야.

난 옷깃으로 충분했어. 좌절감을 감당할 수 없었거든.

전체를 볼 방법이 없으니까.

늘 전체의 일부만 어렴풋이 볼 뿐이지. 평생 진리의 조각만 찾아다니는 삶이잖아.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수학이 인생과 같다는 가이의 말이 어떤 말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수학이 그렇듯, 인생도 아름답지만 전체를 볼 방법이 없고, 그 일부만 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 좌절감과 함께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이가 여전히 수학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듯, 우리가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아간다면 충분하다는 것을 가이의 이 대사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

 

운명이 정해져 있든 아니든, 모르는 것투성이인 우리의 인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며 살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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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아.

상자에서 죄다 꺼냈다가 도로 넣을 수 없어.

 

토니가 존을 다시 조젯에게 돌려보낸다는 그 계획에 관해 이야기하며 한탄하던 매기에게 한 이 말처럼, 인생은 우리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남의 인생은 물론 우리의 인생도 매기처럼 무리하게 퍼즐 맞추듯, 정해진 대본 대로 연극을 진행하듯 우리의 뜻대로 만들어낼 수 없다.

 

매기가 갑자기 존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존과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싶어 조젯과 작전을 짰는데도 그 작전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것에 마음 아파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에는 딱 예상할 수 있는 것, 정해져 있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는 못해도, 나조차도 예상할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을 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대해 절망도 하고 사랑도 하며, 이 거대한 인생 속에서 내가 내 의지대로 살아가겠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완벽하지는 못해도 가이가 수학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어느 순간 엉망이 되어버려도 그 난장판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내 인생 속에서 계획을 하나하나 실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잘 이뤄질지 미끄러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을 계획에 끼워 맞추려 하지도, 그렇다고 모든 것에서 손을 떼지도 말고, 나의 의지대로 말이다. 


어쨌든, 생각해 보니 매기는 연인들도 퍽도 아닌 그냥 현실의 매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 3년은 마법이나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고, 눈이 녹았고, 비눗방울에서 나왔고, 현실을 직시했을 뿐.

 

히폴리타 : 하지만 간밤의 자초지종을 다 듣고 그들의 마음이 한꺼번에 바뀐 것을 보면,

이건 사랑의 환상 이상의 뭔가가 있어서 엄청나게 일치하는 순간에 이르렀다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놀랍고 이상한 일이에요.

5막 1장 / <한여름 밤의 꿈>, 윌리엄 셰익스피어


*


나의 인생에 내가 얼마나 끼어들어야 할까?

이 계획이 맞는 걸까?

내 인생이 갑자기 이렇게 바뀌어도 되는 걸까?

 

가볍고 밝은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이야기지만, 배우자 없이 혼자 아이를 갖고자 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에 대한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단 해보자’ 같은 추진력과 용기가 아주 많이 부족한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들 중 하나는, 어떤 부분에서는 나와 닮은 매기가 엉망으로 꼬여버린 상황을 엉망으로 보이는 계획으로라도 어떻게든 풀어보려 하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보다는 그 이상한 계획이 왠지 잘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실행했던 그 무모함이,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지에 대한 고민을 조금은 더 단순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내 인생은 나에게 달렸지만, 그리고 분명 인생은 복잡하지만, 적어도 나의 그 복잡한 생각보다는 단순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래서, 만약에 존을 조젯에게 되돌려보낸다는 그 작전이 잘 풀리지 않았더라도, 매기의 그 이상한 계획은 시도해 볼 만한 계획이었다,라고 말하고 싶다. 뭐라도 해본 거니까.

그러면 어떻게든 되었을 거고, 적어도 제자리는 아닐 테니.

 

모든 사람들이 매기의 발걸음처럼 씩씩하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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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 밤의 꿈>의 오베론과 히폴리타의 대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지식출판원'의 번역본을 참고하였다.

 

 

[강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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