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 세계 - 기생충, 2019 [영화]

글 입력 2020.04.1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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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생충

PARASITE, 2019

 

감독 : 봉준호

배우 : 송강호, 최우식, 박소담, 이선균, 조여정

 

가족 모두가 백수인 기택네. 그러던 어느 날, 장남인 ‘기우’는 친구의 소개를 받아 박 사장네 집으로 과외 면접을 보러 간다. 이후 자신의 가족을 이곳에 취업시키기로 마음을 먹은 기우는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신분을 숨긴 채 가족 모두를 박 사장네에 취업시키는데 성공한다. 한편 박 사장네는 막내 다송의 생일을 맞아 캠핑을 떠나고, 기택네는 텅 빈 박사장의 집에서 계획의 성공을 자축하며 술판을 벌인다. 그리고 그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손님이 기택네를 찾아오는데.

 

***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기우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그의 옆으로 다혜가 다가온다. 다혜는 그에게 자신과 키스할 때 딴 생각을 하고 있던 거 아니냐며 괜히 투정을 부린다. 그러나 기우는 다른 말을 내뱉는다. ‘다들 멋지다.’ 기우가 바라보는 정원에는 다송의 뒤늦은 생일파티를 위해 모인 박사장의 이웃들이 모여 있다. 하나같이 근사하고 품위가 넘친다. 기우는 고개를 돌려 다혜를 바라본다. 그리고 묻는다. ‘나 저기 있는 사람들이랑 어울려?’ 다혜는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준다. 그 말을 들은 기우는 가방에서 수석을 꺼낸다. 뭘 가져온 거냐는 다혜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그는 내려간다. 끝없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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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가족


 

영화 <기생충>에서는 두 명의 가족이 등장한다. 바로 기택네과 박사장네다. 언뜻 보면 이 두 가족은 영화 속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래도 속해 있는 계급이나 경제적 형편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속 갈등의 양상을 살펴보면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다. 사실 기택네와 박사장네는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제외하면 갈등을 거의 빚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박사장은 이상적인 고용주에 가깝다. 시간외수당도 따로 챙겨주고 가족행사에 손님으로 초대해 주기도 한다. 심지어 기택은 고마운 박사장을 위해 식사 자리에서 가족들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누가 진짜 대립관계를 이루고 있을까. 바로 기택네와 문광네다. 영화 속 대부분의 갈등은 이들 두 가족 사이에서 발생한다. 박사장네는 두 가족을 연결해 주는 연결고리에 가깝다. 다시 말해 박사장네는 그들이 살고 있는 집과 더불어 영화의 무대를 조성하는 일종의 환경적 조건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기생충>은 ‘기택네와 박사장네가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택네와 문광네가 박사장의 집에서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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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 영화를 계급 비판의 측면에서만 보는 건 다소 무리가 있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건 <기생충>이 계급을 다루는 다른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적지 않은 영화들이 하층 계급을 ‘선善’으로 두고, 상류계급은 그들을 착취하는 가혹한 ‘악惡’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기생충> 속 박사장은 그러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넘지 말아야 할 선’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하지만 기택네와 문광네를 착취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오히려 악한 건 기택네와 문광네다. 위장취업에 가택침입, 심지어 살인도 저지른다.

 

따라서 우리는 오히려 기택네와 문광네의 갈등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과 ‘우리’가 아니라 ‘우리 사이’의 갈등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기택네와 문광네는 ‘누가 박사장의 집에서 머무느냐’를 두고 갈등을 겪는다. 이러한 갈등은 윤기사가 기정을 데려다줄 때 접촉사고로 인해 다투는 두 남자의 모습을 굳이 길게 담는 카메라를 통해서, 기택이 자신들로 인해 직장을 잃게 된 윤기사를 걱정하자 ‘우리는 우리가 제일 문제잖아. 우리 걱정만 하면 되잖아’라는 기정의 말을 통해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어쩌면 우리가 진짜로 바라보아야 했던 건 더불어 살지 못하는 세상과 경쟁관계를 필연적으로 낳는 사회의 본질적인 속성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2) 그 꽃


 

그런 측면에서 <기생충>의 무대로 나타나는 ‘박사장의 집’은 제법 의미심장하다. 이 집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 안락한 상층과 누추한 하층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 구조는 영화 전반에 걸쳐 투영되어 있다. 일단 박사장이 사는 부자 동네가 언덕에 위치해 있다면 기택의 가난한 동네는 끝없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찾을 수 있다. 영화 중반부, 다홍의 갑작스러운 인디언 놀이에 기택네가 정체를 들킬 위험에 처했을 때도 박사장 부부는 안락한 소파 위에서 한때를 즐기는 반면, 기택네는 좁은 탁자 밑에서 숨을 죽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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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 플롯도 비슷하다. 위와 아래가 나뉘어 있다. 그리고 이 플롯은 기택네의 상승과 하강을 통해 이어진다. 박사장의 집에서 안락한 낮잠으로 시작한 그날은 체육관 마룻바닥 위의 선잠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기택네가 절망한 이유를 단지 낙차를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는 고은의 시가 있다. 그러니까 기택네가 절망한 진짜 이유는 올라갈 때는 보지 못했던, 이를테면 영화 속에서는 냄새로 표현되는, 자신에게 깊이 내재되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무언가를 내려갈 때 보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기택네의 하강은 그들이 문광을 따라 근세가 숨어 있는 지하실로 내려가면서부터 시작했다. 어쩌면 종숙이 그곳에서 경악했던 이유는 문광이 숨긴 비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을 비로소 제대로 목도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빗물이 몰아치는 기다란 계단 위에서 민혁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냐는 기우의 물음에 기정이 민혁에겐 이런 일이 안 생긴다며 절규한 이유는 메울 수 없는 그 간극을 인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다분히 영화적이고, 또 신화적이다. 파티가 한창 벌어지던 그때 기택은 이미 피로한 상태다. 박사장을 향한 존경은 거의 사라졌다. 남은 건 자신에 대한 환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해 문광네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뿐이다. 그러다 소동이 벌어졌다. 기택은 거기서 한 가지 진실, 또 다른 ‘그 꽃’을 발견한다. 자신의 가족과 문광네가 이토록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박사장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집에 머물기 위해 서로 싸웠다. 결국 기택은 이 비극의 진짜 원인이었던 박사장을 살해한다. 마르크스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나름대로 일종의 혁명을 시도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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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택의 혁명은 실패했다. 기택은 박사장을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비극에 대항하려 했지만, 그의 자리는 여전히 어둡고 습한 지하실이다. 박사장네가 떠난 집에는 어느 외국인 가족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숨어 살며, 훔친 음식과 모스부호로 연명한다. 그러니까 그 집에 누가 사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상층과 하층으로 나뉜 집 자체가 문제였다(이것이 영화 속에서 공산주의와 관련된 표현이 등장하는 이유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간에 결국 집을 채우는 내용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생충>과 봉준호의 바로 전작인 <설국열차>는 꽤 닮아있다. 단지 계급을 다루기 때문만은 아니다. <설국열차>에서 남궁민수는 진짜로 열어야 할 문은 기차의 칸을 연결하는 문이 아니라 기차 밖으로 나가는 문이라고 말했다. 만약 기택이 정말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면 그는 박사장이 아니라 ‘박사장의 집’을 없애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택은 집을 없애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기생충’이기 때문이다. 기생충은 숙주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만약 그가 집을 없애 버렸다면 그는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갔을 것이다. 그의 존재는 유폐되었을 것이다. 좋든 싫든 간에 기택은 ‘집’에, ‘그가 살아가는 사회’에 자신을 의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지하실로 걸어 들어가기를 택했다. 어쩌면 그가 갇힌 이 지옥의 모양은 도돌이표였는지도 모른다.

 

 

 

(3) 기우의 희망, 기정의 희망


 

그렇다면 <기생충>은 일말의 희망도 없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같은 세계였을까. 그건 아니다. 여기에서도 작지만 희망은 제시된다. 다만 문제는 그 희망이 번번이 좌절된다는 것이다.

 

기생이란 무엇일까? 사전에 따르면 ‘한 생물이 다른 생물의 영양분을 빼앗으면서 살아가는 관계’라고 한다. 흔히들 공생과 자주 비교하여 사용한다. 하지만 한 가지 오해가 있다. 사실 기생은 공생의 범주에 포함된다. 넓은 의미에서 기생과 공생은 같은 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박사장네와 기택네의 관계는 기생보다는 공생이라는 단어로 정의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박사장네 역시 기택네가 제공하는 노동력에 스스로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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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가 사람에게 ‘기생’과 ‘공생’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신에 사람에게는 ‘상생’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기생과 공생은 기본적으로 각기 다른 두 종 사이에서 나타나는 특수한 생존의 형태다. 비록 지금은 함께 도우며 살아가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일 뿐, 그 이상의 단계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 그들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이 정한 위치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기생충>에서도 이러한 선은 존재한다.


박사장은 젠틀한 사람이다. 이상적인 고용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매너는 어디까지나 고용인들이 선을 넘지 않았을 때에만 유효하다. 차에서 기정의 팬티를 발견한 박사장은 윤기사가 자신의 차에서 성관계를 나눴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뒷자리를 침범했다는 사실에 불쾌해한다. 다홍의 생일파티에서 자신의 깜짝파티 계획을 비아냥거리는 기택에게 박사장은 일이라고 생각하라며 강요한다. 물론 박사장만 그런 건 아니다. 영화의 초반부, 기택은 자신의 집에 숨어 사는 꼽등이를 손가락으로 튕겨 시선 밖으로 날려버린다. 아예 꼽등이를 박멸하기 위해 소독차가 뿜는 연기를 집안으로 들이기까지 한다. 단지 자신의 눈에 띄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이 꼭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선이 구분을 넘어 배타성을 띠게 되면 그건 문제다. 앞서 나는 박사장네와 기택네의 공존을 ‘공생’에 비유했다. 그들은 필요에 의해 서로에게 기댄다. 박사장은 기택의 노동력에, 기택은 박사장의 자본에 의존한다. 단 그 호혜적인 관계는 그들이 각자의 위치, 그러니까 선을 넘지 않아야만 유효하다. 그 사실을 박사장은 강요하고 기택네는 기어코 넘어선다. 만약 악어새가 쪼아 먹으라는 이빨 사이의 찌꺼기가 아니라 악어의 혓바닥을 쪼아댄다면 공생은 무너지고 악어새는 순식간에 악어의 뱃속으로 처박힐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공생과 상생의 결정적인 차이다. 선이 정한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쩌면 이 영화의 비극은 선을 넘었기 때문이 아니라 선이 존재했기 때문에 벌어졌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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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하고 처연한 이 세계에서 희망은 딱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나도 저 위에 올라설 수 있을 거라는 기우의 희망과 더불어 함께 살 수 있을 거라는 기정의 희망. 기우는 다혜에게 마당에 모인 손님들과 자신이 어울리냐고 묻는다. 다혜가 그렇다고 하자 기우는 그 대답을 실현하기 위해 수석을 들고 지하로 내려가 근세를 죽이려 든다. 반면 기정은 파티 음식을 준비하고 있던 종숙에게 문광네와 더불어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그러다 소동이 벌어졌고, 함께 살아가는 희망, 상생을 이야기했던 기정은 끝내 죽었다. 그런 세상에서 희망은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 어쩌면 지옥은 타인을 떠나 자기 자신조차 끌어안지 못할 때 강림하는지도 모른다.

 

결국 남은 건 기우의 희망뿐이다. 나도 저들처럼 올라서겠다는 희망. 영화의 마지막에서 기우는 기택에게 편지를 쓰며 다시 올라가겠노라 다짐한다. 그래서 슬프다. 쉽게 이룰 수 있는 꿈이 아니라서가 아니다. 문광과 근세가 떠난 후, 지하실의 자리는 이젠 기택이 대신한다. 따라서 기택의 존재는 기우에겐 자신의 처지를 상기시키는 또 다른 그 꽃이다. 앞으로도 그는 계속 그 꽃에 얽매일 것이다. 다시 말해 돈을 벌어 아버지를 지하실에서 끌어올리겠다는 그의 다짐은 근세를 죽이려 들었던 그의 행동과 ‘그 꽃’을 제거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다만 방식이 양식화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그의 남은 삶은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근세를 죽이기 위해 내려가던 지하실 계단의 반복일 것이다.

 

이제 기우는 공생하는 세상의 선을 기어코 넘어서 새로운 박사장이 되기를 꿈꾼다. 그리고 박사장이 그랬듯 또다시 새로운 선을 그으며 살아갈 것이다. 슬픈 건 이 세상에 남은 희망이 고작 그것뿐이라는 것이다. ‘나라도 잘 살아야지’라는 희망이 지배하는 세상. 침몰하는 배에나 어울릴 법한 희망이다. 어쩌면 우리는 올라간다는 환상 속에서 다 함께 조금씩 가라앉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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