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nion] '실재의 귀환', 외상적 리얼리즘과 팝 아트 [도서]

글 입력 2020.03.31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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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 포스터, <실재의 귀환>


 

최근 들어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남는 시간을 그래도 알차게 보내 보고자 작년에 사 놓고 내버려 두었던 책을 읽기로 했다. 그런데 그 책을 끝까지 읽으며 각주에서 유난히 자주 등장해 눈에 띄는 참고문헌이 있었다. 바로 핼 포스터의 <실재의 귀환>이었다. 미술의 흐름을 전 시대에 걸쳐 순차적으로 나열하는 책이었음에도 책 전반에 걸쳐 꾸준히 언급되고 있었기에 이 책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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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핼 포스터(Hal Foster)
 
 
<실재의 귀환>의 저자 핼 포스터(Hal Foster)는 1955년에 출생해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활동하고 있는 미국의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사가이다. 그는 <아트 인 아메리카>의 수석 편집자, 휘트니미술관 독립 연구 프로그램의 비평 및 전시 연구 부문 책임자, 코넬 대학교 교수에 이어 현재 프린스턴대학교의 현대미술사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옥토버>지의 공동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실재의 귀환>의 내용을 논하기에 앞서 출판사 서평의 첫 번째 문단을 살펴보자.
 
“이 책 {실재의 귀환}은 동시대 미술에 대한 핼 포스터의 현재적 관점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책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실재’에 대한 관심이다. 여기서 실재는 라깡적 의미에서 쓰인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1970년대의 텍스트로서의 예술이라는 패러다임이나 1980년대의 시믈라크라로서의 예술 패러다임, 다시 말해 동시대 미술과 이론에서의 기호 이론의 우위에 대한 새로운 전복의 흐름을 주시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실재의 귀환이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실제의 몸과 사회적인 장소에 근거하려하는 미술과 이론에서 나타나 있다고 평가하며 이로써 새로운 아방가르드 미술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고 있다.” - 경성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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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도 명백히 하고 있듯이, 이 책의 주된 흐름이 되는 것은 ‘실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의 중심 줄기는 현대미술 비평의 큰 주축인 네오-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의 고찰로, 서론을 포함하여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저자는 한 권의 책으로 엮기는 했으나 각 장들을 따로 읽어도 문제가 없으리라고 명시해 두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5장 <실재의 귀환>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팝 아트와 외상적 리얼리즘

 

저자는 5장의 시작에서 환영주의의 부활 내지는 재점화를 언급한다. 이는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며 뜨거운 논박을 불러일으켰던 미니멀리즘의 반환영주의에 다시 한 번 반하는 것이다. 미니멀리스트들은 회화에서 다른 장르의 특성을 몰아내고 그 자체만의 특징을 시험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굳건히 하려 했던 모더니즘의 추상표현주의에서도 인간의 형태를 읽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환영주의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1960년 이후 미술은 일부 팝아트와 수퍼리얼리즘, 일부 차용미술에 의해 다시 리얼리즘 혹은 환영주의에 귀속되었다고 밝힌다.
 
이때 저자는 ‘재현’을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 번째는 고전적으로 익숙한 개념으로, 이미지는 그 지시 대상과 결부되어 있다고 보는 재현이다. 그러나 두 번째는 지시 대상의 재현이 아닌 다른 이미지의 재현, 곧 자기 지시적·자기 복제적인 시뮬라크르의 한 형태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모델은 저자가 리얼리즘의 귀속의 단초로 언급하려는 ‘팝 아트’의 요점을 놓쳐 버린다.
 
그렇다면 팝 아트가 암시하는 실재는 어디에 있을까? 저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팝 아트의 주역인 앤디 워홀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관점을 소개한다. 그중 앞서 설명한 재현의 두 가지 모델 중 두 번째 모델, 곧 시뮬라크르로 이 작품을 바라보는 자들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작품의 지시적인 깊이, 주관적인 내면성이 팝의 피상성에 희생되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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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디 워홀, <전기 의자>, 1964
 
 
그러나 미국의 미술 평론가 토마스 E. 크로는 두 가지 모델 중 첫 번째에 가까운 지시적 견해를 가지고 워홀에 관한 시뮬라크르적 설명을 논박한다. 그는 워홀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대중문화의 미디어스타나 상품의 이미지 아래에서 “고통과 죽음의 실재”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관련하여 대표적인 작품은 <전기 의자>로, 사형 집행에 사용되었던 전기 의자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사형 제도에 반대하는 선전 선동으로 본다. 즉 그는 워홀을 정치적인 참여자로 위치시킨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상반되는 이 두 가지 시선을 모두 옳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팝 아트를 ‘외상적 리얼리즘’의 견지에서 읽는다면 말이다.

 

“누군가가 그랬는데, 내 삶이 나를 지배해 왔다는 거예요. 나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어요.”


- 앤디 워홀

 

 
이 말은 수열적인 생산과 소비의 사회에 의해 작동되는 반복에 가해지는 강박을 타파할 수 없다면, 역으로 가담하라고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강박에 전적으로 가담하게 되면 그 강박의 ‘자동성’과 ‘자폐성’을 폭로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는 곧 팝 아트에 대해 오고 가는 상호 대립적인 의견들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논하기보다는, 그 내부의 자체적인 역설을 논하자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워홀의 작품 속에서 “충격 받은 주체성”과 “강박적인 반복”에 주목한다.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같은 이미지를 여러 번 인쇄함으로써 발생하는 워홀의 반복은 본질을 유지하고자 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확히 똑같은 것”을 만들기 위함이다. 반복을 거듭하다 보면 원본 이미지의 의미는 사라지고 감정적 영향에 맞서게 된다.
 
그러나 워홀의 반복에서는 외상의 의미를 회피하려는 격리와 동시에 그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개방이 이루어지고, 외상의 감정적 영향에 맞선 방어와 더불어 그런 감정적 영향의 산출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이때 저자가 반복적으로 거론하는 ‘외상’ 개념은 라캉의 이론을 따른다. 1960년대 초에 라캉은 실재를 외상의 견지에서 규정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외상과 반복

 

먼저 라캉의 외상 이론에 대해 알아보자. 라캉에 따르면 ‘외상적인 것’이란 실재와의 어긋난 만남이다. 말 그대로 어긋난 만남이기 때문에 실재는 재현될 수 없으며 단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때의 반복은 워홀의 반복처럼 실재를 가리는 동시에 실재를 가리키기도 하고, 결국 실재는 반복의 스크린-이 개념은 추후에 자세히 설명된다-을 파열시킨다. 이때의 파열은 이미지에 의해 건드려진 주체의 지각과 의식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때 이러한 외상적 지점을 라캉은 투셰(tuché)라고 칭하고, 롤랑 바르트는 같은 개념을 ‘푼크툼(punctum)’이라고 칭한다. 이 개념을 추가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프랑스의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는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스투디움(studium)’ 개념과 함께 등장시킨다. 먼저 스투디움은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널리 공유하는 사진 해석의 방식으로, 일반적인 해석의 틀에 따른다. 보도 사진이나 포르노그래피 등이 스투디움으로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이는 곧 사진작가의 의도대로 사진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반면 푼크툼은 스투디움을 깨뜨리는 것으로, 스투디움과는 달리 지극히 개인적인 감성이다. 사진 속의 특정 요소가 감상자를 찌를 때 나타나는 것으로, 일반적인 의미 구조가 아닌 세부적인 것에 대해 감상자가 독특한 체험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대체로 예술사진이 이에 해당한다. 즉 스투디움은 보편적이고 분석적인 맥락을 주로 만들어내는 데 비해 푼크툼은 개인적 취향이나 남과 다른 나만의 경험, 내 잠재의식에 숨어 있는 무의식 등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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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디 워홀, <앰뷸런스 재앙>, 1963
 
 
그리고 저자는 워홀의 작품 속 푼크툼은 내용을 통해서보다는 기법을 통해 발생한다고 본다. 실크스크린 기법을 통해 이미지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이미지가 바래지거나, 미끄러지거나, 줄무늬가 들어가는 등의 기법은 실재와 우리의 어긋난 만남, 곧 외상적인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예시로 워홀의 <앰뷸런스 재난>에서 저자가 말하는 푼크툼은 아래쪽 이미지에서 뜯겨나가 여자의 머리를 지워버리는 부분이다. 정리하자면 워홀의 작품 속 반복은 푼크툼을 일으키며 첫 번째 단계의 충격을 가린다. 하지만 동시에 두 번째 단계의 외상을 생산하기도 한다.
 
이러한 푼크툼은 실재를 거의 건드린다. 그리고 계속해서 언급한 것처럼 반복은 실재를 우리로부터 멀리 떼어놓는 동시에 우리를 향해 밀려들게 하는 모순적인 지점을 갖는다. 이는 곧 워홀의 반복 속 역설로, 외상적 실재에 고착된 반복, 외상적 실재를 가리는 반복, 외상적 실재를 생산하는 반복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즉 저자는 팝 아트를 ‘외상적 리얼리즘’과 연결해서 외상적인 반복으로 인한 푼크툼 혹은 투셰는 실재를 가리지만 동시에 생산하기도 하며 그 의미를 탐색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팝 아트 이외의 다른 장르, 수퍼리얼리즘과 차용미술은 외상적 환영주의에 포함시켜 해당 작품들 속의 실재에 대해 계속해서 논한다. 여기까지는 5장의 초반부부터 중반부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다음 글에서 나머지 부분을 정리할 것이다.
 
*
 
5장을 읽으며 계속 가질 수밖에 없는 의문은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저자는 실재를 무엇으로 규정하는가?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된 2003년에 쓴 저자 서문에서 그는 ‘실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제가 여기에서 말하는 "실재"는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 번째는 일상적인 의미로, 일부 미술가들이 거의 인류학적인 방식으로 탐사하고 있는 사회적 현실을 뜻합니다. 두 번째는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인데, 또 다른 미술가들이 도발적인, 그리고 때로는 위반적인 방식으로 탐색하고 있는 외상적 현실을 뜻합니다.”
 
즉 5장에 등장하는 팝 아트나 수퍼리얼리즘 등에서 언급되는 실재란 후자인 셈이다. 하지만 전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6장은 아직 읽지 않았기 때문에 저자의 목소리가 예술의 실재를 두고 어떤 방향을 추구하는지는 아직 섣불리 추측할 수 없다.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예술의 목적, 어떻게 보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실재를 호명하고자 하는 수많은 노력들의 가치이다. 미술계의 흐름을 방관하지 않는 모든 이들의 노력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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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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