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장마를 닮은 로맨스 - 뮤지컬 '카르밀라'

글 입력 2024.07.20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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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카르밀라'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뮤지컬 카르밀라_메인포스터.jpg

 

 

 

뻔한 듯 새롭다, '카르밀라'의 클리셰 비틀기


 

지난 금요일, 정말 간만에 혜화를 찾았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궁금했던 작품 하나를 보기 위해서였다. 소중한 금요일 저녁을 할애하게 만든 작품은 바로 뮤지컬 '카르밀라'. 매혹적인 뱀파이어 소녀와 순수한 인간 소녀간의 사랑을 그려냈다는 극 소개를 보고 꽤 특이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짙은 캐릭터성 때문에 메이저한 콘텐츠(특히 '실사'의 영역)에서는 생각보다 보기 힘든 것이 바로 뱀파이어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로맨스나 서브컬쳐 장르의 문법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작품의 막이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경우에 따라 인물 소개 및 시놉시스만 읽고도) 다음과 같은 감상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흔히 장르물이라고 부르는 콘텐츠들을 자주 접해왔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르밀라'의 전개 방식은 따지자면 클래식에 가깝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홀로 꿋꿋이 살아온 인간 소녀 로라, 불멸의 삶을 끝마치려는 순간 로라를 우연히 마주하고 잊은 줄 알았던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한 뱀파이어 카르밀라, 과거 평범한 인간이었던 카르밀라를 뱀파이어로 만들 정도로 강렬한 집착과 욕망을 가진 뱀파이어 닉. 이 세 캐릭터가 이루는 선명한 삼각 관계는 크게 낯선 것은 아니다.


아픈 기억을 딛고 씩씩하게 살아내며, 햇살 같은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소녀. 그리고 그런 소녀의 아름다운 마음씨와 생명력에 구원 받는 누군가. 사실 정말 오랜 시간 로맨스의 문법으로 쓰이다 못해 거의 클리셰로 여겨지다시피 하는 구조다. 삼각관계를 그린 작품 역시 셀 수 없다. 오랜 시간 탄탄하게 쌓인 사연과 감정선으로 이뤄진 '메인' 커플링, 그리고 그런 관계에 긴장감을 부여하며 극의 자극을 더하는 '서브' 커플링. 지고지순한 순애보 같은 사랑과 집착 섞인 애증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린 작품은 아마 누구든 여럿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뱀파이어물의 고전격(어쩌면 효시)에 해당하는 원작 소설을 재해석한 것이니, 그런 경향을 띨 수밖에 없다는 점을 어느 정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정론에 가깝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카르밀라'의 매력은 바로 그 부분에 있다. 작품은 크게 머리 아플 일 없는 익숙하고 친절한 서사를 가졌지만(나는 그것이 장점으로 느껴졌다), 동시에 그것을 소화하는 인물들의 구성에 약간의 변주를 줌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감상 포인트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르밀라_공연사진 (1).jpg

 

 

그 변주들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자, 내가 극을 보기로 결심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온갖 감정으로 얽히고설키는 인물들이 주로 여성이라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카르밀라'는 4인극 구성이다. 앞서 언급했던 세 명의 여성 캐릭터, 그리고 로라와 마을 사람들을 흡혈귀로부터 지켜내려는 슈필스도르프가 등장인물의 전부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스케일 큰 규모의 작품에 비해 캐릭터 하나하나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극을 이끌어가는 힘은 특히 앞의 셋에게 집중되어 있는 편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도, 증오하는 것도, 여타 복잡한 감정들에 휩싸여 고뇌하는 것도 모두 여성 캐릭터들이다. 기성 창작물에서 여성을 그저 주인공의 각성을 돕는 히로인이나 욕망의 대상 정도로 그려내던 기조에 대한 지적이 있은 지는 오래지만, 복잡한 내면을 가지고 행동하는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다.

 

물론 전형적인 인물상이라는 감상도 있을 수 있겠지만, 기성 작품에서 여성을 다루던 방식의 전형과는 조금 다른 의미의 전형일 뿐더러(특히 카르밀라와 닉의 캐릭터성은 주로 이성 간의 로맨스를 다루는 작품에서 '남성' 주인공들에게 부여되던 속성이다) 오히려 클리셰적이기 때문에 유의미한 부분도 있다. 여성 간의 사랑을 다룬 작품 하면 흔히 떠올리는 진지한 분위기와 깊이감 같은 것이 있지 않나. 여타 로맨스 장르처럼 설레는 마음을 품고 즐기기에는 부담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성의 삶, 그리고 퀴어의 삶이 가진 현실적 속성들에 주목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지는 당연히 아니지만(실제 퀴어와 장르로서의 퀴어물에 대한 섬세한 논의 역시 필요하다), 로맨스 그 자체에 집중하고픈 감상자들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작품에 대한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이야기를 여성 캐릭터들로 접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은 '비전형성'으로 기능하는 듯하다.

 

 

04. 뮤지컬 카르밀라_유주혜 이재림.jpg

 

 

또 단순히 성별 반전뿐만 아니라, 모든 캐릭터들에게서 나름대로 클리셰의 변주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 역시 '카르밀라'의 감상 포인트다.

 

사실 극중에서 로라는 언니, 엄마, 친구에게서 느끼는 다양한 종류의 유대감을 모두 느낄 수 있을 만큼 깊은 '우정' 관계로 자신과 카르밀라 사이를 정의한다. 소녀들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조금 의아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우정과 사랑의 이분법에 딱히 동의하는 편은 아니지만, '사랑'이라는 표현을 콕 집어 사용하는 건 보통 성애적 감정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연애 감정'을 지칭하기 위해서이지 않나.

 

그래서 우정을 언급하는 로라의 대사를 듣고 순간 아차 싶었다. 사랑인지 우정인지 모호할 만큼 진한 관계, 하지만 우리는 정말 죽고 못 살 사이라며 애매하게 에두르는 것 정도가 최대 표현인 작품에 또 속은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르밀라라는 캐릭터는 절대 관객을 헷갈리게 두지 않는다. 카르밀라는 대사와 넘버를 통해 로라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며 아주 단단히 못박아준다. 극 중반 카르밀라가 손을 다친 로라의 피를 빠는 장면, 결말부에서 굳이 로라의 목덜미를 물어 피를 빠는 장면에서는 아주 익숙한 텐션이 느껴진다. 그 텐션이라 함은, 역시 일반적인 로맨스물의 '심쿵' 장면에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것이었다.

 

닉 역시 흥미로운 캐릭터다. 내가 공연을 봤던 날 배역을 담당했던 민도희 배우의 귀여운 비주얼, 낭랑한 목소리 톤이 영향을 미친 부분도 있을 테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카르밀라를 꼬박꼬박 '언니'라고 부르며 동생 역할을 수행하는 캐릭터가 사실은 엄청난 힘과 집착의 소유자라는 설정은 상당히 재미있다.

 

덧붙여 닉과 카르밀라의 관계를 단순히 일방적인 것으로 요약하기는 어렵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겉보기에 '카르밀라'는 여느 로맨스물의 도식처럼 닉이라는 장애물을 물리치고 두 주인공이 행복한 결말을 쟁취해 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뜯어 보면 닉을 극의 진행을 위한 기능적 캐릭터로만 간주하기에는 어려운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03. 뮤지컬 카르밀라_유주혜 민도희.jpg

 

 

물론 닉의 감정이 폭력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로라와 카르밀라, 닉과 카르밀라가 이루는 관계 모두 한때는 인간이었던 존재와 뱀파이어가 만나 성립된 것이라는 유사점이 있지만, 각각의 결말이 그토록 대비되는 것은 그 관계의 출발점이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해 스스로 인간의 삶을 버린 로라와, 억지로 뱀파이어가 된 카르밀라는 절대 동일선상에 놓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닉은 '우리 같은 곳을 바라보던 순간 아무 의심 없이 행복했던 그때로...'라며 자신과 카르밀라의 관계가 한때는 아름다웠음을 노래한다. 정말 이 넘버는 그저 닉의 편향된 시각을 보여주기만 하는 것일까. 로라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기 이전, 100년이 넘는 세월을 닉과 함께하는 동안 카르밀라는 저주스런 뱀파이어의 삶을 살게 한 장본인이라며 닉을 한순간도 빠짐없이 혐오하기만 했을까.

 

카르밀라는 뱀파이어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알면서도 왜 닉을 살해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은 걸까. 왜 오랜 세월 닉의 곁을 떠나지 못한 걸까. 물론 극은 그 이유를 뚜렷이 설명해주지 않고 관객들이 자유롭게 공백을 채울 수 있도록 했지만, 카르밀라가 닉에게 느낀 감정이 단순한 증오보단 '애증'에 가까우리라는 것이 개인적인 추측이었다. 닉이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것과 카르밀라의 목숨이 닉에게 종속되어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납득이 어려웠다. 물론 이런 애증 역시 폭력이 빚어낸 결과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카르밀라의 지난 세월을 그렇게만 요약하는 것이 오히려 그를 평면화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01. 뮤지컬 카르밀라_전민지 박새힘.jpg

 

 

로라 역시 겉보기엔 전형적인 '햇살형' 캐릭터 같지만, 어딘가 전형을 벗어나는 면모가 분명 있다. 먼저 로라의 밝음은 이중적이다. 로라가 아버지를 잃고 마을 사람들에게서 고립된 채 살아왔어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복합적이다. 타고나길 긍정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한편으로는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과거의 기억을 봉인해두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자신과 카르밀라 사이에 여러 종류의 관계를 투영하는 모습에서는 로라의 지독한 외로움이 엿보이기도 한다. 만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낯선 이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끼다 못해 영원을 약속하는 건, 일반적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애착이다. 과거의 짧은 만남을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한눈에 반한 연인들이 사랑에 자신을 내던지는 모습은 익숙하지만, 로라가 카르밀라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그런 연애감정으로 정리해내기는 어렵다(물론 그런 설렘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도 있다. 기본적으로 로라는 카르밀라를 보고 몇 번이고 '아름답다'는 감상을 내놓는다).

 

로라가 우정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은 오히려 그 감정의 지독함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평생 제대로 된 관계를 맺어보지 못하고 혼자였던 로라가, 처음으로 타인과 연결되었다는 감각을 느낀 것이다. 그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천천히 배워나갔어야 할 감각이지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언제나 혼자였던 로라에게는 그럴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한순간에 몰려드는 수많은 감정 앞에서 로라가 자신의 마음을 서툴게나마 인식하는 방식이 바로 그런 우정의 언어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로라는 결국 카르밀라와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인간성을 포기하기까지 하는 비범함을 보여준다. 로라의 선택으로 완성된 쌉싸름한 엔딩은 카르밀라의 '비틀기'를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전형적 로맨스의 전형적 해피엔딩이라기에는 어딘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로라와 카르밀라의 결말은 닉의 죽음을 딛고 완성된 것이기에 마냥 산뜻할 수 없고, 불멸의 삶에 대해 염증을 느끼는 카르밀라의 면모가 극중에 여러 차례 표현되었던 만큼 앞으로 이들의 나날이 반드시 행복하리라 장담하기도 어렵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꽉 닫힌 결말 앞에서 푹 안심하는 대신, 그들을 위한 축복을 빌어주는 것 정도가 최선이다. 뱀파이어를 처단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졌지만, 그 사명을 거슬러 카르밀라와 로라의 존재를 인정하고, 오히려 축복을 빌어주었던 사제 슈필스도르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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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밀라와 로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던 안개 자욱한 이 성의 모습처럼, 사실 밝지만은 않고 꽤 질척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걸어나가던 둘의 뒷모습이 무척 아름다워 보였던 건, 앞으로의 두 소녀가 함께 세상 곳곳을 누비는 모습이 눈에 선연했던 건 어째서일까. 그들 앞에 놓인 불멸의 운명처럼 우리의 마음도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사랑과 관계에 대한 아름답고 막연한 낙관. 내가 자꾸 모든 종류의 로맨스를 찾게 되는 건 그를 통해 이런 바람들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삶을 뒤흔들 만큼의 강렬한 감정을 마주하리라는 확신이 점점 줄어드는 나날이기에....

 

7월 중순, 장마의 한가운데. 습한 기운이 도처에 깔린 요즘이다. 살갗에 눅눅하게 들러붙을 듯 질척하지만, 그 틈으로 햇살이 언뜻 보이는 것 같은 이 이야기를 통해 잠시 숨을 돌려보는 건 어떨까. 때론 적당히 녹아든 어둠이 마냥 밝은 빛보다 더욱 납득하기 쉬운 법이다.


 

 

황수빈.jpg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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