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생애 가장 인상 깊었던, '동주' [영화]
-
버킷리스트에는 ‘인생 영화 정하기’라는 소소한 목표가 적혀있다. 그리고 목표 밑에는 세 편의 영화가 적혀있는데 영화 <인턴>과 <죽은 시인의 사회>, <동주>가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고등학교 시절, 내가 ‘국어국문학과’라는 전공을 선택하고, 글과 말의 힘을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 일을 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 작품이기에 나만의 말과 생각으로 이 영화의 감상을 적어내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 <동주>, 흑백으로 비춘 동주
<동주>는 윤동주 탄생 100년을 딱 1년 앞둔 2016년도에 개봉한 작품으로 시인 윤동주의 삶을 모티프로 한 이준익 감독님의 영화이다. 이준익 감독님의 영화답게 서사의 흐름이 강조된 작품이자 흑백영화라는 점이 이 영화의 강렬한 인상에 한몫했던 것 같다. 내가 본 흑백 영화는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본 <로마의 휴일>이 전부였는데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묘한 향수에 젖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사실 요즘은 소비되는 것이 중요한 상업 영화들이 거의 대부분이기에 눈에 띄는 다양한 색감의 영화들이 많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도 명암으로 화면을 채운 ‘동주’ 특유의 차분함은 화려함 속에서 오히려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감독님은 왜 흑백 영화를 선택했을까? 가장 직관적으로는 어두웠던 당시의 시대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영화 속 윤동주와 송몽규
하지만 영화를 여러 번 다시 보니 영화가 흑백인 이유가 그뿐만이 아닐 것 같았다. 책은 흰 바탕의 검은 글씨만으로 독자들의 감정을 이끌어내지만 때로는 영화보다도 크고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책은 글을 통해 독자 상상력의 힘을 빌려 가며 제한 없이 작가의 생각을 펼쳐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시가 시인의 것이 아닌 독자의 것’이라고 이야기 한 것처럼 그 해석은 독자에게 따라 수만 가지가 될 수 있고, 이러한 점에서 <동주>가 흑백영화인 이유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각적 요소에서 ‘색’을 제외한 뒤 ‘명암’을 극대화해 전달한 화면을 보고 있자니 나 스스로 영화를 넘어선 배경과 서사에 색을 입혀가며 좀 더 진한 감정과 생각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문학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감독님께서 윤동주가 사랑한 ‘시’와 닮은 영화를 만들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20대 청년, 윤동주
또한, 윤동주는 동생들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동시를 많이 쓴 시인인데 사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영화에서도 그 점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를 쓰는 장면을 넣어 윤동주의 일상적인 모습과 따뜻한 감성을 모두 보여주려고 노력했다는 느낌이 들어 참 좋아하는 장면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처럼 영화 전반에 걸쳐 많은 사람들의 알고 있는 위대한 시인의 모습보다는 일제강점기 평범한 청년 윤동주의 모습에 주목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대입에 실패하고,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며,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는 윤동주의 모습을 통해 요즘의 청년의 모습이 보여 친숙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일상을 따라 전개하면서도 옥중 동주의 모습과 교차하며 전개되는 이야기의 구성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윤동주의 감정과 의식의 은근한 변화에 환기를 주어 진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영화 속 윤동주
송몽규과 윤동주, 서로를 빛내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송몽규’라는 인물이 주는 강렬한 인상을 무시할 수는 없다. 동그란 안경이 꼭 천진난만한 어린 학생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무모하다는 표현이 실례로 느껴질 정도로 강한 의지를 지닌 인물로 보인다. 내가 지닐 수 없는 순수함과 카리스마를 전부 지닌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자 솔직하게 ‘부러움’이라는 감정이 가장 먼저 들었다.
단순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느낌에서 윤동주와 교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 동주는 송몽규의 망설임 없는 의지력과 재능을 부러워하고 괴로워한다. 사실 이런 점에서 송몽규는 윤동주보다 더 전형적인 민족 영웅에 어울리는 삶을 산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존재는 윤동주의 삶과 확실히 대비되어 보인다.
영화 속에서 송몽규가 ‘불꽃’이라면 영화를 통해 본 윤동주는 ‘목련꽃’ 같은 느낌을 준다. 보통 사람들은 색이 선명한 장미를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그에 비해 새하얀 목련은 지고 나면 바닥에 새카만 자국을 남긴다. 나는 목련의 그런 점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흑과 백을 모두 지니고 있으며 한순간 피고 지더라도 그 향과 색을 진하게 남기는 끈질김이 오히려 생명감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그 멍 자국 같은 꽃잎들이 아스팔트 바닥에 새겨지고 나서야 매서운 꽃샘추위가 가고 따스한 봄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래서일까. 나 또한 이렇게 여운을 지닌 목련과 같은 윤동주를 닮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직함과 상처
나는 이러한 동주의 삶을 나는 ‘우직함’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다. 사실 우직하다는 단어는 ‘어리석고 고지식하다’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좋은 의미는 아니다. 의식적으로 고통을 지닌 채 살아가고자 하는 윤동주의 성찰적 태도는 그가 올곧은 방향으로 살아가고자 처절하게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아 안쓰러울 정도로 고지식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격해지는 것은 쉽지만 나 자신에게 엄격해지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 내가 나에게 하는 훈계와 충고는 누군가 나에게 하는 손가락질보다 아프다. 그런 나 자신이 하는 비난. 굉장한 아픔이다. 그 아픔이 곧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윤동주 시의 정서, 부끄러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넘어져 상처가 나면 이때 아무리 아파도 젖은 거즈로 모래와 피를 세게 닦아내야 흉터가 안 생기고 빨리 새살이 올라온다.
아픔과 기다림 없이는 새살이 돋을 수 없다. 그에게 ‘시’란 스스로 낸 상처를 닦아내는 젖은 거즈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중간중간 동주 역할을 맡은 강하늘 배우가 윤동주의 시를 읽어주는데 담담하게 눌러 담은 시들은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비로소 울컥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뱉어 내는 것 같아서 귀 기울여 듣게 된다. 그 목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왠지 모를 서러움으로 천천히 그리고 조용하게 달궈지는 감정이 생기는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를 '윤동주의 미완의 청춘을 기리는 정중한 필사작' 이라고 부르고 싶다.
[장미경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