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거짓말쟁이의 반성문 [사람]

글 입력 2020.06.17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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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짓말쟁이다.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은 “괜찮아.” 혹은 “상관없어.” 류의 말들이다. 아이유의 ‘스물 셋’에 이러한 가사가 있다. ‘속마음과 다른 표정을 짓는 일, 아주 간단하거든.’ 남들 앞에서 괜찮아 보이는 일이란 아주 쉽다. 그저 마음과는 다른 표정을 짓고(그러니까, 대체로 웃는 표정일 것이다), 조금 다정하게 굴면 된다. 나는 여태껏 그러한 내 행동들이 나를 지켜 주리라 믿었다. 나의 배려와 친절이 군중 속 나를 외롭지 않게 하고, 나의 부드러움이 그들을 떠나지 않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모든 행위의 기반에는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최근에야 겨우 깨달았다. 깨달음의 계기는 간단하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방치되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아프지 않기 위해 모난 부분을 깎고 또 깎아내었는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상처가 났다. 그럴수록 더욱 더 나를 둥글렸는데도 계속 아프기만 했다.

 

나는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괜찮지 않은 날들을 보냈다.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가고, 더 이상 아무도 날 찾지 않는 날들도 점차 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사랑했지만 더 이상 사랑하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잦았다. 내 마음 한 가운데에는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나를 지탱하고 있는지, 아니 내가 지금 나의 두 다리로 곧게 서있는 게 맞는 것인지, 정말 도무지 알 수 없는 늪으로 끝없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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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구와 크게 다퉈본 기억이 없다. 맹렬한 사춘기 시절에도 한 두 번 뿐, 아주 화나 본 적도 없음은 물론, 그것을 표출해 본 일은 정말 없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최대한 싸움을 피했다. 어차피 싸워봤자 분노는 금방 잊힐 성향인지라 애초에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속이기로 했다. 일부러 굳게 다짐하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랬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불편한 감정이 솟아나면 곧장 머리는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를 불편하게 하는 데엔 쟤도 이유가 있겠지. 내가 참아주자. 괜찮아.'

 

지금에 와서야 거짓말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런 합리화가 시작되고 나면 사실 나는 그게 거짓인지 아닌지 조차 분간할 수 없다. 정말 뇌가 시키는 그대로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괜찮다고, 그렇게 기분 나쁠 일까지는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달랜다. 화를 내면 바보가 될 것 같았다. 내가 화를 내도 되는 상황인지, 화를 내야한다면 어떻게 내야 하는지, 화를 내고 난 후에는 어떻게 상황을 마무리해야 하는 것인지, 화를 내고 나면 상대와는 영원히 작별인 것인지… 나는 무서운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화를 내고 난 후의 나를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내 안의 나는 점차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지다가. 마침내 사라지기 직전에 다다랐다.

 

내가 화를 내기로 마음먹은 것은 내가 나 스스로를 사랑하겠다고 결심한 이후의 일이다. 나를 사랑하려고 마음먹은 이유는 외로움 때문이었다. 나를 사랑하고, 내 삶을 사랑하게 되면 잃을 것이 많아지고, 얻어야 할 것은 더 많아진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매사에 겁이 많은 나는 다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나를 가둬 두었다. 보호인 줄 알았지만 사실 그것은 엄연한 방치였다는 것을 극심한 외로움에 혼자 울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늘 넓은 세상 한 가운데 희미한 내 모습을 견디는 일에 괴로워했었다. 아무도 날 보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지만 그 마음조차도 나를 속이는 일이었던 것이다. 솔직하게, 정말, 사실은, 모두에게 나라는 사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 사람들이 나를 보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고 서러워 점점 더 숨게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답을 ‘화’를 내지 못하는 나로부터 찾아냈다. 나는 매사에 호불호가 영 갈리지 않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명확하게 티를 내는 편도 아니다. 아주 친한 친구들 한둘 정도나 내 취향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마저도 오랫동안 나를 지켜보면서 그 친구들 스스로 찾아낸 결과물 일지 모른다. 구태여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나도 몰랐을 뿐이다. 부끄럽지만 그랬다. 나를 모르고, 나를 속여온 시간이 그만큼 길었다. 불편한 것을 드러내야 한다. 좋아하는 것보다 더 명확한 자기표현이 불호이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화까지도 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좋은 사람은 없지만 모든 것이 좋다고 말하는 바보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좋다는 사람을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특별한 관심을 쏟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나라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만큼은 그랬을 것이다. 존재를 지우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나였다. 내가 그들이 나를 기억할 필요가 없도록 스스로 도왔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화를 참고, 불편함에 대해 침묵한 것은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되려 스스로 타인에게 가식적인 사람이 된 것은 아닌지에 대한 검열을 하게하고 잊혀 질까 두려움에 떨었으며, 상대방이 나를 믿지 못하고 떠나게 하는 상황을 만들었을 뿐이다.

 

‘나’는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다. 늦었지만 더 늦지는 않게 깨달았음에 안도한다. 누구 한 쪽이 늘 희생하고 양보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마음에 새기기로 했다. 우선, 그 누구도 나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고, 누군가 설령 내게 희생을 강요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으로서 존재할 가치와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솔직함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혼란했던 시기가 있었다. 보통 무례함과 솔직함을 많이 혼동한다고들 하는데, 그것보다도 솔직함이라는 단어 자체가 내게 와닿지 않았다. 솔직하다는 것이 무엇일까? 제일 처음에 드는 생각인가? 제일 먼저 솔직함을 가장한 방어기제부터 떠오른다면? 진짜 나의 욕망들은 어떻게 구별하지? 나는 대체 언제부터 나의 솔직하지 않음과 변명과 가식들을 나의 배려이고, 우수한 공감능력이라고 생각해온 걸까?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내 마음에 잠시간 귀를 기울여보면 된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스스로를 알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면 된다. 나를 속인 시간이 너무 길어 지금부터 얼마나 연습하고, 표현해야 익숙해질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인지했음에 기대를 걸어본다. 우울에 파고들었던 시간들이 모두 나를 생각하는 시간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깨달으면서, 이제는 ‘진짜 나’를 세상에 보여줄 준비를 시작해본다.

 

나는 괜찮지 않고, 이게 나야!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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