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69세, 여성, 노인 [영화]

영화 '69세'
글 입력 2020.08.23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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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특히 성범죄를 다룬 영화는 보기 전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가해자의 극악무도함을 보여주겠다는 미명에 취해 피해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실제 범죄만큼이나 폭력적인 영화가 널린 탓이다.

 

웰메이드 독립영화라는 타이틀을 얻은 영화 '한공주'도 피해자가 무력하게 당하는 표정을 강조하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에서도 피해 동물의 처절한 울부짖음을 시•청각 요소 모두를 활용해 보여준다. 이런데도 감독의 연출이, 디테일이, 메시지가 좋다며 칭송하는 세상. 어쩌면 성범죄를 포르노처럼 다루지 않는 영화가 전혀 없다시피 해서 보고도 느끼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아주 느리게나마,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걸까. 영화 <69세> 같은 연출이 나올 수 있는 것을 보면.

 

 

1차 포스터 01.jpg

 

 

*

스포가 있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은 69세 노인, 효정이다. 늙었다고 무시하는 세상에서 꿋꿋이 살아남기 위해 효정은 자신을 정갈하게 다듬는다.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 다정한 언행, 부드러운 미소, 나이에 비해 젊고 맑은 느낌. 사건은 이 효정이 여성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시큰한 무릎 때문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효정. 그 노인을 치료하던 29세 남자 간호조무사. '다리가 예쁘시다'며 품평하곤 '불쾌하셨다면 죄송하다'고 자신의 저의를 숨기려 든다. 숨막히고 불편한 분위기를 피하려는 듯 효정이 멋쩍게 '괜찮다'고 답하자, 남자는 효정의 인격을 무시한 채 성범죄를 저지른다.


영화는 이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다. 심지어 보여주지도 않았다. 대화 소리는 어둠 속에서 펼쳐졌다. 그 후, 짧은 컷 몇 번과 불빛으로 사건이 발생했음을 관람객이 인지할 뿐이다. 상황을 표현하기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열 컷도 되지 않은 짧은 흐름에 완전히 감명받았다.

 

그리고 의문이 이어졌다.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외침, 가해자가 내뱉는 소리, 눈빛, 표정, 말, 행동은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했던 것인가. 성범죄를 자극적인 소재쯤으로 다뤘던 '예술가'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드는 생각은 하나다. 자신에게는 절대 일어날 수 없으리라 생각해서 일차원적인 생각에 그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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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자면, 효정은 그 일이 생긴 후 경찰서로 찾아간다. 함께 동거하는 남자와 함께. 경찰의 반응은 예상대로다. 효정이 고소하려는 남자가 20대라는 파일을 확인하자, 곧바로 핀잔을 준다. 젊은 남자가 늙은 여성을 상대로 그럴 리 없다며. 이 한마디로 두 가지 생각을 알 수 있다. 젊은 여성을 상대로는 성범죄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 즉 늙은 여성은 성적 대상이나 표적이 될 수 없다는 생각. 생각이 아닌 착각이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지함을 보여주는 말이었다.

 

이 말로 상처 받는 건 또 사건의 피해자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경찰서에서 2차피해를 받는 일이 상당하다. 가해자의 잘못에 혀를 차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본인도 인지하지 목한 채 화살을 피해자에게 쏜다. 인지나 공감 능력이 없는 자신의 무지함을 안다면 그 입을 다물 줄은 알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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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장 접수로 처벌에 가까워질 거라는 기대는 구속영장이 몇 번씩 기각되며 사그러진다. 애초에 효정은 기대를 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늙은 여성은 그런 일을 당할 리 없는 존재로 간주된다. 경찰의 태도, 동거인도 자신을 의심했다는 사실로 효정은 뼈저리게 느꼈을 거다. 젊은 남자가 늙은 여성에게 성욕을 느낄 수 있음을, 자신이 성적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합의가 아닌 강압적 행위였음을 증명해야 한다.


특히 강압적 행위를 증명하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성범죄 피해자가 가장 난항을 겪는 문제다. 사건의 강제성을 증명하는 것은 정액의 흔적을 증거품으로 제출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붉어진 손목이나 피해자의 진술은 가해자가 무고할 수 있다는 가능성보다 중요치 않다고 여겨진다.

 

하물며 피해자가 불편한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하거나 괜찮은 척하며 애쓰는 행동은 가해자가 무고할 가능성에 대한 증거로 작용한다. '피해를 당했으면 이런 말투,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판별로. 이는 한 번도 성범죄의 위협을 느끼지 못한 자, 피해 상황에 공감하지 않아도 되는 자들이 높은 자리에 포진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생각은 법에 담겼고, 법의 생각은 상식으로 통용된다.


이제 영화의 형식과 구성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전체적으로 스토리 전개가 탄탄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메세지가 알듯 말듯 흐릿했다. 노인 여성 인권의 현주소를 말하고 싶었던 건지, 이런 세태를 비판하고 싶었는지, 관심을 촉구하고 싶었는지.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서 포인트가 흐려졌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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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과 별개로 스토리만 평하자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명확하게 짚었으면 하는 부분이 두루뭉술하고, 비중이 적어도 좋았을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어, 효정보다 효정의 동거인이 사건을 더 상세히 다룬다. 이 점은 사건 당사자로서 겪는 난항에 지쳐 적극적인 개입이 어려워진 것일 수 있다. 다만 효정은 거의 포기한 것처럼 보였는데 금세 굳은 의지를 다진 모습으로 바뀌었다. 심정의 변화를 추측할 순 있지만, 효정의 생각을 담아내는 과정이 생략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여기서부터 엔딩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급작스러웠다.

 

효정이 자신의 이야기를 인쇄해서 옥상에 두고, 종이들이 바람을 타서 세상에 퍼지는 모습은 좋았다. 다만 글에 담긴 내용은 문학 책에나 나올 법한 감성적인 글이었다. 전개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 선택이었다고 본다. 사건의 경과를 모호하게 다루는 것이 감독의 의도였을 수도 있겠다. 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일이 얼렁뚱땅 전개되는 느낌을 줄이는 게 도움 되지 않았을까.


피해자의 의중은 모호한데 가해자의 설정은 지나치게 세세했던 점도 지적하고 싶다. 나이, 사는 곳, 성격, 집안까지. 적은 비중인데도 가해자에 관한 정보가 많았다. 가해자보다 효정의 생각, 느낌, 가치관이 궁금했기에 아쉬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어찌 보면 좋은 말보다 지적이 더 많은 리뷰이다. 이토록 쓰라린 말을 뱉었던 이유는 영화를 인상 깊게 보았기 때문이다. 별로라고 느낀 영화는 길게 떠들 이유도 없다. 더 발전할 가능성이 크기에 이것저것 말을 얹고 싶어진다.


임선애 감독의 영화가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졌으면 싶다. 앞서 말한 세심한 연출은 물론, 카메라에 담긴 시선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바스트샷을 잡을 때 헤드룸이 아주 좁게나마 대부분 있던 것도, 컷이 적은 만큼 한 컷을 길게 잡는 것도, 화면 한쪽에 인물을 두고 여백을 배경으로 채우는 것도. 유난히 좋아하는 사진 구도가 있는데 이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를 본 기분이랄까.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예술가가 있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어떤 소재로, 어떤 문제의식으로, 어떤 인물로 차기작이 나올지 기대해본다.

 

 


 

 

6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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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임선애


출연

예수정, 기주봉, 김준경, 김중기, 김태훈


장르

드라마


제작

㈜기린제작사


배급

㈜엣나인필름


러닝타임

100분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일

2020년 8월 20일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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