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모성애 '신화'의 폭로: 영화 '케빈에 대하여'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으로 바라본 영화 이야기
글 입력 2020.06.3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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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신화는 파롤(parole)”이다. 파롤이란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랑그와 함께 중요하게 사용되는 개념으로, 개인이 실제로 행하는 언어 행위를 뜻한다. 바르트의 기호학과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영감을 받았기에, 이때의 파롤 역시 소쉬르가 규정한 의미와 맥락을 같이 한다. 바르트의 관점에서 신화란 ‘이미 존재하는’ 랑그의 소재들을 바탕으로 구성되는 인위적인 발화 행위인 것이다. 바르트가 “이미 작업된 소재”라 지칭하는 신화적 파롤의 구성 요소는 기호다. 이때 기호는 특정 기표와 기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1차적인 체계의 결과물로서, 신화의 구성 단계에서는 2차적인 기표로 전락한다.

 

신화는 이처럼 1차 체계의 언어를 2차 체계의 층위로 이동시켜, 원래의 언어가 지녔던 의미를 왜곡해 2차적인 의미를 새롭게 양산하기 때문에 일종의 메타언어(metalanguage)가 되는 것이다. 신화 구성 과정에 대한 바르트의 주장은 기표인 시니피앙(signifiant)과 기의인 시니피에(signifié)의 등가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호의 기표화에 근거한다. 이로써 신화는 2차 체계의 기호에서 만들어지는 의미뿐 아니라 1차 체계의 기호와 의미까지도 미약하게나마 확보하게 된다.

 

이때 바르트의 신화론에서 주목해야 할 핵심으로 ‘의미작용(signification)’이 있다. 앞선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신화작용은 신화의 수용자를 상대로 의미작용을 수행한다. 의미작용이란 이미 존재하는 1차 체계의 기호를 2차 체계의 기표로 자의적으로 변환시켜, 또 다른 의미를 생산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바르트의 신화론에서 의미작용의 과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신화적 의미작용이 전제할 수밖에 없는 ‘이중성’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신화적 의미작용의 이중성은 기표에 대한 이중성이다. 신화의 기표는 1차 체계의 의미와 2차 체계의 의미를 동시에 담지하기에 신화의 수용자가 2차적인 의미를 비판하고자 하더라도 신화의 기의는 1차적인 의미를 가리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메타언어로서 신화는 이처럼 상황에 따라 “실제 역사의 이미지를 텅 비게 하고,” 스스로가 보여주는 본질의 양상을 언제든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바르트는 이러한 이중적인 의미작용으로 신화의 모순이 숨겨진 채 대중에게 수용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중성은 어떻게 탄생하며 합리화되고, 이중적 의미작용은 어떤 연유로 대중에게 ‘정상적인’ 과정으로 수용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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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필름 사진

 

 

 

2. 신화의 탄생 과정: 기표의 기호화


 

바르트의 기호학은 기호를 기표와 기의의 결합으로 보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먼저 기의는 실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언어적인 개념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에 물질적인 실체를 부여하는 것이 기표다. 소쉬르와 바르트의 언어학은 만물의 모든 것이 기호이자 기호의 탄생 체계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바르트는 기호의 기표를 형식으로, 기의를 개념으로 치환하며 둘에 언어적인 역할을 부과한다. 기호가 하나의 단어나 구, 문장 등으로 존재한다면 이때 기표는 그러한 상태를 가능하게 할 언어적 형식으로, 기의는 언어적으로 무언가를 지칭하고 함의하는 개념이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바르트는 소쉬르가 연구했던 1차 체계로서의 언어가 응용돼 만들어지는 것으로 2차 체계의 언어를 상정했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이미 존재하는 ‘기호 1’이 있다. 이것에는 이미 기호의 탄생을 가능케 할 ‘기표 1’과 ‘기의 1’이 있다. 이때 기호 1은 1차적인 언어로 규정되며, 이것에 내재된 의미도 1차적이다. 그런데 바르트에 따르면 언어 체계는 1차적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2차적 차원으로 연장된다. 1차 체계에서 만들어진 기호가 또 다른 기표가 돼 2차적인 언어 체계에 포섭된다는 것이다. 신화는 이 과정에서 탄생하며, 그렇기에 “신화는 이미 존재하는 기호에 작용”한다. 2차적 언어 체계에서 기호는 기표화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기 위한 재료로 탈바꿈한다. 기호 1은 2차 체계에서 기표 2로 변환된다. 1차 체계의 기호가 기표가 된 상황에서 이것이 부과될 또 다른 기의 2가 탄생하고, 양자의 결합으로 2차적 기호(기호 2)가 탄생한다.

 

이로써 신화가 만들어진다. 바르트가 자신의 기호학에서 강조했듯 이것은 “[대상언어(langage-object)를 만드는] 첫 번째 체계에 관해서 말하는 이차 언어이기 때문에 메타언어”로 불리게 된다. 즉, 신화는 1차 체계의 의미를 2차 체계의 의미로 변형시킨다. 주의해야 할 것은, 신화가 2차 체계의 언어에서 기인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기표가 1차 기호였던 당시 지녔던 1차적 의미가 신화 내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신화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게 된다. 이로써 신화는 이중적인 것이 된다. 실질적으로 신화는 2차적인 의미를 전면에 강조할 것이다. 하지만 신화에 대한 비판이 오가는 등 그것의 존속이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면, 신화의 형식을 내세울 수 있게 된다. 정확히는 형식에 내재된 1차적인 의미로 회피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신화적인 파롤은 일종의 통고(notification)처럼 제시되는 동시에 사실의 진술(constat)처럼 제시될 것이다.”

 

 

 

3. '이중적' 의미작용


 

 
“알리바이(alibi) 안에는 부정적 동일성(“나는 당신이 내가 존재한다고 믿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곳에 존재한다”)의 관계에 의해 서로 결부된 충만한 공간과 텅 빈 공간이 있다. […] 신화는 가치이다. 신화에는 기준이 될 만한 진리가 없다. 결국 신화는 경찰들이 말하는 알리바이와는 달리, 영구적인 알리바이가 될 수밖에 없다. 신화의 시니피앙이 항상 이렇게 다른 모든 곳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기 위해선, 시니피앙이 두 개의 얼굴을 지니는 것으로 충분하다.”
 

 

바르트는 이렇듯 신화의 이중성이 확보되는 과정에서, 개념이 의미를 소외시키는 현상이 발생한다고 분석한다. 신화는 2차 체계의 의미를 개인에게 통고하면서도 여전히 1차 체계와의 유비관계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객관적인 사실’로 간주될 명분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개념은 본래의 의미를 왜곡할 뿐, 의미의 존재 자체를 제거하지는 않는다. “[2차적인] 개념은 그것들의 기억[1차 체계의 기호가 지시했던 온전한 의미]은 제거하지만 그것들의 실제 존재[기표화된 1차 체계의 기호]는 그대로 남겨놓는다.” 신화에서 원래 1차 기호가 지녔던, ‘왜곡되지 않은’ 의미는 신화 내부에서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기표화된 기호가 지시하는 ‘객관적 형질’로서 기표적인 의미는 여전히 신화 내부에 자리하고 있다.

 

바르트는 이 지점에서 알리바이에 대한 설명을 전개하며 신화의 존재론적 상태를 구체화한다. 알리바이란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 다른 곳에서 그 무언가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방법으로, 존재의 동일성을 부정성에 의해 정당화하는 행위다. 이를테면 대상이 눈앞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것의 존재성을 입증하기보다, 그렇지 않은(=그것이 ‘설마’ 그곳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 공간에 대상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이 그것의 존재성과 동일성을 입증하는 데에 효과적일 것이다. 알리바이는 이러한 부정적 동일성을 실현한다. 바르트의 설명에 따르면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알리바이, 즉 사회적 상황에서 알리바이는 하나의 종결 지점을 갖는다. 범인의 알리바이가 경찰의 거듭된 수사를 통해 최종적으로는 거짓으로 탄로 나듯이 말이다.

 

하지만 신화에는 기표의 이중성이 현존하는 탓에 이처럼 종결 선언을 내리기 위한 객관적 기준이 성립할 수 없다. 이중성의 확보를 토대로, 신화는 ‘영구적인 알리바이’가 된다. 대중이 신화의 알리바이에 의문을 가지더라도 신화는 기표의 또 다른 ‘객관적인’ 면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알리바이를 강화한다. 결과적으로 “신화의 시니피앙 안에서, 형식은 텅 빈 것이지만 또한 [객관적으로] 현존하는 것”으로, “의미는 부재하는 것이지만 또한 충만한 것”으로 끊임없이 변모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신화가 정상적인 것으로 수용되기 위한 단계로, 신화의 의미작용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바르트의 규정에 의하면 “의미작용은 신화 그 자체”다. 알리바이의 설명에서도 확인했듯 신화의 의미작용은 2차 체계 기호의 의미를 세계에 보급하기 위한 영구적인 메커니즘이다. 이중적인 체계로서 신화는 스스로 편재성을 지니기에 메커니즘의 반복은 신화가 담지하고 있는 기호의 개념, 즉 기의의 반복과도 같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화는 “사물들을 기정사실처럼 진술(constater)”하는 방식으로 사물의 존재 자체를 투명하게 만드는데, 이렇게 신화는 결국 “모든 것을 투명하게 만듦으로써 세계를 행복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이중적인 의미작용은 신화에 저항하는 태세들을 기표의 이중성으로 방어함에서 나타난다. 구성원 가운데 일부가 신화에 반기를 들 때, 신화는 기표화된 기호가 확보한 일차적인 의미를 소환한다. 이 지점에서 의미작용은 곧 자연화의 과정을 수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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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 컬러 사진은 처음 봐서 신기했다.


 

 

4. 의미작용으로 ‘자연화된’ 신화: 정상성의 부여


 

1) 이중성의 합리화 과정: 신화의 자연화

 

알리바이의 영구화를 기제로 신화의 의미작용은 자연화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종결 지점이 존재하는 알리바이와 달리 신화에서는 그 지점이 존재하지 않기에, 영구적인 메커니즘을 응용해 스스로의 존재를 완벽한 진실처럼 보이게 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때 수반되는 도구가 1차 체계의 기호다. 1차 체계의 기호는 그것이 내포한 의미의 구체성을 잃고 2차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간단한 질서’로 변형된다. “언어적 기호가 신화적 시니피앙으로 비정상적으로 역행”하는 것이다. 이 질서는 신화의 알리바이를 성립하게 할 기제가 된다. 부르주아 문화가 확산되는, 자본주의 사회가 배경인 상황에서 이러한 질서의 형태는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또한 이것에 대응하는 의미도 명확하고 직접적이기에, 사람들은 신화의 알리바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때문에 신화는 특정 문화의 가치를 ‘자연적인’ 것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변형시키기에 적합하다. 바르트는 이러한 알리바이가 영구적으로 존재하기에 신화가 마술적인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앞서 설명한 기호의 기표화, 기호의 단순 질서화로 인해 “의미는 신화의 개념에 의해 [자의적으로] 차용된다.” 신화는 알리바이에 의한 이중성을 확보하고, 발휘하는 상태이기에 신화의 수용자는 단지 그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신화의 2차적인 의미는 “겉으로 드러난 명백한 의미”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기에 물리적인 시야에서만 보이지 않을 뿐 어디에서든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화의 의미가 일부로부터 공격받을 경우에도 신화는 ‘[현존이 통제당한] 신화적 시니피앙’을 내세워 물리적인 지표로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한다. 그렇기에 신화는 결코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며, 이러한 이중성을 토대로 신화에 함의된 2차적인 의미를 대중 모두에게 자연적인 것으로 합리화한다. 이로써 특정 문화나 현상이 사회의 보편타당한 가치로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자연화 과정을 “신화의 근본 원칙”이라 호명한다.

 

2) 자연화로 만들어지는 탈명명화의 ‘정상성’

 

이러한 자연화의 과정은 ‘정상성’을 인위적으로 구성한다. 다시 말해, 자연화된 신화는 해당 사회에서 정상성의 발현으로 여겨진다. 그 예시로 바르트는 당대 사회의 부르주아적 문화를 제시한다. 사회에서 부르주아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소수임에도, 이들의 문화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추구해야 할 ‘대중적인’ 것으로 전파된다는 주장이다. 바르트는 이것이 순환적인 알리바이에서 오는 이데올로기의 ‘익명성’에서 비롯된다고 밝힌다. 신화는 물리적인 시점에서 포착되지 않지만 정신적으로 세계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는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되며, 익명적인 특질을 띤다. 바르트에 따르면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표상들을 더욱 많이 보급할수록 더욱 자연화된다.”

 

또한 이런 방식으로 신화가 자연화될수록, 신화를 만들어내는 기호에 대한 기원은 사람들 사이에서 쉽게 잊힌다. 바르트는 이러한 현상이 ‘표준화된’(normalisé) 형식들이 광범위하게 적용됨에 따라, 신화 자체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지도 않으며 직접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수용되는 양상이라 해설한다.

 

 
“부르주아 계급은 인간 전체를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 안으로 끊임없이 흡수한다. 자신의 근본적인 신분을 결여한 인간은 오직 상상을 통해서만, 다시 말해서 의식을 빈약하게 만들거나 의식을 고정시킴으로써만 자신의 신분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 탈명명화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서 탈명명화는 부르주아 계급이 세계의 현실을 세계에 대한 이미지로, ‘역사’(Historie)를 ‘자연’(Nature)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이다.”
 

 

이제 부르주아 계급의 문화는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규범화된다는 것이다. 규범화된 법칙은 곧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을 양성하기 위한 윤리적인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된다.- 최종적으로 부르주아 계층의 문화는 사회 전반에서 ‘탈명명화’된다. 탈명명화는 부르주아 계급의 문화를 단지 부르주아 계급만의 것으로 국한하지 않고, 사회 전체가 응당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로 치부하는 현상을 예로 가리킨다. 이때 부르주아 계급의 문화와 규범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모범으로 따라야 할, 보편적인 동시에 ‘정상적인’ 특질로 격상된다.

 

이렇듯 신화는 일차적인 체계에서 생산된 기호를 재료로 삼아, 기호의 의미를 임의적으로 변형해 이차적인 기호와 의미를 만들어낸다. 새로운 기표로, 재료로 격하된 기존의 기호는 신화의 보급을 원활하게 할 단편적인 질서가 된다. 하지만 여전히 일차 기호로서 지녔던 의미를 내적으로 보존하고는 있기에, 신화를 합리화하기 위한 물리적인 기표로 활용된다. 결과적으로 신화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신화 자체의 특질을 자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나아가 신화의 이름을 제거해 [바르트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부르주아적 신화] 그것을 보편타당한 규범으로 ‘탈명명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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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중적 의미작용 발현의 사례: ‘전복적’ 모성애를 통한 ‘정상적’ 모성애로의 회귀

━영화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1] 현대 사회의 모성애 신화 배격

    

바르트가 당대 사회에서 신화론을 바탕으로 배격했던 대표적인 문화는 이렇듯 부르주아 계층의 것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이와 유사한 예시로, 즉 바르트처럼 사회의 문화의 어떤 신화적인 면모를 배격한 예로 ‘모성애 신화’에 대한 전복적인 시도를 들 수 있다. 린 램지 감독의 장편 영화 <케빈에 대하여>가 대표적인 사례다. 본 작품에서는 두 가지의 신화가 존재하는데, 첫 번째는 기성 사회에 잔존하는 모성애 신화이며 두 번째는 그것을 전복할 또 다른 모성애 신화다.

 

<케빈에 대하여>는 전체적으로 여행 작가인 ‘에바’가 여행 도중 ‘프랭클린’이라는 남성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이야기를 담는다. 가정을 꾸리기 전까지 에바는 여행 작가로서 전 세계를 자유롭게 누비고 다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결혼 이후 정착해야 할 곳이 생기고, 아이를 임신하며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자 그녀는 더 이상 자유로운 작가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에바의 절망감은 첫 아들 ‘케빈’을 출산하는 과정에서 강조된다. 감독은 케빈을 출산하기까지 에바가 다른 임산부들과 어울리길 꺼려하고, 배가 불러오는 자신의 모습을 불만족스럽게 여기는 장면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녀가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준비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갈등은 극중에서 에바가 케빈을 출산한 직후 상실삼에 젖어 있는 표정이 클로즈업되면서 크게 부각된다. 에바가 현대 사회에서 규정한 어머니의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기존 사회의 모성애 신화에 반기를 든다. 본 작품이 이중적 의미작용이 나타나는 사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1)전통적인 모성애 신화와 이에 맞선 전복적 모성애 신화가 작동하는 방식 모두가 기표적 이중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2)나아가 신화 자체가 기표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1) 아이에 대한 헌신적 사랑 ‘강요’: 신화적인 모성애

   

이처럼 영화 <케빈에 대하여>가 서사의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먼저 보여주는 것은, 이처럼 현대사회에 어머니로서 지녀야 할 보편적인 정체성이 신화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케빈의 탄생은 이 신화가 사회의 기저에 깔려 있는 보편적이고, 탈명명화된 것임을 입증한다. 바르트의 신화론에 따르면 영화에서 이러한 신화는 에바의 남편인 프랭클린의 발화가 2차 체계의 기표로 포섭돼, 마침내 ‘아내’이자 ‘어머니’의 정체성을 신화적으로 규정하는 기호가 된다. 이를 바탕으로 첫 번째 신화에 대한 도식화를 시도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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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에 따르면 아들 케빈의 탄생은 일차 체계의 기호다. 이 기호의 기표는 프랭클린의 발화 그 자체다. 에바가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기까지 남편 프랭클린은 아내를 위로하는 동시에, 가정의 일원으로서 에바가 수용해야 할 책임들이 무엇인지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밝힌다. 그는 임신한 아내의 심정을 헤아리는 차원에서, 나아가 어머니가 되는 것에 대한 그녀의 두려움을 덜어내도록 말들을 건넨다. “우리 둘의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기쁘다”는 종류의 말이나, “육아의 어려움을 함께 잘 헤쳐나가야 한다”는 종류의 말들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소리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프랭클린의 발화는 아내와 어머니로서 가정에 책임을 가지고, 그에 마땅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기의와 합쳐져 ‘축복해야 할 것으로서의 출산’이라는 기호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것은 곧 2차 체계에서 모성애 신화를 확립하기 위한 또 다른 기표로 작동한다. 신화는 모체의 출산을 기표로 삼고, 이것에 ‘당위적 모성애’라는 기의를 결합시켜 출산의 일차적인 의미를 이차적으로 변형한다. 즉 2차 체계의 기호는 출산과 당위적 모성애를 바탕으로 아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신화로 표상해낸다. 1차 체계에서 출산은 당위적인 의무를 부과하기 이전에, 아이의 탄생을 축복하고 반기는 행위였다. 아이의 부모가 되기 이전에, 임신한 여성의 불안감을 덜고자 부모로서의 역할과 의무에 대한 이야기를 최대한 기피한다. 이 대신에 아이의 탄생이 가정에 가져 올 기쁨과 보람 등 희망적인 내용을 기의로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화는 아이에 대한 의무를 과도하게 당위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비판을 받더라도, 본래의 [1차 체계의] 출산이 지녔던 의미를 내세우며 비판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비판의 화살이 날아올 경우 “이는 단지 세상에 나온 아이를 반기고, 축복하기 위한 행동일 뿐”이라고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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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화에 대한 불복종

 

결론적으로 영화의 초중반부에서 제기되는 비판은, 기존 사회의 모성애는 ‘신화’가 돼, 아이에 대한 어머니 여성의 애정 어린 헌신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첫째 아들인 케빈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에바의 모습은, 개인이 인지하고 있는 모성애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준다. 나아가 영화를 관람하는 대중들 모두에게 이러한 모성애 신화의 ‘신화적인’ 면모를 폭로한다. 헌신적 모성애의 신화적 면모는 다음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다.

 

먼저 축복해야 할 것으로서 기존의 [1차 체계의] 출산은 여성에게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권유’했을 뿐, 강요하지는 않았다. 결혼한 여성이 출산을 앞뒀거나 아이를 임신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정의 일원으로 책임져야 할 사항들을 ‘미리’ 주입 받을 경우 가정과 아이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프랭클린은 에바에게 ‘겁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차원의 위로의 말들을 자주 건넸을 뿐,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부과 받았을 때 그녀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한 설명은 육아를 포함한 가정생활 전반에서 에바의 혐오감만 증식시킬 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난 후 상황은 돌변한다. 출산의 기호가 2차 체계의 기표로 사로잡히면 모성애를 강제하기 위한 물리적인 질서로 변모한다. 다시 말해, 케빈이 모체의 바깥으로 나온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이차적 기호의 모성애 신화가 시작된다. 에바는 그 시점에서 ‘진짜로’ 어머니가 됐기에 그녀에게는 모성애를 발휘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이때의 의무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라는 신화적 기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모성애 신화는 사회적으로 ‘자연적이고’ 올바른 것으로 탈명명화된 상태다. 자손의 번식은 여성의 자궁을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결혼한 여성에게는 사회적으로 출산에 대한 암묵적인 의무가 부과된다. 출산을 기뻐해야 할 것으로 여기고, 아이의 어머니가 된 여성은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문화가 보편적으로 확산된다.

 

이와 같은 신화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여성들은 아이를 막 출산한 후, 바깥세상으로 나온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기쁨을 느낀다. 그러므로 에바 역시 케빈을 출산한 후 자신에게 주어지는 아내-어머니의 책임과 역할을 마땅히 반기며 아이의 탄생을 ‘필연적으로’ 기뻐해야만 했다. 하지만 에바는 그렇지 않았다. 출산 후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은 출산 직후의 여성이 무조건적으로 아이에게 모성애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인다. 이런 연유로 관객은 스크린 너머 에바의 모습을 보며 어딘가 이질감을 느낀다. 영화는 자신의 아이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는 에바의 상황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그녀가 ‘일반적인’ 어머니상과 다르다고 판단하길 원한다. 이로써 영화는 전통 사회의 모성애 신화를 전면적으로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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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개인의 논란과 별개로,

에즈라 밀러는 정말 대단한 배우다.

 

 

[2] 탈신화화의 방법: 전복적인 모성애 신화

 

1) 케빈의 인격장애

 

영화는 이렇듯 전통적인 모성애 신화를 비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신화에 대항하기 위한 또 다른 신화를 만드는 과정으로 진입한다. 바르트는 신화의 탈신화화를 위해서는 “역으로 신화를 신화하며” “신화를 재구성”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영화는 이 방법론을 바탕으로 헌신을 당연하게 여기는 모성애 신화를 전복하고자, 그러한 모성애가 ‘정상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유도한다. 즉, 사랑을 받아야 할 자녀가 기존의 사회가 상정했던 것처럼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주기 어려운 존재임을 보인다. 이때 영화는 자녀에게 어떤 결함을 부여해, 부모 쪽의 책임을 덜어내고 문제의 근본적인 초점을 부모(특히 여성)가 아닌 자녀에게로 옮긴다.

 

첫째 아들인 케빈에게서 보이는 인격적인 결함이 그 예시다. 케빈은 유년 시절부터 청소년기에 접어들기까지 어머니인 에바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지 못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에바가 자신에게 사랑이 아닌 의무감만 느끼고 있음을 직감하며, 그녀에 대한 반항심을 엽기적인 방식으로 표출한다. 에바 역시 의도적으로 자신의 방을 어지럽히고, 딸인 실리아를 괴롭히며, 남편 프랭클린의 면전에서만 깍듯한 모습을 보이는 케빈에 증오감을 느낀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케빈과 에바의 관계를 ‘비정상적인’ 모자 관계로 설정함으로써 또 다른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때 전통적인 모성애 신화는 새로운 전복적 모성애 신화를 위한 기표가 된다. 기표화된 기호는 모성애 신화가 신화로 작동했을 당시 양육자에게 부과했던 책임과 의무들을 배격하기 위한 기의를 담아낸다. 그 과정을 도식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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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정상적 모성애의 발현: 죄책감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자녀에게 사랑을 주는 것보다 인격적인 장애를 갖고 있는 자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 더욱 어렵다. 영화는 서사의 후반부에서 이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케빈이 학급 친구들을 대상으로 엽기적인 살인 행위를 벌이게끔 조장한다. 케빈은 열여섯의 생일을 맞이한 당일, 강당에 급우들을 모아 가둔 후 활을 쏘아 한 명씩 차례대로 살해한다. 사건을 접한 에바는 차마 케빈이 범인일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한 채 사건의 현장으로 향한다. 그녀는 피해자의 학부모들과 이웃 주민들 사이를 제쳐 나가며 케빈의 생사를 확인하고자 한다. 경찰에 의해 강당의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케빈이 걸어 나오자 에바는 순간적으로 안도한다.

 

(1) 이때 에바는 아들의 안위를 확인하고 잠시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케빈이 자신의 범행을 시인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경찰의 손에 붙잡히는 것을 목도하며 에바의 표정은 급속도로 굳는다. 그녀는 연쇄살인범으로 연행돼 가는 아들 케빈과 경찰차 너머로 시선을 교환하며 실의에 빠진다. 또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마당에 자신의 딸과 남편이 케빈의 화살에 맞아 죽어있는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충격에 빠진다.

 

(3)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럼에도 그녀는 케빈에 대한 원망과 증오를 표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피해자 학부모들이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그녀에게 욕설과 폭언을 쏟아낼 때도, 이사한 집의 외관을 빨간색 페인트로 망쳐 놓았을 때도, 새롭게 취직한 여행업체의 직원들로부터 멸시의 눈초리를 받아도 에바는 케빈을 원망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향해서나, 케빈에게 면회를 직접 갔을 때나, 혼자 집 안에 남겨졌을 때나 그녀는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릴 뿐이다. 심지어 케빈이 연행되기 직전까지 입었던 평상복들을 깨끗이 제자리에 정리하고 그의 물품을 정리하는 등, 케빈에 대한 부모로서의 애정이 남아있음을 명백하게 보인다. 이 과정은 여전히 일전의 모성애 신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상당히 비현실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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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정상적인 모성애의 발현 수단: 붉은 색감의 반복적 현현

 

영화는 이 모든 순간들을 통해 케빈을 향한 에바의 ‘비정상적인’ 모성애를 보여준다. 기존 사회의 모성애 신화는 ‘정상적인’ 어머니의 ‘정상적인’ 자녀에 대한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사랑을 주기 위한 어머니와 자녀가 모두 기성 사회의 모성애 신화가 요구하는 정상적인 특질을 보유하지 못했다면, 이들의 관계는 무엇으로 정의되어야 하는가. 작품은 모성애를 ‘비정상적으로’ 발현시키는 방식으로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고, 특정 색깔을 통한 미장센(mise en scene)을 활용해 전복적인 모성애 신화를 확립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면들은 에바가 중소 여행업체의 직원으로 취직한 현재 시점과, 아들 케빈이 성장해 살인 사건을 벌일 때까지의 과거 시점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상영된다.

 

이때 토마토 축제의 광경, 빨간 페인트로 엉망이 된 집, 붉은 색깔 디자인의 통조림 캔이 끝없이 진열된 코너, 붉은색 조명이 비추는 집의 내부와 차 안 등━‘붉은 색’과 관련된 장면들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렇듯 붉은 색감의 현현을 통해, 일전의 모성애 신화로선 이해하기 힘든 케빈을 향한 에바의 죄책감과 모성애가 표상되는 것이다. 붉은 색과 연관된 장면에서 피해자 학부모와 대치하거나, 폭우를 뚫고 살인 사건의 현장으로 향하는 차 안의 내부가 비춰지는 등의 상황을 토대로 이를 추측할 수 있다. 관객들은 이러한 에바의 행동에 혼란을 느낀다. 어째서 연쇄살인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별다른 감정적 동요를 보이지 않는지, 합당한 이유를 찾지 못한다. 이때 전복적 신화는 기표로서 ‘모성애 신화’가 일차적으로 내재하는 의미를 전면에 가져와 에바의 행동은 단지 아들 케빈을 향한 모성애적 사랑을 표출하는 것이라 해명할 수 있게 된다.

 

 

[3] 전복적 신화 자체의 기표화: ‘정상적’ 모성애 신화로의 복귀

 

에바의 비정상적 모성애가 케빈에 대한 죄책감과 애정을 느끼는 방식으로 표출됨에 따라, 영화의 결말은 다시금 전통적인 모성애 신화로 회귀할 조짐을 보인다. 결과적으로 영화의 마지막에서 케빈과 에바는 교도소 면회 장소에 모여, 처음으로 긴 대화를 나눈다. 살인 사건이 발생한지 2년이 넘는 시점에서, 에바는 케빈에게 무엇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는지 묻는다. 이때 그녀는 기존의 모성애 신화가 종용했던 것처럼 아들에게 ‘다정하고,’ ‘배려심 많은’ 목소리와 태도로 일관한다. 서사의 흐름을 끝까지 따라온 관객이라면, 이 장면이 케빈이 성인기에 접어든 이후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이 장면이 최초이자 마지막임을 인지한다. 여기에서 ‘아이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전의 모성애 신화가 부활한다.

 

 
“나는 신화적인 개념들 안에는 어떠한 고정성도 없다는 것을 말했다. 즉 신화적인 개념들은 만들어지고, 변경되고, 해체되고, 완전히 사라진다.”

 

“[…] 그들은 신화의 가장 커다란 힘은 신화가 끊임없이 회귀한다는 사실에 있으며, 결국 이 회귀하는 신화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침묵(현실적인 침묵이건, 도치된 침묵이건)이라고 생각했다. […] 신화를 그것의 내부로부터 몰아내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왜냐면 우리가 신화로부터 벗어나려는 운동 그 자체까지도 역으로 신화의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케빈은 여태껏 자신에게 ‘다른 어머니들처럼’ 관대하고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어머니의 변화를 알아채고 대답을 망설인다. 잠깐의 망설임을 겪은 후 케빈은 다음의 대답을 내놓는다.“2년째야. 생각할 시간 많았을 테니, 이제는 말 해줘. 왜 그랬어?” /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이때 케빈은 처음으로 자신이 어머니의 ‘정상적인’ 애정을 받고 싶었다는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에바는 케빈을 포옹한다. 이후 그녀가 교도소 바깥으로 걸어 나오는 장면에 동원되는 배경음악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제 와 엄마를 생각해 보면, 참 무던히도 날 응원해 주셨지. 내 알 수 없는 마음이 빗나갔을 때, 내게 말씀하셨지. 아들아, 받아들이렴.”

 

관객은 이 장면에서 지금까지 영화가 만들어왔던 전복적 신화가 또 다시 기존의 ‘정상적’ 모성애 신화를 창조하기 위한 기표로 전락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영화는 케빈과 에바 사이에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관객을 다시금 전통적 신화에 편입시키는 결말을 택했다. 그렇기에 작품을 관람한 관객 중 다수는 해당 작품에 대해, 결국 케빈도 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했던 것이라는 평을 내리게 된다. 앞서 붉은 색이 매개된 장면들의 연속에서 에바가 보였던 비정상적인, 비현실적인 태도들이 결국에는 아들을 향한 연민이 남아 있었기에 가능했던 행동이라 ‘합리적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영화는 전복적 모성애 신화에서 또 다시 기존의 모성애 신화로 포섭됨으로써, 바르트가 신화론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신화로부터 벗어나려는 운동 그 자체까지도 역으로 신화의 먹이가 되는” 결말을 맞이한다.

 

관객 가운데 누군가는 결국 에바가 전통 사회가 규정했던 어머니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에서 탈피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도 작품은 여전히 정상인의 규정에서 벗어난 아들을 비정상적 모성애를 통해 포용하려는 어머니가 존재함을 주장할 것이다. 즉, 마지막 장면에서 케빈을 포옹한 뒤 교도소를 걸어 나가는 에바의 모습을 근거로 들며 여전히 케빈에 대한 죄책감과 애정이 남아 있는, 전복적 모성애를 발휘하는 주체의 이미지가 ‘객관적으로’ 남아있음을 입증할 것이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신화적 기호의 기표가 이중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을 이처럼 모성애의 모티프를 바탕으로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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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시, 바르트


 

바르트의 신화론은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기호학적 논의와의 유비관계를 살피며, 신화가 일종의 전언(message)임을 확인한다. 신화는 이미 존재하는 기호들을 소재로 삼고, 그것에 내재된 의미를 자의적으로 변형해 이차적인 의미로 재탄생시킨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때 신화의 내용이 진실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강조하듯 “지금에 있어선 신화의 효과가, 나중에 진실을 밝혀낼 합리적인 설명보다 더욱더 합당한 것처럼 간주”되어서다.

 

 
“[…] 분명 모든 기호학적 체계는 가치들(valeurs)의 체계이지만 신화의 소비자는 의미작용을 사실들(faits)의 체계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서 신화는 단지 기호학적인 체계에 불과한 것이지만, 독자는 그 신화를 사실적인 체계로 읽어버린다.”
 

 

오늘날 사회에서도 ‘악마의 편집’을 위시한 신화의 탄생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정보를 선별해 임의적인 규정을 부여하는 행위가 사회 전반에 만연한 상태다. 따라서 바르트의 논의는 작금의 상황을 분석하는 차원에서도 유의미한 논점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바르트의 신화론은 특정한 문화의 가치나 규범이 보편적인 차원으로 ‘자연화’되는 과정을 기호학을 빌려 체계적으로 설명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나아가 그는 ‘탈명명화’의 아이러니를 이용해 신화가 개인의 물리적인 시야에 보이지 않음에도 사회 전체에 정신적으로 만연함을 상기시킨다. 이로써 보편화된 신화는 신화의 내용이 갖는 진실성을 검증하지 않고도 개인에게 보편타당하게 옳다고 간주된다. 결국 바르트는 신화가 선택적으로, 인위적으로 의미를 설파하고 있음을 폭로한 것이다.

 

<케빈에 대하여>의 네이버 관람평 중 가장 높은 추천수를 기록한 평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왜 그들을 죽였는가를 묻지 말고, 왜 그녀는 안 죽였는가에 집중하라." 나는 이 논평만큼 영화의 신화적인 면모를 잘 부각하는 평론이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결말은 결국 전통적인 모성애 신화로 복귀하는 쪽을 택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복귀에 비추어 생각해보았을 때 케빈이 에바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그 역시 아들로서 어머니의 따뜻한 애정과 보살핌을 받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 큰 따옴표 안 내용은 모두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 (1995, 정현 역)과, 그레이엄 앨런 (2006, 송은영 역)의 <문제적 텍스트: 롤랑 바르트>의 원문을 인용한 것.

 

 

[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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