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혈연' 아니지만 '유대' 하겠습니다 Part 2 [영화]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는 가족입니다’ 영화 「어느 가족」
글 입력 2020.07.2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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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혈연' 아니지만 '유대' 하겠습니다 Part 1: ‘완벽한 타인에서 엄마가 되기까지’ 영화 「당신의 부탁」과 이어집니다.

 

 

 

1.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는 가족입니다 : 영화 「어느 가족」


 

영화 <어느 가족(Shoplifters, 2018)>은 각자의 사정으로 한 집에 모이게 된 여섯 명이 빈곤한 삶 속에서 하츠에의 연금과 좀도둑질을 바탕으로 그들의 생계를 이어가며 진정한 가족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이다.

 

사회의 그림자 아래서 삶을 꾸려나가지만 결국 나중에는 해체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기도 하다. 비혈연 가족도 충분히 다른 여느 가족처럼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도, 이 가족이 해체될 수밖에 없는 것은 현실의 사회가 이러한 가족의 형태를 아직은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전 편에서 다룬 영화 『당신의 부탁』에 이어서 비혈연 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를 소개하고, 이 소재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일괄편집_아느 가족2.jpg

 

 

(1) 서로를 ‘선택’해서 모인 가족

 

학대를 당하는 유리를 집으로 데려온 뒤 유리 납치 사건이 뉴스에 보도되자 가족들은 유리에게 원래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이곳에 남을지 선택을 맡긴다. 이때 유리는 이 집에 남겠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선택받은 건가?”라는 대사, 하츠에가 아키에게 “나도 널 선택했지”라고 말하는 대사는 이 가족이 혈연 아래 묶인 가족이 아니라 서로서로 ‘선택’해서 이뤄진 구성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표면적으로 이들은 ‘돈’으로 묶여있는 관계이다. 시타바와 노부요는 하츠에의 연금을 수시로 노리는 인물들이고, 좀도둑질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비도덕적 인물이다. 하츠에 역시 아키(전남편 자녀의 자녀)를 이 집으로 데려온 이유가 순수한 목적이 아닌 돈이었음이 드러난다.

 

사회의 시선에서 이들은 실패자로 보인다. 가족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이 가족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뉴스 보도와 경찰의 심문으로 드러나는데, 타인의 시선에서 이 가족 구성원들은 실패자, 유괴범, 살인 전과와 같이 범죄자로 분류된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이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는 동안 진정으로 돈이 아닌 마음이 묶여있는 관계였다.

 

영화는 시바타가 유리(린)를 데려오고 총 여섯 명의 구성원이 한 집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유리가 오기 전에 유일한 아이였던 쇼타가 유리를 여동생으로 인정하게 되는 일, 노부요와 유리가 목욕하며 서로의 상처(아동학대의 흔적)를 보듬어 주는 장면, 모두 함께 집 안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장면과 같이 일상적인 장면들은 이들이 비록 혈연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아니지만,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만큼은 (비록 가족의 생계가 유지되는 방법이 비도덕적이지만)이상적인 가족 관계임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2) ‘이름’으로 나타낸 가족에 대한 욕망

 

이 영화에서 각 인물은 기본적으로 두 개 이상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름을 통해 진정한 ‘가족’에 대한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우선 부부의 본명은 에노키 쇼타/타나베 유코이지만, 이들은 시바타/노부요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여기서 시바타는 자신의 본명인 ‘쇼타’라는 이름을 주워온 아이 ‘쇼타’에게 물려주었다는 사실이 영화 후반부에 드러난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시바타가 후에 쇼타의 한자 이름을 물어보는 병원 관계자 앞에서 ‘쇼타’만을 한자로 말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섬세한 장면을 통해 쇼타에게 자신의 이름을 준 것은 시바타의 의지였음이 드러난다. 이 부부는 ‘아빠’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거나, 시장에서 상인의 ‘어머니’라는 호칭에 미소 짓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부모-자식 관계를 욕망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아키는 불법업소에서 일할 때 ‘사아카’라는 가명을 사용하는데, 이 이름은 자신의 동생 이름이다. 하츠에가 찾아간 아키의 부모님 집에서 아키의 부모님과 동생인 사아카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서 홀로 배제된 아키는 동생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하면서 본인이 그 이상적인 가족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친모로부터 아동학대를 당하다가 이 좀도둑 가족에 들어온 유리의 본명은 ‘쥬리’다(쥬리라는 본명은 유괴 소식이 뉴스에 보도되면서 밝혀진다). 유리는 유괴 소식이 전국으로 보도된 후 주변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린’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된다. 이렇게 3개의 이름은 각각 폭력을 행사하는 엄마가 지어준 이름, 그 가정에서 탈출한 아이가 발화한 자신의 이름, 새로운 가족에 편입된 아이의 이름이며, 어린아이인 린이 훗날 어떤 이름을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이름으로 택할지는 영화에서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 가족들에게 이름이란 어린아이인 린을 제외하고는 각자가 소망하는 이상적 가족에 속하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한 수단이며, 이 가족들의 세계가 깨지는 순간 이들의 이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3) 사회가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가족이 아닙니다

 

성장하면서 좀도둑으로 생계를 연명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쇼타는 일부러 경찰과 연루되고, 자신의 가족들이 사회에 노출되도록 한다. 사회에 발각된 이 가족의 결말은 노부요가 모든 책임을 지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린은 다시 학대하는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며, 나머지 구성원들도 각자의 자리를 찾아 흩어지게 된다.

 

이 가족이 사회로부터 발각되기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 사이의 괴리가 엄청나다. 이러한 괴리감은 우리의 가족개념이 그동안 영화에서 사회(대표적으로 이들 가족을 심문하는 경찰, 대중의 시각)의 시선, 즉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좀도둑 가족들은 혈연이 아니어도 충분히 가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 같이 놀러 간 바닷가에서 노부요와 하츠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주고받기도 한다.

 

 

“피가 안 이어져서

더 좋은 점은 있잖아.”

 

“괜한 기대를 안 하게 되는 건 좋지.

맞아, 그래.”

 

 

이 가족은 결국 해체되어 각자 흩어지지만 시바타를 처음 만났던 베란다 너머를 바라보는 린의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가 끝이 나는 것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린이 짧은 시간 동안 느꼈던 가족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앞으로 학대의 기억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억을 새겨두고 이를 바탕으로 성장해나갈 것임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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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엔딩씬. 유리(린)이 바깥 풍경을 내다보는 장면

 

 


2. ‘혈연’은 아니지만, ‘유대’하겠습니다.


 

두 영화 모두 비혈연 가족을 소재로 다루면서 가족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부수고 우리에게 가족의 의미를 다시 고찰해보도록 한다. 비혈연 가족과 혈연 가족의 가장 큰 차이는 ‘선택’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다.

 

비혈연 가족은 대다수 개인의 의지와 선택을 바탕으로 구성된다. 반면 혈연가족은 피가 이어졌다는 이유로 한 집단에 소속되는 가족 형태이다. ‘선택으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워딩은 보다 더 자유롭고 개인의 의지가 개입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두 가족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과 상대방과의 거리를 좁히되 그 선을 넘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이 가족들은 기존의 혈연가족이 매여 있는 각자의 역할(부모-자식, 엄마-아빠)의 역할에서 자유롭다. 단적인 예로 <당신의 부탁>에서 효진과 종욱은 집안일을 철저하게 분담하는 편이다. <어느 가족> 역시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살려서 하는 일이 명확하다. 비혈연 가족의 매력은 고정된 역할개념에서 벗어나서 한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서로 각자의 개인적인 공간을 존중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현재 혈연 가족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새로운 가족 형태를 실험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들을 우리는 또 다른 ‘가족’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이러한 다양한 가족들의 서사가 사회에 등장하는 것은 소수자인 이들을 비정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가족의 형태 중 하나라는 인식의 변화를 끌어내기를 기대하도록 한다. 이러한 변화는 종욱과 같은 아이들이 더는 자신을 ‘더러워진 책’에 비유하거나, 가정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데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그리고 우리의 혈연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가족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한다. 앞서 우리 사회에서 사용되는 ‘정상 가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긴 했지만, 이 표현 역시 혈연을 중심으로 가족의 형태를 단정 짓는 표현이라 생각되기에 앞으로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부탁>과 <어느 가족>의 두 가족이 시간의 지남에 따라 진정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며 이들이 가족으로서 이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유대’하고 있다고 느꼈다. 혈연은 아니지만, 사회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보듬으며 함께 살아가는 또 다른 가족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유대 가족’이라고 부르고 싶다. 앞으로 이런 유대 가족의 서사가 더 많아져서 기존 가족의 틀에 얽매인 사람들의 사고를 깨워주기를, 더불어 우리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전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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