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타인의 비극은 내 감기보다 가볍다

타인의 고통을 본다는 것에 대해
글 입력 2023.11.29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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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이미지들이 깃발처럼 나부낀다. 깃발은 어떠한 패배를 알리는데 그것은 반복된 역사에도 불구하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또 일어나버리고 말았다는 패배의식을 내포한다. 독자들도 낯익은 사진들 앞에 멈춰선다. 이미지들은 끔찍하다. 아니, 끔찍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사진과 영상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막, 화면을 가운데에 두고 대상과의 안전한 거리를 둔 채 본다는 사실은 끔찍하다거나 참혹하다는 말의 무게를 덜어준다. 그래서 보는 인간, 호모 비덴스는 그것이 끔찍해 ‘보이고’ 참혹해 ‘보일’ 따름이다.

 

보는 것에는 하나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수잔 손택의 말처럼 이미지들, 그리고 그런 이미지들을 보는 것은 우리 뒤에 계속 쌓이며 우리를 이미지 속의 사건, 가령 전쟁과 무관하지 않게 만든다. 손사래를 치며 ‘저는 몰랐어요’라고 우리의 순진무구함을 주장할 수 없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를 본다는 것, 가령 전쟁의 사진을 보는 것은 일종의 책임감과 ‘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패배 의식, 대상에 대한 동정, 오묘한 불편함을 줄지어 수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미지들은 쌓이며 더이상 우리에게 낯섬과 새로움을 주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참혹함의 종류는 차곡차곡 저장되며 눈에 익는다. 이렇듯 보는 것이 우리를 “관련자”로 만든다는 사실과 보는 것이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뒤섞여 공존한다. 이를 합쳐보면, 우리는 “무감각한 관련자”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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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Capa - 벨기에 바스토뉴 부근 벌지전투에서 독일 포로와 미국 군인

(A US soldier with a German prisoner of war during the battle of the bulge near Bastogne), 1944,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그런데 무언가를 ‘안다’ 혹은 ‘알게 되었다’는 것 자체로 우리는 무언가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이미지 그 자체는 우리를 바라볼 뿐 책임의 존부, 책임이 있다면 어떠한 종류의 책임을 져야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특히 그 고통이 지구 저 멀리서 벌어지고 있을 때는 더 그렇다. 생각건대, 아마도 그 책임 의식과 책임의 방법이란 것은 단일한 것도 고정된 것도 아닐 것이다.

 

주위를 관찰해보면 이미지에 반응하는 모습은 각기 다르다. 대다수는 가벼운 사색과 함께 한두마디를 나눈다. 내가 원하는 것만 볼 수 있는 달콤한 세상에서 타인의 고통을 알려는 시도와 말을 보태는 것 자체가 좋은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더 많이 알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저 멀리서 벌어지는 고통 저변에는 분명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인간적인 것’이 있고 그것이 우리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에 그것을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언어와 이론으로 잘잘못과 승패를 점치기 전에 고통에 순전히 몸과 마음으로 공감한다. 누군가는 시위를 하고 글을 쓴다. 누군가는 욕을 하기도 하고.

 

가까운 우리 역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궤를 달리 하기는 하지만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제주 4.3 사건을 따라가는 주인공은 역사를 살았고 역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진실을 알아갈수록 추위에 떨고 아프고 참혹함을 느끼는 주인공과 함께 작가도 분명 끙끙 앓으며 글을 썼으리라. 이렇듯 사람들의 책임윤리는 저마다의 경험과 역량, 신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보고’ ‘아는’ 것이 사건이 되어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기도 한다. 이것은 무언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경험이고,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 앞에 서 있는 스스로가 ‘보여지는’ 경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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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capa - 독일군의 아기를 가진 프랑스 여성이 머리카락을 깎는 벌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French woman, who had a baby by a Germnany soldier, being marched home after being punished by having her head shaved) 1944,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복잡한 의식


 

이미지가 딜레마로 뒤덮혀있듯 그것을 보는 우리의 의식도 복잡하다. 이미지를 보며 위와 같은 책임을 느끼는 동시에 우리는 그 이미지의 자극을 즐길 수도 타인의 고통에서 나의 다행을 찾을 수도 있다. 손택은 ‘고통스러운 이미지를 보며 움찔거리는 것 자체가 쾌감’이라고 말한다. 잔인한 사태가 벌어지고 나면 그 사태를 전시하는 가장 적나라한 사진을 찾아 나서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는 ‘보지 않는 것’이 더 괜찮은 태도처럼 보인다.

 

한편 사진이나 영상이라는 장르가 가지는 특수성으로 우리는 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속 대상을 미학적 대상으로 변모시킬 수도 있다. 이것이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장르적 ‘미학’과 ‘소재’가 항상 갈등을 빚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세상과 단절된 수도회의 경건함과 그것을 부각시키는 어둠과 빛의 아름다운 대비는 소재와 형식의 합치를 이뤄낸다.

 

그러나 ‘아름다운 전쟁 사진’은 어떨까? 가령 1차 세계 전쟁의 충격적인 이미지를 배포하여 전쟁의 해로움을 알리려 한 작품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에서 얼굴에 부상을 당한 군인들의 사진을 보여주는 ‘전쟁의 얼굴’은 기이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말하자면 타인의 고통이 미학적으로 읽히거나 때때로는 미학적인 의도를 내포하여 전시될 수도 있다.

 

 

 

보면 무엇이 바뀐다고?


 

손택은 ‘보는 것’ 자체에 회의적이 되는 것을 경계한다. 보는 것 자체는 대상과의 거리를 요하는 것이고 이런 거리는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한다. 하지만 손택은 동시에 그 거리로 인해 진정한 사색이 가능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손택이 ‘타인의 고통’을 저술한 2000년대 초반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이미지를 인터넷 세상에서 접하는 요즘, 보는 것이 사색을 가능하게 한다는 말이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을까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하나의 이미지는 이미지들의 바다에서 개별성을 잃기 쉽다. 그 무게는 가볍디 가볍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도 함께 가벼워진다. 그래도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사진들과 전시의 문법은 계속된다.

 

마지막으로, 본다는 것은 희박하지만 미지의 가능성 하나를 갖고 있다. 그것은 변화의 가능성이다. 몇년전 터키 바다로 쓸려와 모래에 엎드려 누워있는 시리아 소년의 사진을 본 사람들이 그랬고 동물이 사육되고 가공되는 영상을 본 사람들이 그렇다. 어떤 사진들 앞에서 가끔 우리는 우리의 다행과 평안, 권리를 되묻기 마련이다. 아주 가끔은 더 이상 우리가 이미지 속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의 삶을 그의 시선으로 읽어내리는 것만 같다. 그 낯설고 고요하지만 강렬한 시선으로. 따라서 본다는 것은 마냥 일방적인 활동이 아닐 수도 있겠다. 고통의 이미지를 보며 우리는 그 세계에 우리를 노출시킨다. 스스로를 그 세계에 노출시키는 것은 우리의 세계가 변화할 가능성을 미약하나마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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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Capa - 눈밭에서 노는 아이들(Children playin in the snow), 1938,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글에는 꽤나 오래된 사진들을 실었다. 로버트 카파의 눈밭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며 머리속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의 피해자 아동들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이것도 현실이였고 저것도 현실이라니, 직사각형 네모 밖에서는 또 다른 현실이 펼쳐질 것이다. 사각 프레임 밖의 현실을 헤아리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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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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