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상의 모든 아침을 맞이하는 당신께 [영화]

글 입력 2020.08.2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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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음악의 끝은 죽음이라네. 난 사기꾼일세. 아무짝에도 소용없고 이룬 게 없어. 감미롭고 화려해도 부끄러울 뿐이야. 하지만 그는 음악 그 자체였지. 그는 불꽃같이 세상을 보고 저세상을 밝혀주었지. 그의 열망은 가늠할 수 없었네. 그런 스승님이 계셨다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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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은 17세기 프랑스의 뛰어난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생뜨 콜롱브와 그의 제자 마랭 마레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이다. 영화는 늙은 마랭 마레가 궁정악사들 앞에서 자신의 스승에 대해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17세기 프랑스의 뛰어난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생뜨 콜롱브와 그의 제자 마랭 마레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특히, 프랑스의 알랭 코르노 감독은 원작자인 파스칼 키나르의 각본으로 1992년,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을 제작했다. 장 피에르 마리엘은 스승 생뜨 콜롱브 역할을 맡았고, 프랑스의 국민배우 제라르 뒤빠르디유는 마랭 마레 역으로 출연하였다. 두 음악가의 대비되는 삶과 그로 인한 갈등이 영화의 주 내용이며, 음악은 주된 스토리를 보다 탄탄하게 지배한다.

 
한편,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은 프랑스의 중심부에서 벗어난, 교외의 한적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시기였던 17세기 중반, 비올라의 거장 생뜨 콜롱브와 그의 제자 마랭 마레의 일대기를 그린 이 영화의 장소는 초야, 혹은 험한 곳이라 표현된다.
 
거기에 따른 옷차림과 꾸밈새도 공간을 짐작케 하는데, 인물들은 당대 프랑스의 태양왕이라 불렸던 루이 14세의 옷차림과는 달리 비교적 화려하지 않은 옷을 입고 있으며 평범한 일상복 차림이거나 그보다 못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왕과 귀족들의 사치로부터 꽃피웠던 세속적인 문화와는 달리, 화려한 삶을 거부하고 잔잔한 분위기 속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치 있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영화 장면의 주를 이루는 것이다.
 
이렇듯, 향락과 사치를 추구하던 루이 14세가 집권한 당대의 프랑스에는 또 다른 세계의 단면이 펼쳐져 있었다. 이때, 비올라의 거장인 주인공 생뜨 콜롱브는 일생을 교외의 시골 마을에서 보내며 왕의 부름조차 거절한 채 묵묵히 살아가는 '또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일명 사치의 세계에서 탐내는 뛰어난 연주자였는데도 아내의 사망 후 외부와 단절한 채, 두 딸에게만 악기를 가르쳐주며 말 그대로 소소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되던 어느 날,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인 마랭 마레가 음악을 가르쳐주라며 대뜸 생뜨를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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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랭 마레와 마들린

 

 

마랭은 열의에 차 있었고 생뜨의 제자가 되고 싶어 했다. 진중히 음악을 다루는 그의 면모를 진심으로 닮고 싶어서였을까,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마랭 마레가 음악을 배우고 싶어 했던 진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바로, 명예를 얻고 큰돈을 벌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화려하고 낭만적인 삶 그 자체를 원한 것이었다.

 

그는 콜롱브에게 음악을 배웠지만, 정작 이목이 쏠리는 큰 궁중 무대에서의 연주 생활을 스승님 몰래 이어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면에 가려진 진실을 알게 된 생뜨에 의해 당장 쫓겨나는 신세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마랭의 재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탁월했고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이 돋보였기에 촉망받는 신예나 마찬가지였으나, 음악에 대한 그의 태도는 스승의 마음가짐을 충족해주지 못했음을 암시해준 장면이었다.

 

생뜨가 정의한 예술의 기준에서, 마랭은 진정한 음악이 무엇인가를 일깨우지 못한 채 그저 흉내 내기에 불과한 태도로만 연주자의 생활을 지속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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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로서 성공한 마랭 마레

 
 
상반된 가치를 추구하는 바람에 마랭은 쫓겨났지만, 결국 그는 훗날 연주자로서 성공한 인생을 살게 된다. 사실, 이상적인 인생을 살기까지 그는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야 했고 포기와 선택을 반복했다. 즉, 자신이 원하던 삶의 이상향을 찾아 떠나는 것과 연인 사이였던 스승 생뜨의 딸인 마들린과의 관계, 그리고 멘토에게 미운털이 박힌 본인의 상황을 헤쳐나갈 최적의 방법들 사이에서 말이다.
 
하지만 마랭은 사치스러운 인생을 더 원했고, 자신이 설계한 삶의 이미지에 특별한 애착을 가졌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멘토로부터 쫓겨난 상황 속에서도 망설임 없이 사랑하는 마들린을 내버려 둔 채 궁중 생활에 빠져든다. 이기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다. 앞뒤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선택은 누군가를 아프고 고되게 한다. 그 대상은 바로 마들린이었다. 그가 떠난 후, 마들린은 아이를 사산하는 아픔을 겪고 비극적인 상황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한다.
 
마들린의 눈물은 아버지인 생뜨에게 또다시 전해졌다. 이후, 생뜨는 딸의 죽음에 오랫동안 말을 잃었고 음악도 곁에 두지 않았다. 그에겐 음악보다 딸의 존재가 더욱 소중했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였다. 이 지점에서 마랭과 생뜨의 대립적인 인생관이 다시금 선명하게 드러남을 느꼈다. 인생관의 차이 이전에, 어쩌면 사람과의 관계에 얼마나 큰 무게를 두는지에 관한 가치의 차이라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생뜨의 슬픔이 침묵 속에 저절로 스며들어 전해져오는 듯했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의 태양이 아니듯이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마들린의 죽음을 전해 들은 마랭 역시, 생뜨도 슬픔에 잠겨 그녀처럼 스스로 목숨을 저버릴까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걱정했다. 그러나 사실, 마랭은 생뜨를 걱정한 것 이외에도 그가 연주하던 아름다운 선율의 그 자체도 사람의 존재 못지않게 아끼고 사랑했다. 한편으로는 궁정에서의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스승의 진심 어린 진정한 음악의 향연을 다시금 마주해 듣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었다. 스승이 가르쳐주던 음악의 본질, 그 본질을 궁정 악사로서는 찾을 수 없었던 그는 다시 스승의 품으로 돌아오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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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집을 매일같이 찾아간 마랭
 
 
그렇게 마랭은 간절한 목마름으로 인해 스승의 곡을 들으러 날마다 오두막을 찾아가지만, 연주를 들을 순 없었다. 비올라를 닦는 소리와 알아듣지 못하는 중얼거림만 들려왔을 뿐, 귀를 기울이는 마랭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던 나날이 지속되던 중, 마랭은 스승의 탄식 섞인 혼잣말을 듣게 되고 그 말에 응답함으로써 마지막 가르침을 건네받게 된다. 가치관이 달랐던 두 천재가 만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그렇게, 극적인 순간은 예술에 대한 정의를 자연스레 채워갔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은 생뜨의 고독한 상실감이, 좋은 것만 좇으려 했던 한 사람의 진실한 목소리가 한 데 섞여 공간을 물들이는 듯했다. 전혀 화합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의 진실한 내면이 비올라를 통해 애처롭게 울려 퍼져 어두운 공간을 지배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상반된 삶의 모습을 지녔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예술의 본질과 근원을 찾기 위해 다시 협력하여 나아가는 현장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사랑을 상실한 사람이 모여 복합적인 감정을 노래하는 움직임의 과정이 침묵 속에서도 커다란 울림을 만들어냈다. 예술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표본이 하나의 극적인 장면으로 탄생한 느낌이랄까. 오두막 안은 서로에게 품고 있었던 오해와 잘못을 모두 용서하고 상황 자체를 겸허히 받아들이려 하는 신성한 장이었다. 음악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음계가 곧 대사였고 감정은 끊임없이 교류되었다. 그렇게, 대사보다는 묵묵한 움직임으로 시공간을 지배하는 장면에 자연스레 이끌렸고 집중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상황이 일어났던 것이다.

 

 

 

헛되지 않은 움직임의 향연 : 예술의 본질을 찾아 나가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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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지친 자를 위한 휴식일세. 길잃은 아이를 위한, 구두장이의 망치 소리를 잊기 위한, 우리가 태어나기 전 생명도 없고 빛도 없던 때를 위한...

 

 

또 한편으로, 예술의 본질과 근원을 찾아 나가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에서 주목해볼 만한 소재는 바로 '촛불'이다. 촛불은 아주 작지만 어둠을 훤히 밝히는 빛의 도구로서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영혼의 교감이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는 공간적 특성을 제공해준 요소이자 영화의 주제성을 명쾌히 설명해준 빛이라 할 수 있겠다. 환한 빛을 품고 있는 촛불이 어둠을 밝혀줄 때면, 보이지 않던 그 무언가도 먼발치에서 살그머니 걸어 나와 선명히 나타난 채 나에게 손을 흔드는 것처럼.

 
촛불은 영화의 전반적인 장면에 등장하며 주체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그늘지고 어두운, 적막에 싸인 공간의 분위기를 묘사한다. 그러한 공간에 대조적으로 놓인 촛불은 명상적이고 초연한 태도를 지니게 하며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감정과 표정, 대사에 주목하도록 유도한다. 진실한 내면을 꺼내 보여주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마치 당대의 조르주 드 라 투르의 회화에 내재한 촛불과 상통하는 의미로써 나타난다.
 
그 소박한 불은 비올라 연주와 어우러져 분위기의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생뜨 콜롱브의 음악 세계에 집중하게 해 그가 살아온 삶을 형상화해준다. 한편, 부인에 대한 기억의 회상으로 자주 등장하는 은은한 초의 불빛은 환영을 만들어내 그녀를 그리워하는 콜롱브의 감정을 극대화하고, 그 환영 뒤 자리 잡은 그림자는 잔상을 드러내어 주인공의 어둡고 슬픈 내면을 부각한다.
 
특히 화가 보긴에게 아내의 환영이 드리워졌던 공간의 정물화를 의뢰한 뒤, 완성된 그림을 보며 감정을 추스르는 장면에도 촛불이 등장한다. 영화의 초반과 후반부에 부인과 마들린이 죽음을 마주하기 전 그들의 옆에는 반드시 촛불이 존재하는데, 이는 불타는 생명이 저버릴 것을 암시하고 그때까지의 생을 애도하는 의식적인 수단으로써 불빛이 사용됐음을 파악할 수 있다. 마침내 스승과 제자의 비올라 연주가 성사되고, 둘 사이의 촛불이 비로소 그들을 하나로 이어주며 마지막 장면을 완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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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사색이 담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죽음과 현실의 경계에 대해 사유하게 하며 인물들의 삶을 고찰하게 했다. 생뜨 콜롱브는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주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게 진정한 음악이라고 줄곧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마레를 혹독히 가르치며 마침내 음악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그렇게 완성된 마지막 장면을 보며 예나 지금이나 위로와 울림을 주는 예술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음을 다시금 느꼈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전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순간이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라는 영화의 명대사는 긴 여운을 남겨준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은 영원할 것만 같았던 관계의 끈을 무참히 짓밟아버린다는 걸 생뜨의 아내와 딸인 마들린의 죽음에서 생생히 보게 된 순간, 긴 여운이 나에게로 자리했다. 더불어,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 있어 최선을 다하면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려는 나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 역시 잃지 않으려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 중

 

 
우리는 오늘도 아이러니하게 죽음으로부터 희망적인 삶의 메시지를 전해 받으며 각성한다. 눈 깜짝할 새 변하는 우리들의 삶, 필름처럼 이어진 하나의 삶을 이루는 하루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런 삶으로 채워진 의미 있는 죽음을 운명의 때에 맞이하는 것. 이러한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진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또 기억하며 살아가려 한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기에.
 
 
TO. 세상의 모든 아침을 맞이하는 당신께.
 

 

 세상의 모든 아침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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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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