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눈사람] 소금물을 뱉고 싶을 정도로 짰다 - 티타임/밀사의 찻잔

글 입력 2020.02.01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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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속의 폭풍은 들여다보기 전까지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언뜻 들어봤을 이야기. 특정 매체에서나 다뤄지는 이야기. 우리 안에 만연한 문제임에도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아서, "없는" 그런 이야기가 찻잔 속에 있다. 기웃대며 툭 뱉는 말, "왜들 난리야?" 왜 난리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꼭 그렇게 묻더라.

<티타임/밀사의 찻잔>은 성노동자에 대한 담론을 "시든 해가 지는 땅"에 비유해 펼쳐지는 판타지 연극이었다. 우리 사회에 너무 깊게 뿌리내리고 있지만,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어느 입장을 어떻게 주장해야 할지 무엇도 쉽지 않은 이야기이다.

애매한 건 일단 멀리 놓고 싶어하는 우리는, 차가 다 식도록 바라보기만 했는지 모른다. 당연히 멀리서 바라보는 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핑계와 외면의 반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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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임/밀사의 찻잔> 공연은 누워서 관람하는 공연이었다. 공연장 내부에는 개인별 매트리스와 담요가 있었다. 각자 매트리스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연극이 시작되었다.

천막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과 머리 위로 울리는 음향이 어우러져 관객들을 판타지 공간으로 이끌었다. '진아'는 찻잔 속의 세계에서 '밀사'의 흔적을 찾아 여행한다. 그곳에는 마법을 쓰는 '스톤'들과 그렇지 못한 '소금'들이 여러 성에 계급별로 나뉘어 살고 있었다. 관객은 '진아'를 따라 찻잔 속의 세계를 함께 걸었다.



찻잔 속에 들어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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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는 숲을 지나 마을에 도착했다. '진아'는 '밀사'가 심어 놨다는 음악이 가득한 음산한 숲을 지났다. 그리고 도착한 성들은, 철저히 계급주의에 따라 '진아'를 대했다. '진아'는 마법을 쓸 줄 모르는 '소금'이었다.

누구도 그녀를 반기지 않았고, 여러 성에서 외면받은 그녀는 성 성에서 '성성제'에 참여한다. 그리고 '소금 노조'를 만들려는 사람들의 모임의 대화를 듣는다. '소금'들은 자신들이 함께 뭉쳐 새로운 사회,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분명 같은 '소금'이었고, 서로를 이해한다는 듯이 이야기했지만, 그들의 대화는 불협화음을 만들었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소금'들 중 가장 외면받는 이들은 '꽃 파는 사람'이다. '소금'들을 모여서 꽃 파는 사람을 "구해줘야", "도와줘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이에 꽃 파는 일을 하는 '소금'은 그런 걸 바란 적이 없다며 화를 낸다. '소금'들은 '꽃 파는 사람'들을 "살려"주겠다고 하고, '꽃 파는 사람'은 그저 "살게 놔 두라고" 말한다.

그들은 서로를 위하는 척하면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결국 사회적 약자인 '소금'도 꽃 파는 사람 앞에서 강자의 모습을 보이고 만다. '소금 노조'를 만들기 이전에, 그들은 함께이기 어려운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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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파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사실 나에게는, 찻잔 속에 들어간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불협화음으로 가득 차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여느 문제와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타 인권 문제처럼, 서로 공감하고, 이해하며, 양보하는 일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전부 착각이었다. 연극 <티타임/밀사의 찻잔>은 충격적이었다. 직접 들어간 찻잔 속의 풍경은 밖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잔인하고, 척박했으며, 희망을 찾기 어려웠다.



하얀 모래 차


연극이 끝나갈 즈음, 사탕 하나와 차 한 잔을 받았다. 누워있던 관객들은 앉아서 배우들이 나눠주는 '하얀 모래 차'를 받았다. 나는 연극을 보는 내내 많은 지난날의 나에 대한 반성과 알 수 없는 슬픈 감정들로 힘들었다. 그리고 '하얀 모래 차'를 마시는 순간, 모든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찻잔 속을 여행하며 낯선 불화와 마찰들에 당황했고, 그 속에서 점점 작아지는 '꽃 파는 사람'들을 보며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나는 '하얀 모래 차'를 마시며 엉엉 울었다. '하얀 모래 차'는, 소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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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잘 안다는 착각을 하며 이야기하는 것은 해롭다. '소금'은 '꽃 파는 사람'이 되어보지 않았으면서, 자신들이 규정한 '꽃 파는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맞춰 그들을 대했다. 하지만 '소금'만을 탓할 수는 없다. '스톤', 그리고 찻잔 밖의 사람들은 애초에 관심을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직접 되어보지 않고는 알지 못하는 아픔, 이야기, 그리고 감정. 단 하나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으면서 '꽃 파는 사람'들을 멋대로 정의내리는 세상. 애초에 '꽃 파는 사람'은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는지 모른다.

'하얀 모래 차'는 짰다. 소금물 맛 정말 없더라. 뱉고 싶은 정도로 짰다. 뱉을 수 없었다. 나는 소금물이 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당연히, 애써 소금물을 마시지는 않았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달라서, 나는 그제야 다시 깨달았다. 소금물을 정말 짜고, 맛이 없다. 찻잔 속에 있을 때는 몰랐다.

'하얀 모래 차'는 어떤 맛인지 궁금했다. 멋대로 추측하고, 멋대로 입에 댔다. 나는 함부로 차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소금'들의 이야기가 귓가를 맴돌았으며, '꽃 파는 사람'의 자조 섞인 말들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입에 남은 짠맛을 견딜 수가 없어서 함께 나눠 준 사탕을 바로 먹었다. 연극의 '진아'는 마지막에 사탕을 뱉었는데, 나는 사탕을 먹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머리에 설탕만 가득 찬" 사람이었나. 단것만 삼키려는 비겁한 사람이었던 걸까. 사탕을 녹이는 내 혀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나는 사탕을 뱉지 못했다. '하얀 모래 차'에 가라앉아 있던 소금들이 잔에 남아 있었다. 그 한 모금을 다시 외면하고 사탕을 녹이는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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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성노동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했었다. 나는 나한테 성노동 문제가 얼마나 "쉬운" 문제였는지 깨달았다. 나는 어려운 척,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척하며 쉽게 뒷걸음질 쳤던 것이다. 어려운 척했던 건 순전히 나를 위해서였다. 내 말들이 나의 이미지가 되어 돌아올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내가 이 이슈에 대해 애초에 "나를 위해" 이야기하려 했음을 뜻한다. 나는 그들의 입장이 되어볼 생각이 없던 것이다.

"어려운 주제", "곤란한 대답", "난처한 입장". 어휘와 역설적이게도 이 말들은 가장 쉽고, 간단하고, 명료하다.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면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다. 찻잔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든 관계없이, 차가 다 식을 때까지 뒤 돌아 있으면 그만이다.

비단 성노동 이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사건이든, 저 말들을 뱉으면 마법처럼 모든 책임을 회피하는 듯하다.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 없이 모두 돌아서 버리면 끝내 찻잔 안에 고여있게 된다. 진짜 쉬운 문제는 답하기 쉬운 것이 아닌 외면하기 쉬운 것이었음을, 나는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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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답을 내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들에는 해답이 아닌 이해와 관심, 그리고 인정이 필요하다. 이에는 대단한 선처도, 아량도 포함되지 않는다. 강자와 약자를 나누고, 보호라는 명목하에 멸시를 보내는 일을 멈춰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겪어볼 일이 없는, 그리고 겪어 볼 의사가 없는 일에 대해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같은 미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렇다 저렇다 결론은 내는 일만이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조금 더 눈을 맞추고, 편견을 내려놓고, 미각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큰 시작이 될 수 있다. 식어버린 차를 두고 비겁하게 맛없다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른 곳을 바라본 채 같은 노래를 부르는 일은 소음만 만들어낼 뿐이다. 내가 <티타임/밀사의 찻잔>에서 방문한 "시든 해가 지는 곳"은 소음들로 가득했다.

모두가 '우리'가 되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일 테다. 그래도, 하나씩 한 걸음씩 움직이면 좋겠다. 나는 '하얀 모래 차'가 언젠가 모두 '우리'가 될 수 있다는 증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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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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