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인의 고독에 대하여 [도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글 입력 2020.03.07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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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겐 단 한 가지 길밖에는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가서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지 확인해보십시오.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이것을 무엇보다 당신이 맞이하는 밤 중 가장 조용한 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글을 꼭 써야 하는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답을 얻으려면 당신의 가슴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십시오. 

만약 이에 대한 답이 긍정적으로 나오면, 

즉 이 더없이 진지한 질문에 대해 당신이 "나는 써야만 해"라는 강력하고도 짤막한 말로 답할 수 있으면, 

당신의 삶을 이 필연성에 의거하여 만들어 가십시오. 

 

  

당신의 삶은 당신의 정말 무심하고 하찮은 시간까지도 이 같은 열망에 대한 표시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中

 

 

 

들어가며



시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대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이번에 접하게 되었다. 나는 일찍이 찾은 적 없던 이 이름에 이미 익숙함을 느끼고 있었다. 왜일까. 왜일까. 괜한 궁리를 하다 보니, 이내 그 옛날이 떠올랐다. 왜, 있지 않은가.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윤동주 - 별 헤는 밤 中

  

 

한컴타자 별헤는밤.jpg

엔터를 쳤을 때의 투박한 비프음이 들려오는 듯하다.



한컴 타자연습의 긴 글 연습 주제 중, 단연코 가장 인기 있던 그 시에서였다. 이 시는 최소한 90년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친밀한 시가 아닐까. 학교 컴퓨터 시간에건 컴퓨터 학원에서건, 타자연습이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던 그때, 슬그머니 어깨너머로 무엇들 치는가 한 번 보면, 몇 ‘메밀꽃 필 무렵’과 ‘동백꽃’을 제하곤 열에 여덟이 이 시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내가 이 시를 접한 것도 대충 초등학교 컴퓨터 시간이었으니, 그것도 한컴 타자연습 도중이었으니, 나는 저 이름을 똑똑히 보지 않았고 기억에 남았을 리도 없을 듯하다. 평균타수 500을 위하여 내달리던 나의 손과 눈은 그 이름을 똑똑히 보았을 리 없다. 그러니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리도 없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친근하게 닿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런가 하니, 이 시에 무언가 아름다움을 느끼던 내가 이내 기억에 떠올랐다. 이제는 타자연습이 아닌 이 시를 읽기 위하여 타자를 치던 내가 이내 기억에 떠올랐다. 몇백 번을 쳤던 이 시. 그렇다면, 몇백 번을 쳤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이구나. 그때에는 그저 어감이 좋은 먼 이름에 불과했던 것이 십수 년을 지나 내게 닿은 것이겠구나.


이 책의 등을 이렇게 다시 쓸고 있으니, 하나의 책이 내게 닿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우연을 필요로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나아가 그 책을 기어이 펴내기 위해서, 그 안의 활자와 생각들이 나의 망막을 통과하기 위해서, 그리곤 명확한 공감으로 이 안에 도사리게 되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우연을 필요로 하는가 괜스레 생각하게 된다.


우연히 참여한 ‘출판산업 세미나’에서 선물로 받게 된 책이었다. 그리곤 조용히 먼지를 품어가며 전혀 없던 양 잊히었고, 이내 다시 우연으로 떠오른 책이다. 그런 책에 큰 울림을 느끼고 이제는 서평을 쓰고 있다니…

 

 

 

책 소개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표지.jpg

(고독으로부터 찾는 해답)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김재혁 옮김

 

 

책은 대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카푸스라는 한 젊은 시인에게 보낸 열 편의 편지를 묶어낸 것이다. 릴케와 카푸스는 군사학교 동문이다. 어느 날 한 스승이 카푸스에게 릴케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문학청년이던 카푸스는 자신의 학교 선배이자 문학계의 대선배인 릴케에게 자신의 습작과 고뇌를 편지로 실어 보내게 되었다.


카푸스의 편지는 글 안에 실려 있지 않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인 릴케의 편지를 통해서, 우리는 카푸스가 어떤 고뇌를 편지 안에 실어 보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친숙한 성질의 것,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우리 모두의 두려움과 똑 같았다.


 

당신은 당신이 쓴 시들이 좋은 시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번에는 나한테 묻고 있습니다.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은 것을 물었겠지요. 

 

당신은 그 시들을 잡지사에 보내겠지요. 

당신은 당신의 시를 남의 시와 비교해보기도 하고, 잡지의 편집인들이 당신의 노력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겠죠. 

 

나는 이제 당신에게 그 모든 것을 제발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눈길을 외부로만 향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그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충고하고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두 고독


 

이 책의 부제는 ‘고독으로부터 찾는 해답’이다. 과연, 편지글 내내 고독의 개념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고 보면, 내 방 어느 구석에서 아주 잊혀 사라져 있던 이 책이, 까닭도 몰래 번쩍 저 자신을 떠올리게 한 것도 이 단어 ‘고독’이었다. 그것은 아마, 그때의 내가 어떤 쓸쓸함 속에서 길을 찾고 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고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어감상 조금 과하다는 인상을, 맨 처음엔 지었다. 가지고 있는 쓸쓸함을 두고 고독이라 부를 것까지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부끄러움이 자아내는 질문이다. 나의 지금 느끼는 감정이란 그저 외로움과 쓸쓸함이고, 그것은 나의 부족함 때문이며, 그 외로움에 대하여 스스로 모종의 부끄러움을 가진다면. 이때 나의 외로움을 고독이라 칭하기가, 나는 어려웠다. 

 

무언가, 적합하지 않다는 직감을 강하게 가졌던 것이다. 그것은 내 지금에 부여하기에는 당치 않은, 흠모할만한 ‘시인적’ 詩人的인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고독이란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되, 무언가 아름다운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고독이라는 단어를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볼 수 있을까. 사실이 우리는 많은 것들에 대하여 직감에 기인한 즉흥적 판단을 내리곤 하는데, 외로움과 고독과 같이 무언가 다르다는 사실만이 감지되고 정확히 무엇이 다른지는 알 수가 없는 두 단어의 사이에서, 그러므로 질문은 발한다.

 

둘은 무엇이 다르냐 하는. 그를 생각해보기 위해서 나는 추상 단어 ‘고독’을 떠올리고, 그것이 자동으로 연상하는 어떤 이미지를 샅샅이 조망하고자 한다. 심상 속의 어렴풋한 이미지에 집중하여, 그를 선명하게 만든 뒤 찬찬히 뜯어보기로 한다.

 

내 안에서 고독이 가지는 이미지, 그러니까 고독의 원형 심상은 내 유년의 기억 속 할아버지에 닮았다. 고향 집 뒤 켠 못둑의 제방 위에 선, 은발의 리젠트가 어울리는 신사가 앞의 끝없는 논밭과 그 너머의 지평선과 또 그 너머 자신의 과거를, 지금의 제방 위에 이르기까지 멈추질 못해 흘러 흘러 나리기만 하던 나의 삶을 바라보는 때의, 그 한없이 고적한 눈빛에 닮았다.

 

그것은 얼마간의 외로움이고, 또 어찌 손써볼 수 없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저 고요히 바라볼 밖에 없는 것들을 향하는 저 눈빛에 닮았다. 그래, 내가 생각하기로서 그의 눈빛에는 이런 손 쓸 수 없는 외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분명 고통일 것이다. 그의 눈 아래로는 투명한 눈물이 정지해 있는 듯하다. 눈물도 소리도 없이 영영 흐느끼는 얼굴. 내 사랑하는 나의 할아버지는, 애처로우면서도 아름다운 노인이었다.

 

 

노인 1.jpg

옛날, 내 할아버지의 눈빛과 참 닮았다.

 

 

과연 고독이 아픔인 것은, 손 쓸 수 없는 외로움인 때문일는지. 외로움 자체로도 아픈 것이지만, 손 쓸 수 없어 더욱 아픈 것이 되는 때에 우리가 그로부터 할 수 있는 한의 도망을 꿈꿔보는 일이란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애초 나로부터의 불가능한 도망임을 우리가 또한 어렴풋이 알고 있기에, 그것을 직시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진실이 된다.


나는 처한 지금 이곳, 내 마음의 제방 위에서 눈 앞에 펼쳐진 논밭과 그 너머의 지평선을 바라보다간, 시야의 경계 너머 어떤 환상들을 추억하고 있다.

 

그런가 하니, 또 내 가장 사랑하는 어떤 이가 떠오른다. 시인 백석이다.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잼`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 흰 바람벽이 있어 中

 

 

내 가장 사랑하는 이 시를 인용하기 전까지, 여기에도 ‘프랑시스 잼’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있는지를 몰랐다. 이제야 찾아보니, 동주가 백석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그리고 둘 다 릴케의 영향을 받았음이란, 굳이 찾아볼 필요 없겠다.

 

백석이 그리고 있는, 설명하고 있는 어떤 고독은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되’, 높았다. 여전히 시의 화자는 바람을 겨우 면하는 사방의 흰 벽의 안에서, 그 위로 그 옛날의 어머니와 한때의 사랑하던 이를 환영하는, 분명한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말이다. 뉘께 보여드리기도 면구스러운 공간 속에서 부끄러운 환상 통을 겪고 있는데 말이다.

 

그 까닭인즉 이 고독이 가리키는 바가, 너무나 큰 사랑이 있었기에 발생하는 빈자리로서의 슬픔이었기 때문이겠다. 고독은 사랑, 그것도 너무나 큰 사랑이 있던 흔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큰 사랑이 하늘(종교적 신은 아닐 것이다)의 간택하심 그 증거이며, 그것이 우리를 드높인다는 말이었다. 고독함이란 너무도 큰 사랑으로 생겨나는 슬픔이라면, 분명 애처로운 역설의 아름다움을 띈다. 시인의 말씀을 따르자면 초승달과 같이 말이다.

 

 

초승달.jpg

초승달의 역설은 무엇일까?

아직은 초승달의 아름다움만을 알겠다.

 

 

이 각각의 고독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각각의 고독한 모습에 무언가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내게 아직 없는 것이다. 내 할아버지의 고독함에는 이미 손 쓸 수 없는 막대한 시간이 자리해 있었고, 그것이 여전한 슬픔이라지만 그를 견뎌내는 모습 속에서 흠모할 아름다움이 배태된다.

 

도망치지 않기로 한 어떤 나약한 인간의, 눈물겨운 감내인 때문이다. 보상도 증명도 없는, 고요한 투쟁인 때문이다. 나약한 이가 끝없는 고통을 두고 도망하는 것은 당연한가 물어보면, 그것은 자연스러우나 위대한 것은 못 된다고 누군가 답한다. 그렇다면, 나약한 이가 끝없는 고통을 두고 도망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어떠한가 물어보면,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아 위대한 것이라고 누군가 답하다. 그저 자연스러운 것은 손쉬운 일들을 칭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그건 당연한 거지.”라고 손쉽게 칭하는 모든 것들을 말이다.

 

어찌 보면 체념함이지만, 또 어찌 보면 담담한 받아들임인, 눈물 없이 흐느끼는 눈빛은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면 아름답다. 어린아이의 눈높이에서 위로 올려다 보는 때의 각도에서, 저 눈빛은 너무도 슬퍼 보이는 동시에 아름다웠다. 이는 참 역설적일 것이다.

 

백석의 고독은 너무도 큰 사랑의 반증으로써 아름다워진다. 물론 그의 시는 하나의 시도, 즉 자체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선언이라지만, 어땠든 그저 기피되는 고독을 끌어안기 위하여 마련한 역설은 분명 놀랍다.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것만으로는 고독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것은 비로소 높을 때야 고독으로 이름 된다.

 

이렇듯, 각자 조금 다른 모습을 가지는 고독에는, 모두 흠모할만한 것인 아름다움, 위대함이 배태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릴케가 말하는 고독은 어떤 개념일까.

 

 

 

릴케의 고독


 

 

위대함을 지니지 못한 고독이 대체 무슨 고독이란 말인가? 

(이렇게 스스로 물으십시오) 

고독은 단 하나뿐이며, 그것은 위대하며 견뎌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의 누구에게나 고독을 버리고 아무하고나 값싼 유대감을 맺고 싶고, 마주치는 첫 번째 사람, 전혀 사귈 가치조차 없는 사람과도 자신의 마음을 헐고 하나가 된 듯한 느낌에 빠지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고독이 자라나는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고독의 성장은 소년들의 성장처럼 고통스러우며 막 시작되는 봄처럼 슬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꼭 필요한 것은 다만 이것, 고독, 즉 위대한 내면의 고독뿐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 몇 시간이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 바로 이런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는 고독을 아예 ‘위대함’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위대함이 없는 고독은 사실 고독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독이 위대한 까닭은, 일단 그것이 견뎌내기 어려운 까닭에 있었다. 견디기 어려운 심리상태인 쓸쓸함은 누구에게나 도망과 기피의 감각을 일깨우는 고통임을, 우리는 모두 얼마간 체험하며 컸다. 약속인 듯 모두에게 찾아오는 쓸쓸함. 우리의 첫 쓸쓸함은 언제였을까. 누군가는 바로 그때, 소년과 소녀의 마음에는 어두운 공간이 마련된다고 하였다.

 

어머니, 아버지, 동무들의 웃는 낯과 멀리 빛나는 태양과 그 너머 완연한 기대감과 고양감의 힌트로 넘실거리는, 행복으로 완결된 세계에 금이 가고, 여기 어딘가 안에 어두운 곳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하였다. 그곳은 앞으로 우리의 모든 슬픔 들이 쌓여가는 곳이고, 여기에 작고 초라한 나의 모든 파편 또는 단편은 흘러들어와 응어리를 빚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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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는 것만으로 무언가는 위대해지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조금 더 상술해보자면, 마땅히 행해야 하되 행하기 어려운 것을 위하는 견뎌냄이 위대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렇게 가정해보니, 고독의 마땅한 필요성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아야겠다.

 

 

당신에겐 단 한 가지 길밖에는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가서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지 확인해보십시오.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이것을 무엇보다 당신이 맞이하는 밤 중 가장 조용한 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글을 꼭 써야 하는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답을 얻으려면 당신의 가슴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십시오. 

만약 이에 대한 답이 긍정적으로 나오면, 

즉 이 더없이 진지한 질문에 대해 당신이 "나는 써야만 해"라는 강력하고도 짤막한 말로 답할 수 있으면, 

당신의 삶을 이 필연성에 의거하여 만들어 가십시오. 

 

당신의 삶은 당신의 정말 무심하고 하찮은 시간까지도 이 같은 열망에 대한 표시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시를 써도 되겠느냐는, 카푸스의 질문에 릴케는 위와 같이 답하였다.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물어보라고 말이다. 그것은 그저 우리 일상에서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의 의식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맞이하는 밤 중 가장 조용한 시간’ 즉, 완벽한 침묵과 홀로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에게만 온 집중을 가할 수가 있는 시간과 그러한 공간 속에서나 꾀함 직한 깊은 의식이다. 낮에 들을 수 없던 목소리는, 깊은 밤 귀또리 소리를 타고서야 들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그 침잠을 위해서 우리는 홀로 될 필요가 있다. 주위 환경에 아랑곳없이 안으로 침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해보면, 떠올릴 수 있는 이란 부처 정도뿐이라, 역시 일상의 우리는 침잠을 위해 완벽한 고요와 홀로됨을 필요로 한다고 결론짓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처한 내면에서만이,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필요가 빚어내는 어떤 목소리를 환영처럼 들을 수가 있었다. 우리의 낮은 우리의 전부가 아님에. 잊힌 많은 것들이 이 안에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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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당신의 귀에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감방에 당신이 갇혀 있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당신의 어린 시절을, 왕이나 가질 수 있는 그 소중한 재산을, 기억의 보물창고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곳으로 당신의 관심을 돌리십시오. 까마득히 머나먼 옛날의 가라앉아버린 감동들을 건져 올리려고 애써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개성은 더욱 확고해질 것이고, 당신의 고독은 더욱 넓어질 것이며, 당신의 고독은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리 비껴가는, 어둠에 잠기기 시작한 집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내면으로의 전향으로부터, 자신의 고유한 세계로의 이 같은 침잠으로부터 시가 흘러나오게 되면,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시가 좋은 시인지 아닌지를 묻는 일은 생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감각이 적은 때에야 처할 수가 있는 우리 깊은 내면은, 달리 표현해보자면 모든 감각이 거세되어 없는 때에도 처할 수 있는 곳이다. 이 안에는 여러 기억인 ‘이미지’와 그 곁의 ‘감각’들, 그리고 숱한 지식과 생각 등인 ‘활자’들이 갈무리 되어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도 모르는 곳에 쌓이어 있고, 아무런 의식과 집중과 의지 없이는 이 창고 안을 들여다보는 때에 다만 어둠밖에 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마치 조용한 냉탕에 잠수하고 있을 때의, 답답하고 캄캄한 감각 만을 건지어 나오게 된다.

 

그냥 조용한 곳에 앉아서, 일단 무작정으로 내면에 대한 집중을 시도하기로서니 무언가를 건지어 나오기는 분명 어려웠다. 이 안의 모든 것은 나의 의지로 나아가는 하나의 음악인 때문이다. 말하자면, 의지가 쉴 새 없이 레버를 돌려야만 재생되는 어떤 오르골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어떤 주제나 문제의식을 안고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따라 깊이 들어간 내면의 위로 무언가 떠오른다. 일상에서 떠올리지 못한 무언가가 떠오른다. 그것은 이미지일 수도 있겠고 글자일 수도 있겠다. 무엇이 되었건 이를 두고 직감이나 영감의 ‘대화’라 부른다.

 

예컨대 일 년의 기다림 끝 잃어버린 봄의 어느 날, 문득 이전에 맡은 꽃향기가 그리워 몸서리치게 되는 서러운 때면, 아주 조용한 곳을 찾아 눈을 감고 이 안을 들어가 보다. 아직 만날 수 없는 것들을 만나러 가다. 오롯한 집중을 통해 무겁고 어두운 공기가 내 어깨 위로 내리 앉았다는 착각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나는 어떤 그리운 향기를 그리어 본다. 분명 감각했던 그것을, 그 향기와 맛을 떠올려 본다. 물론 이것은 실제의 감각과는 아주 거리감 있는 것이고 갈증만을 돋우는 환영일지도 모른다지만, 아련히 맡을 수 없이 먼 향기를 그려볼 수 있었다.

 

이젠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어두워진 극장에 나는 들어서면, 홀로 밝아진 무대 위로 내 사랑하던 이가 춤을 춘다. 백석이 바람벽 위로 본 그것들 같이 말이다. 그때 나의 의식은 그녀가 흩어질 것을 두려워하며 열심히 영사기를 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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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을 들어가라는 추상적인 말은, 이미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집중을 기울여 이 안의 어둠 위로 옛 갈무리된 기억을 떠올리어 복원하라는 말이고, 나아가 그 장면들이 던지는 감각의 힌트들을 바탕으로 하나의 경험을 ‘만들어’내라는 말이며, 활자에 대해서는 이 어두운 공간 속에서 하나의 문제를 두고 일상의 자아와 비판적/이성적 자아가 대화를 나누어 그것을 회의록으로 남기라는 말이라 풀어쓸 수 있을 것이다.

 

릴케는 그 기억 중에서도 유년의 기억과 감상들에 주의를 기울인다. 유년 시절은 우리에게 거의 흩어져 소실된 기억이라지만, 아주 가끔 거짓처럼 떠오르는 기억이기도 하다. 마치 이 글의 서두에서처럼. 한컴 타자연습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떠올라 복원된 그 옛날 구식 컴퓨터의 본체가 내는 비프음과 같이 말이다. 그 유년들은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우리의 원형인 순수이다.

 

이미 짜인 관념들에서 자유로운, 유년의 많은 것들은 자유롭다. 우리는 자유로웠다. 그래서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우리의 유년을 추억하며 찬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유로운 감각과 해석들,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우리 감상을 자유롭게 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개성’이라는 이름의 걸맞은 곳일 것이다. 릴케는 그렇게 흘러나온 나의 것들, 달리 말하자면 생의 체험을 통해 변용되거나 유도되지 않은 나의 원형인 개성들이 목소리로 분출되면 시가 된다고 하였지. 다른 것들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이 내게 맞는 옷일 테니 말이다.

 

물론 여전히, 낮 동안은 다른 이를 맞기 위하여 온전한 나로 있을 수 없겠지만,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 어린 때의 모습으로 있을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가끔 나는 내게 맞는 옷으로 갈아입을 필요를 느낀다. 손님을 맞기 위해 발달해 온 나의 이지들.

 

그러나 영원한 손님도 영원한 접객도 없기에 손님을 보내고 나의 홀로된 시간으로 돌아오면, 쉼을 위하여 잠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그를 위해 잊고 잃어버린 나의 옷을 우선 찾아야만 했다. 이것이 고독의 마땅한 필요성이겠다. 참 나를 위하고 찾는 일, 그를 위해서 이 안을 들어가 물어보는 일. 고독은 이 일이 필요로 하는 환경적 조건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기로서니, 일상의 내내 깃든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이들도 떠오른다. 맞을 손님이 없어 한없이 쓸쓸한 나의 사랑방은 무엇으로 달래느냐고 반문하는 얼굴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우리는 또 한편 인간을 사랑하는 숙명을 안고 난 존재들이기에. 사랑이라는 필요가 없이 우리가 이렇듯 손님을 바랄 일 없었을 터이니. 그런 이에게 고독의 마땅한 필요성이란 참사랑을 위하여 필요한 기다림과 견딤에 있을 것이다. 외로움이 고통으로 방문을 열어젖힌들, 우리는 아직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거의 누구에게나 고독을 버리고 아무하고나 값싼 유대감을 맺고 싶고, 마주치는 첫 번째 사람, 전혀 사귈 가치조차 없는 사람과도 자신의 마음을 헐고 하나가 된 듯한 느낌에 빠지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랑이 너무 크고, 그것이 계속 혼자 사랑방에 맴 도는 바람이 되면 사랑은 그 낯을 잃어간다. 내가 인간을 필요로 하되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었듯, 내가 찾는 사랑의 낯이 분명 있는 것이다. 사랑이 불길하게 감도는 바람으로 오래도록 표류하면, 그 낯이 점차 흐려지고 두려움과 고통만이 인식된다. 어쩌면 그 붉은 것들의 노골적인 색 뒤에 낯이 가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아무께나 쏘아진 마음은, 그와 마주한 뒤 알게 될 것이다. 그곳엔 나의 찾던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떤 이는 다시 방으로 돌아올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너무도 지긋지긋한 방이 싫어 그를 맴돌고 있을 것이다. 이때는 그 스스로가 바람이 된다. 그는 표류하는 그 스스로가 되어, 한동안 인간에서 인간으로 헤맬 것이고, 점차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왜 인간 속에서 나는 늘 외롭지?’하는…

 

이 모든 것이 너무도 큰 사랑 때문이라면, 그리고 그것은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참사랑을 찾는 어느 때까지 인내할 필요를 가진다. 속일 수 있는 것은 얕은 의식인 대낮의 의식뿐, 깊은 내면의 어둠 속 본질은 기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가 바라는 어떤 사랑의 낯을 찾아야 할 필요를 가진다. 깊이 들어가 대화하며.

 

또한, 너의 사랑이 고통을 일어 그 고통이 내 감정과 감각의 눈을 가리더라도, 방 안에서 기다릴 필요를 가진다. 다시 너를 평온한 눈으로 바라보기 위하여, 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하여 잠시 고독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이 고독의 마땅한 필요성이다. 그 고독을 위해 우리는 스스로 다독이는 것이다. 네 고통은 너무 큰 사랑 때문이고, 그것은 하늘의 귀히 여김을 받은 아름답고도 가여운 일이라고.

 

 

나는 당신의 직업이 매우 힘들고 까다로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그와 같은 직업에는 엄청난 무게의 인습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것의 문제점에 대해서 개인적인 견해를 피력할 여지를 거의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고독은 당신에게 아주 낯선 상황 속에서도 당신을 위한 의지처이자 고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바로 고독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당신의 모든 길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에게 고독은 내면의 의지처이자 고향이고, 모든 내적인 생각의 출발점이다. 그곳이 본질이 숨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간의 숲에 갑자기 홀로 처한 개인이 이른바 ‘군중 속의 고독’으로 흔들리는 때, 그리하여 그의 의식이 아득하여 조급해지는 때면 고독으로 돌아오는 편이 좋겠다. 그것이 실제의 고독한 환경이건 추상적인 내면 영역이건 간에 말이다. 아득하여 생기는 조급함은 참된 선택을 위해 필요로 하는 궁리를 어렵게 하므로.

 

 

그러므로, 친애하는 카푸스 씨, 당신의 고독을 사랑하고 고독이 만들어내는 고통을 당신의 아름답게 울리는 비탄으로 견디도록 하세요.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멀리 느껴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것이 당신의 주위가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의 영역이 이미 별들 바로 밑에까지 다다를 만큼 커졌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곁의 숱한 사람들이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서글픔에 대하여, 릴케는 그것이 본인의 영역이 너무도 커진 따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육신의 부피가 커진 것이 아닐 따름에야, 이는 추상적인 공간인 내면의 크기를 상정한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비유이다.

 

원치 않는 외로움들이 우리의 일상엔 참 많더랬다. 인간의 부재로 흔들리고, 완벽한 타인들의 흐름 속에서도 흔들리고, 심지어는 그 많은 외로움을 달래러 간 곳, 네 곁에서도 흔들리는 때가 있었다. 이쯤 되면 외로움은 천성이고 해갈 못될 갈증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일이 있었더랬다. 그러면 슬픈 생각은 발이나 달린 듯 ‘이렇게나 사람은 많은데…’하는 새 생각으로 나아간다.

 

바로 곁의 네게도 닿을 수 없는, 우리의 사이는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심상의 바다로 가로막히어 있다는 생각에 닿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는 ‘섬’이라는 시를 낳게 된 것일 테고 말이다. 손 뻗어 닿을 곳의 모든 너희는 늘 아스라이 멀었다. 우리가 마주 앉기 위해서는 아득한 예로부터 짜인 운명의 타래가 있어야 했으니까.

 

이 생각들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나의 절실한 의도는 항상 의도대로 되지는 않음을 알게 되었다. 너는 절실함과는 관계없는 곳이로구나. 이 생각을 스치게 된 순간으로부터 인간은 숙명인 외로움을 직감하게 되고, 영원한 외로움의 예감을 깊은 두려움으로서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깊은 곳의 수원엔, 영원히 너희를 꿈꾸는 우리의 본능이 자리해 있음을 이제 안다. 본적도 없는 모든 너희를 이리도 맹렬히 꿈꾸는 내 모습이란… 외로움은 영원한 사랑의 본능과 그것을 어렵게 만드는 우리들의 한계가 얽히며 짜이는 검은 니트 같다. 네 손을 잡지 못한 나의 빈손은, 이 안의 작고 초라한 나와 손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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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질은 가만 보면, 맞잡은 손 같아 보인다.

 

 

릴케는 외로움 중에서도 가장 아픈 것, 가까운 이에게서 느끼는 거리감을 축복하고 있다. 받아들일 수 있게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저 두고 바라보기엔 아픈 것들을 위하여. 아픈 것을 기꺼이 사랑할 수 있게끔 반전을 도모하고 있다.

 

그 자리 그대로 있는 네가 새삼 멀게 느껴지는 까닭은, 우리 사이의 보이지 않는 바다가 넓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검은 우주가 별에 닿을 만큼 넓어진 따름이라는 것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느끼고 떠올릴 수 있게 된, 나의 감각이 새로운 공간을 감지한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 복된 일이다. 내면은 감각하는 만큼 넓어지기 때문에. 그 한계는 별이 있는 곳 까지고 말이다. 새삼스러운 너의 낯섦은, 사실 일찍이 몰랐던 너에 대한 발견이다.

 

시인의 말씀은 이렇듯 우리의 일상의 모습과 대부분 반대로 간다. 아픈 것은 그저 아픈 것이고 즐거운 것만이 곧 즐거운 것이던, 우리의 직관적인 일상과 다른 궤적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숨기어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에 있었다. 일단 똑바로 바라보고, 오래도록 들여다보며, 이리저리 골몰하는 어느 순간 번쩍 떠오르는 ‘의미’를 통해서.

 

고독을 견디고, 나아가 지긋이 바라보며, 끝내 사랑하게 되는 모든 과정도 이와 같다. 숨기어진 의미를 발견하면 그것은 선물처럼 여겨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시인이 나와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고, 그를 통해 나와 세계를 어여삐 여길 방법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궁극에 그는, 모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탄은 고독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고독이 가지는 아름다움이다. 백석이 고독이 가지는 역설적 속성을 통해 받아들여야 할 ‘까닭’을 제시해 주었다면, 릴케는 고독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역설을 통해 받아들일 ‘방법’을 말한다.

 

‘비애미’ 悲哀美는 다들 들어본 바 있고, 어쩌면 익숙한 개념일 것이다. 모든 비극이 미적인 것이 되는 원리도 여기에 있고, 심지어는 슬픈 노래가 우리의 일상 속에 만연히 흐르는 원리까지도 여기에 포함된다. 비애가 가지는 아름다움 말이다. 비애의 사전 정의가 ‘슬퍼하고 서러워함’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아름다움을 가지는가. 나는 아직 그 원리에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했다만, 그런 것들에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사실만은 또렷이 떠올릴 수 있었다.

 

비애미는 주로 객관적 타인의 슬픔에 대함이다. 내가 객석에서 그를 바라보는 때, 비극의 주인공과의 거리감을 통해서나 우리는 그 슬픔의 아름다움을 ‘자연처럼’ 떠올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슬픔이 되는 순간, 우리는 거리감을 마련하지 못해 그 안의 아름다움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슬픔의 안에 숨겨진 아름다움에 인식이 닿기 전, 너무도 강렬한 고통에서 의식은 나아갈 수 없었던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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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슬픔을, 그것이 고독이 되었건 다른 무엇이 되었건 간에 그를 아름다움으로 바라볼 줄을 아는 이는 슬픔을 견디기 보다 수월할 것이다. 그리고 고독을 비탄으로, 나아가 그것이 가지는 아름다움으로 해석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그 이유를 분명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그 근거를 마련해두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위에 이미 적어 두었고, 근거는 위대함에 있을 것이다. 마땅히 행해야 할 어려운 것을 감내하는 것은 위대한 면모라는 것이다. 세계와 만인에 선보일 영웅적인 면모는 아니지만, 많은 조용한 이들이 그러했듯 아름다운 스스로 위하여 필요한 위대함인 것이다. 

만약 스스로 제3의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이에게는, 위대함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객체로, 그러니까 하나의 대상으로, 혹은 무대 위의 캐릭터로 보이는 이에게는 자신의 비애가 가지는 아름다움이 드러날지도 모르겠다. 비애미는 일정 거리감을 필요로 하기에.

 

 

마지막으로 내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당신의 모든 성장과 발전을 조용하고도 진지하게 이어나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자꾸만 바깥 세계만을 쳐다보고, 당신의 가장 조용한 시간에 당신의 은밀한 감정을 통해서나 답해질 수 있는 성질의 질문들에 대해 외부로부터 답을 얻으려 할 때처럼 당신의 발전에 심각한 해가 되는 것도 없습니다.

 

 

 

맺으며


 

언제고 외로운 때, 그것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어 합리화나 회피나 기만도 불가한 때에는, 차라리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곤 이 안의 검은 막 위로는 가장 초라한 나의 모습이 벌거벗는다. 이 초라함이란 그간 내가 겪어온 숱한 부끄러움의 집체일 것이다. 그의 나신이 몸을 베 꼬아 부끄러운 듯 가리는 몸짓과, 그때 숙여 한없는 부끄러움으로 괴로워하는 표정을 본다. 즉, 이 감정의 낯을 본다.

 

그리곤 그를 이 위에서 바라보는 나는, 아름다운 단어들을 ‘울력하듯’ 던진다. 그것은 높은 것이라는 말과 위대한 것이라는 말을. 그래도 아직 고개를 들을 마음이 없어 뵈거들랑 별을 띄워 본다. 별 하나마다 내 사랑하는 이들과, 내 보고싶은 이들과, 내 가까이 하고 싶었던 이들과, 그 외 아직 본적 없는 아름다운 이들을 띄우면, 묻은 고개를 쳐들어 그는 위를 바란다. 


그 눈빛이 황홀하여 열리곤, 별이 그로 쏘아 들어간다. 그다음 다시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하는 별들을 가진 이의 지금 슬픔이란, 오직 사랑함에 있었다고. 그것은 높은 아픔이고, 그것을 견디는 것은 위대함이라는 말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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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직감한 시인의 고독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축복이었다.

 

고독에서 아주 벗어나고 싶다면, 모든 섬세하고 예민한 것들에 아주 잊고 영영 눈 감아야 하기에. 마치 우리의 유년시절처럼 아주 몰라야만 가능하기에. 그래서 우리의 지금 고독이란, 섬세하고 예민한 것들에 대한 감각의 촉수를 반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촉수가 보이지 않던 것을 감지해낸 것에서 고독감이 핀 것이라면, 그것은 슬픈 것인 한 편 축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성숙하며 반드시 처하게 되는 슬픈 숙명, 고독의 시기는 지금이다. 그러나 그것은 슬픈 것인 한 편 축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감각이 넓어진 만큼 나의 세계는 넓어졌을 테니 말이다. 어느 순간 아득하게 넓어진 세계에 대하여, 지금의 나는 아직 공황을 느끼는 것일 뿐이다.

 

시인은 이 축복으로 목소리를 빚는 사람이 아닐까. 시인이 우리를 최고의 섬세함으로 노래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가장 고독한 이일 것이다. 그의 예민함이 너무도 많은 것들을 깊이 감각했기에 우리를 울릴 수 있었다면, 그는 한편 너무 많은 것을 감각해버려 우는 이이다.


그러나 가장 고독한 이가 가장 슬픈 이를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첨예한 섬세함은 모든 것의 깊고 깊은 지점을 투시해, 마침내 슬픔마저 기쁨으로 바꾸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고독한 이는 고독으로 돌아와 나의 안을 들여다본다. 별도 없는 검은 공간은 '무 無'인 줄로 알았으나, 이따금 내 사랑하는 것들이 이 안에 떠오른다. 나는 보지 않고도 그를 볼 수 있었다. 만나지 않고도 만날 수 있다.


그때부터 나의 안은 우주이고 장막이며 무대가 된다. 그리곤 그 무대 위에 나를 띄워본다. 나만 아는 숱한 '나'들을 표상하는 것이다. 다른 이에겐 차마 말 못할, 초라한 나를 빚어서 무대 위에 올린다. 나는 그를 보고, 마침내 조금이나마 어른 된 눈으로 내 작은 과거들을 이해하며, 손을 내민다. 나를, 알아, ‘간다’. 또한 너를 알아 간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인간의 것들은 너무도 아름답다. 내 할아버지의 눈빛처럼 말이다.

 

 

모든 사진의 출처는 무료 사진 사이트 ‘unsplash’입니다.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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