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일기가 밀렸어요. [사람]

글 입력 2020.05.15 00:3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일기 쓰기를 훈련받는다. 어린 날의 추억은 노란 장판에 배를 깔고 누워 엄마가 썰어준 수박을 으적으적 먹으며 일기를 쓰던 것이 대부분이다.


좀 더 자라 일기 쓸 시간에 수학 문제 하나 더 푸는 것을 요구받는 나이가 되었을 때도, 일기를 쓰지 못한다는 사실에 어쩐지 죄책감이 들었고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친구들과 다이어리를 사러 가는 것이 관례처럼 익숙해졌다.

 

사실 일기를 쓴다고 해서 나의 나날들이 영원해지는 것도 아닌데 글씨로 기억들을 적어두지 않으면 내가 지나온 날들이 증거도 없이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기가 밀린 만큼 내 시간도 멈춘 채 꾸역꾸역 시간 틈으로 말려들어가고 있는 듯 했다.


밀린 일기는 대충 쓰게 됐고, 밀린 일기를 쓰다가 또 밀려버린 오늘의 일기는 다음주에 몰아서 쓰게 되었다. 인생도 계속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당장 해야할 일에 쫓겨 어제도 오늘도 없이 다음주에 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GettyImages-692812480.jpg

 

 

어렴풋한 기억만으로 내가 살아온 궤적을 가늠하고,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추측하기란 쉽지 않다. 몇 년동안 한 일 중에 기억나는 것은... 용산역에서 친구와 신나게 뛰던 것, 땡볕의 로마에서 15kg짜리 배낭을 짊어지고 기차역을 찾아 헤매던 것, 어두운 골목길에서 작은 고양이가 내 발등에 얼굴을 부비던 것, 그 고양이에게 멜콩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던 것... 단편적이고 찰나의 장면들은 말그대로 '짤방'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일기를 썼다면 더 많은 것이,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기억되었을까? 나는 어떤 순간들이 누적되어 만들어진 사람일까?

 

순간을 붙잡아 나를 정의하는데 쓰고 싶은 마음이 일기쓰기로 이어진 것일까? 매일을 놓치며 살고 있다는 기분이 자꾸만 일기장을 모으게 하는 지도 모른다. 사적인 글을 쓰는 행위는 내 인생에서 항상 큰 의미를 지녀왔다. 내가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도구였다. 글을 읽고, 쓰고, 내 중얼거림을 기록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점점 더뎌지자 나는 '킬링 이브'의 '빌라넬'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 처럼 어떠한 기분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설적으로, 무언가를 느낄 새가 없어 글을 쓰지 못하는 데 글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또 나에게 무언가를 느낄 수 없게 했다.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일기를 쓰지 못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생각에 잠기면 금세 우울감을 느끼게 되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내가 껍데기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어떤 방식으로 생각에 접근해야할지, 어려운 과제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 일기를 써보기로 다짐한다. 나의 하루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보다 내가 느끼지 못하고 넘기는 감정들이 얼마나 많은지, 나의 감정들을 마주하고 잊지 않는 연습을 다시 시작해볼 것이다. 밀린 날짜들을 붙잡으려 애쓰기 보다는 빈 페이지를 좍좍 찢어낸 뒤 새로운 페이지에 오늘의 이야기부터 쓰기 시작해야겠다.

 

 

[황현정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