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트콤 속 성 차별적 욕망 구조 찾기 [TV/드라마]

데리걸즈가 내 인생 시트콤이 된 이유
글 입력 2020.08.0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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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누가 '넷플릭스에서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가 뭐야?'라고 물으면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세계 최대 사이트라고 불리는 넷플릭스, 그중에서도 넷플릭스 헤비 유저인 내가 수많은 후보군 중에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를 하나 꼽기란, 문과 출신인 내가 이과 수학 문제를 푸는 것만큼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누군가가 저 질문을 하면 선뜻 말할 수 있는 드라마가 생겼다. 바로 데리걸스다. 1990년 북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는 이 드라마를 2020년 한국에 사는 내가 어떻게 인생 시트콤으로 꼽을 수 있었는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인 데리걸스의 매력을 지금부터 말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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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영국은 종교적, 역사적 문제들 때문에 자주 내전을 겪었다. 특히 데리걸스의 배경이 되는 북아일랜드 지역은 영국에 잔류하려는 개신교도 세력과 독립을 원하는 가톨릭 아일랜드 세력과의 갈등이 심했다.

 

특히 드라마의 제목 '데리'는 이들이 사는 지역 이름으로, 가톨릭계 사람들은 데리라고 부르고 개신교계 사람들은 런던데리라고 부를 정도로 갈등의 중심에 있던 지역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와 같은 갈등을 중심 소재로 다루지 않는다. 물론 이들의 대사나 에피소드에서 내전 상황이 뚜렷하게 등장하지만, 이것들은 각각의 에피소드 진행에 도움을 주는 보조 소재로만 등장할 뿐, 중심 소재는 주요 인물 5명의 학창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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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뉴트로'가 유행인 요즘. 영국 청춘들의 트렌디하면서도 낭만적인 학창 생활을 기대했다면 이 시트콤이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이 시트콤은 이국적인 영국의 레트로 감성을 담은 드라마라기보다는 이들의 엉뚱하고 때로는 골치 아픈 일화들을 나열해 놓은 드라마다.

 

감이 잘 안 오는 분들을 위해 내용을 살짝 스포해보자면, 1화에서는 가톨릭 여학교에 전학 오게 된 남학생 제임스가 남자 화장실을 찾다가 결국 오줌을 참지 못하고 교실 휴지통에 볼일을 보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상상만 해도 아찔해지는 사건들이 이들의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사실, 넷플릭스에는 '데리걸스'와 매우 유사한 시트콤이 이미 업로드되어 있다. 바로 '인비트위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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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트위너스는 극단적인 성향의 중간에 있는, 평범한 것들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한다. 의역하자면 '평범한', '애매한'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학생들 사이에서 쓰일 때는 범생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기가 많은 사람도 아닌 학생들을 지칭할 때 쓰인다고 한다.

 

하지만 제목과는 조금 다르게 이들은 가는 곳마다 사고를 일으키는 사고뭉치들이다. 이 드라마는 영국의 E4 채널에서 2008년에서 2012년도까지 총 3개의 시즌을 방영했다. 매년 최고 시트콤 상을 받았고, 시즌 3은 시청률 1위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영화까지 나왔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은 드라마다.


이 드라마 역시 학생 신분인 주요인물 네 명의 엉뚱한 학창 생활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학교를 빼먹고 몰래 보드카를 사서 친구 집에서 엉망진창 취하다가 친구의 아버지에게 실수하기도 하고, 술김에 오랫동안 좋아했던 여자애에게 공개 고백을 하기도 하고, 미숙한 운전실력으로 새 차를 타고 나갔다가 차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이들 행동의 동기는 주로 욕망이다. 특히 이성과의 관계는 이들이 엉뚱한 행동을 하는 데에 강력한 동기로 작용한다. 특히 등장인물 '사이먼'은 자신이 짝사랑하는 '칼리'와의 관계를 위해 위협을 무릅쓰고 먼 거리를 운전해 갈 뿐만 아니라, 노숙자의 오래된 구두와 자신의 새 운동화를 바꿔 신기도 하는 등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등장인물들의 욕망은 인비트위너스의 인기 비결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관심 있는 사람에게 눈에 띄고 싶은 욕망, 이 욕망 때문에 엉뚱한 행동을 했던 경험은 보편적인 것으로써, 사람들에게 쉽게 공감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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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모자란 등장인물들이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것을 유머 요소로 삼는 것은 '인비트위너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2007년 부터 2019년까지 총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12개의 시즌을 진행하며 한국에서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팬을 만들어낸 '빅뱅이론'의 가장 첫 화는 페니의 아파트와 같은 건물로 이사 오게 된 레너드가 페니와 마주치고, 페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가 큰 줄기 중 하나가 된다.

 

27년 전인 1994년 첫 방영 됐지만 아직도 넷플릭스 등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희대의 시트콤 '프렌즈'의 첫 화에서도 과거에 '조금 찌질한 친구 오빠'였던 로스가 레이첼에게 관심을 보이는 장면이 유머 포인트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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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사례에 비하면 다소 시즌 수가 많진 않지만, 5시즌만으로도 전 세계적으로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아이티 클라우드'에서도 등장인물 로이가 이성과의 관계를 위해 원하지 않는 '남성 세미 누드 사진 달력'을 찍는 등 전편에 걸쳐 이러한 유머 코드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인비트위너스, 빅뱅이론, 아이티클라우드, 프렌즈에서 자주 반복되는 이러한 유머 코드는 모두 '남성'들이 '여성'의 관심을 갈구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즉 남성이 여성을 욕망하는 구조가 조금의 변형만을 거친 채로 미디어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온 것이다. 그 반복이 이루어지는 동안 여성은 자주 대상화되고, 성차별적인 관점들이 쉽게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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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인비트위너스'에서 '칼리'는 사이먼과 소꿉친구였으며,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 여성으로 등장하는데 칼리의 특징 중 대부분은 '사이먼'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칼리는 살아있는 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사이먼의 욕망을 드러내기 위한, 그리하여 시청자로부터 웃음을 끌어내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진다.

 

빅뱅이론, 프렌즈, 아이티클라우드에서도 이러한 대성화는 물론, 여성 혐오적인 유머 포인트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시즌 후반에는 개선되었을지라도, 빅뱅이론의 등장인물 '하워드'는 또 다른 등장인물 '페니'는 물론 다른 여성 캐릭터들에게 주기적으로 성차별적인 농담을 던지고, 아이티 클라우드에서는 로이를 좋아하는 여성을 '화장을 과하게 해서 울면 조커가 되어 버리는 여자'로 표현하기까지 한다.

 

물론, 각각의 시트콤이 완벽히 여성 혐오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시즌이 진행될수록 초반의 성차별적인 요소들에 대한 반성을 통해 더욱더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캐릭터들과 유머 요소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남성의 욕망이 부각되는 구조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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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걸스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대부분을 여성으로 설정함으로써 기존의 시트콤들이 가지고 있던 구조에 변화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극에서는 10대 여성들의 욕망이 중심이 된다. 그 욕망의 정체는 또래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이성과의 관계에 대한 욕망 등이다. 그 때문에 이전의 시트콤보다 혁신적으로 다르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10대 소녀들이 자신의 욕망을 유쾌하게 표현하는 장면들은 남성 욕망 중심의 극을 보아왔던 시청자들에게 매우 색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실제로 드라마를 본 입장에서 파리 수학여행 비용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하는 일마다 문제를 일으키고, 이를 엉뚱한 방식으로 풀어보려는 소녀들의 모습이나, 남성과의 키스를 위해 엉뚱한 행동을 하는 장면들은 어쩐지 익숙하지만,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장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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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들은 보다 편안한 웃음으로 나를 이끌었다. 언제 성 차별적인 농담이 나올지 마음 졸이며 스크린을 응시하지 않고, 아주 오랜만에 등장인물의 엉뚱하고 유쾌한 행동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10대 시절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인비트위너스' 역시 10대 학생들의 이야기지만, 이성과의 관계를 위한 욕망이 등장인물 대부분의 행동 계기가 되어 쉽게 공감할 수 없었던 반면, '데리걸스'에서는 보다 다양한 욕망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잘나가' 보이고 싶은 욕망, 지금까지 우상처럼 보아왔던 가수를 실제로 보고 싶다는 욕망, 교내 잡지를 멋들어지게 만들어서 모두에게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망 등. '데리걸스' 속 인물들은 로맨틱, 성적 대상을 찾는 욕망도 물론 존재했지만, 그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내 10대 시절의 모습과 더욱 닮아 있었다.

 

물론, 데리걸스가 완벽한 드라마라는 것은 아니다. 처음 '빅뱅이론'이나 '아이티클라우드'를 봤을 때는 지금처럼 성차별적인 요소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데리걸스 역시, 지금은 편안하게 볼 수 있을지라도, 언젠가는 불편한 지점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지금의 데리걸스와 마찬가지로 더욱 안전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가 나올 것임을, 그리고 그것은 프렌즈, 인비트위너스, 아이티클라우드 같은 드라마가 있어 데리걸스 같은 드라마가 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데리걸스와 같은 드라마가 있어 가능했던 일임을 믿어본다.

 



[권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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