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 “기생충” 이전의 칸 영화제 진출작, 영화 "옥자"를 얘기하다 (2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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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는 영화 <옥자>의 전반적인 줄거리를 소개하며, 옥자와 미자의 여정과 옥자가 고통 받는 과정이 현대의 공장식 축산 시스템을 겨냥하고 있음을 밝혔다. 옥자는 미란도 기업의 성공을 위해 희생되는 수단이자 ‘육류’에 불과하였고, 시골에서 서울, 서울에서 뉴욕을 향하며 갖은 수모를 겪어야 했다. 옥자의 마지막 탈출지였던 ‘공장’은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육류 생산 공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소였다.
그리고 뒤이어 <옥자>에 대한 담론은 <기생충>과의 공통 지점을 발견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영화 내 인물들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봉준호 감독의 두 작품에서는 빈곤한 처지, 혹은 개인의 욕망으로 전락한 ‘추한’ 인물이 등장하고 있었다. 각 영화의 인물이 추해 보인다는 것도 유사점이었지만, 인물들이 그런 성격을 이루게 된 배경에는 인간의 ‘생존 본능’이 깔려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즉, 봉준호 감독은 추하지만 추하지만도 않은 인물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게 하고 그 이면에 숨어있는 사회 구조와 현실의 문제를 조명하는 것이었다.
2부는 이 ‘사회 구조와 현실의 문제’라는 측면을 좀 더 확대하여 살펴보면서, <옥자>와 <기생충>이 세계적인 자리로 진출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고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화 <기생충>과의 공통분모② - 세계적인 이슈를 다루다
<기생충>은 현대 사회에 고착화된 사회 계급 갈등 문제를 다루고 있다. 빈곤층과 부유층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은 영화에서 여러 수단을 통해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동익’(이선균)은 자신에게 선을 넘는 사람을 철저하게 혐오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경계 안에 놓인 사람들에게는 한 없이 친절하고, 또 경계 밖의 사람일지라도 선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호의를 베풀지만, 선을 넘어선 안 될 사람이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면 칼같이 쳐내는 냉철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선은 수직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같은 차 안에서도 운전기사인 ‘기택’(송강호)과 동익 사이에는 신분 차이가 발생한다. 정확히는 운전 좌석과 그 대각선 자리 사이에 놓이는 신분의 벽이 영화 속에서 강조된다. 그래서 ‘연교’(조여정)는 승객의 자리에 앉아 편하게 발을 뻗어 운전자의 영역을 넘볼 수 있지만 기택은 그것에 대해 어떠한 불평도 할 수 없고, 정작 기택은 선을 넘은 적이 없음에도 고작 자신의 체취가 동익의 코에 닿았다는 이유로 뒤에서 그에게 “냄새가 선을 넘는다”며 조롱당하기까지 한다.
영상에서 드러나는 이분법적 구도도 계급 간에 존재하는 선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이들의 주거 환경만 봐도 그렇다. 비가 억수처럼 내리는 날, 기택 가족은 몰래 부잣집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집을 향하기 위해 수많은 계단을 내려간다. 한참을 내려가고 난 저지대에 도착해서도 집은 그보다 더 아래인 반지하에 위치해있다. 반면에 동익의 집은 비가 와도 전혀 걱정 없는 고지대의 부촌에 안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또, 오랫동안 동익의 집에 기생해 살았던 문광 부부의 비밀 공간은 어떤가. 볕이 들지 않는 창고에서 저장고 뒤에 가려진 이곳은 반지하 집처럼 창문조차 없는 완전히 밀폐된 지하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마저도 집주인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몰래 사용할 수 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인 은밀한 공간이다.
아이를 감시하기 위해 침대만큼이나 넓은 소파에서 밤을 보내는 부유한 부부와 그 앞에 놓인 거실 테이블 밑에 수그려서 겨우 잠이 드는 가난한 가족이 대비되는 장면도 이러한 상하구도를 선명하게 나타내는 장면이다. 이 밖에도 영화에서는 ‘냄새’라는 키워드를 통해 빈곤자와 부유한 자를 구분 짓는 등의 방법으로 두 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강조하기도 한다. 습하고 곰팡이가 피기 쉬운 반지하의 냄새는 외모만 변신한다고 감출 수 있는 게 아닌 빈곤자의 원치 않은 전유물이다.
이처럼 <기생충>에서 드러나는 계급 갈등은 비단 국내의 문제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빈곤 문제, 계층의 양극화 문제는 여타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생충>이 단순히 작품성을 넘어서 세계적인 공감을 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듯 범세계적인 이슈를 영화 전면에 드러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옥자>의 주제 의식인 ‘공장식 축산에 대한 비판’ 또한 일찍이 70년대에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동물 해방』(1975)에 의해 논의가 본격화된 바 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웰빙’ 목적 외에도 윤리, 환경보호 등의 이유로 채식을 실천하는 인구의 비율이 20세기 이후로 꾸준히 증가해왔다. 이와 같은 움직임이 현재 국내에서도 서서히 윤곽을 형성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먹방’과 같이 식품 소비를 종용하는 문화 컨텐츠가 주류 문화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육식 소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의 영화는 무분별한 소비를 반성하게 하고 억제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최근의 먹방 영상들을 보면 대부분 음식의 양이 많고, 사람들의 식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동물성 식품 메뉴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옥자>와 같은 영화는 그런 식문화를 되돌아 보게 하는데 효과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기생충>과 <옥자>는 각각 세계에 만연한 사회 계층 문제, 그리고 공장식 축산 문제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담론에 과감히 뛰어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영화의 소재 외에도 영화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요소는 다양하지만, 감독이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냐는 사실은 여전히 배제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부분이 두 작품이 국제적인 영화제에 진출하는 데에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도 해볼 만하다.
영화 <옥자>의 매력
위에서 <기생충>과 <옥자>를 관련시켜 두 작품의 공통적인 매력에 대해 언급하였다면, 지금부터는 <옥자>만이 가지는 매력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①동화적 상상력
소녀 ‘미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어른들의 세계와 무거운 주제를 동화적인 상상력 아래 그려내고 있다. 어린 미자는 뉴욕으로 끌려간 옥자를 되찾기 위해 시작한 여정에서 여러 잔혹한 참상을 목격하게 되지만, 그래도 그녀의 목표는 ‘옥자를 구해서 산으로 돌아가는 것’ 하나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옥자는 가축에 불과하다고 설득하는 어른들의 만류와 여정을 진행하며 겪는 갖은 고생에도 변치 않는 미자의 결심은 그야말로 어린 아이다운 고집과 순수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동화적 상상력은 영화 내에서 비현실적인 묘사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린 미자가 처음 미란도사를 방문하여 사무실에 들어가기 위해 맨몸으로 유리를 부수는 장면이나, 빠른 달리기로 옥자가 실려 있는 트럭을 따라 잡아 그 위에 올라타는 액션 등은 현실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는 장면이다. 이런 비현실적인 묘사는 자칫 유치하게 보이거나 황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는 그만큼 절실한 미자의 심경을 날 것 그대로 표현하기에 적합한 매개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폭력을 지양하는 단체인 ALF가 미란도사와 경찰들과 대립하는 장면도 동화적 상상력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꼽으라면, 처음 옥자를 태우고 가던 트럭 운전사의 주의를 끌기 위해 창문을 열고 꽃잎을 흘렸던 장면을 들 수 있다. 대부분 영화의 추격전에서는 긴박감 있는 진행과 연출을 위해 과격하게 차의 앞을 가로막아 강제로 세운다거나 하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옥자>에서는 그것을 과감히 내려놓고 ‘꽃잎’이라는 연약한 사물을 통해 자신들이 쫓는 대상을 부드럽게 회유하고 있었다.
지하상가에서 ALF와 미란도 기업의 단체가 격투(?)를 벌이는 장면도 이러한 비폭력의 연장선이었다. 존 덴버(John Denver)의 ‘Annie’s Song’이라는 음악이 흘러나오며 두 집단이 충돌하는 이 장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왠지 모를 뭉클한 마음을 갖게 한다.
옥자를 재우려고 쏜 마취 총을 막기 위해 우산을 펼치는 장면은 영화 <킹스맨>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킹스맨>에서는 우산이 격렬한 육탄전과 화려한 액션을 위한 무기였다면, <옥자>에서는 ‘공격’을 하지 않고 최소한의 ‘방어’만 실행하는 ALF의 저항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도구이다. 또한 우산의 알록달록한 색채는 비 오는 날 학교를 마치고 형형색색의 우산을 쓰고 귀가하는 어린 아이들의 동심을 상기시키는 효과가 있다.
앞서 언급하였던 이 격투 씬의 배경음악인 ‘Annie’s Song’도 영상미를 끌어올리는 중요한 요소이다. 영화에서 음악은 장면의 분위기를 좌우한다. 슬로우 모션으로 진행되는 장면에서 잔잔하고 평화로운 음율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시각적 연출들과 그 뒤에 상처 입고 쓰러져 있는 옥자와 미자의 모습이 모두 결합되면 앞서 언급했던 ‘뭉클한 마음’, 혹은 뭐라 정의내리기 힘든 새로운 감성적 자극이 탄생한다. 위급한 상황이 천진난만한 싸움으로 보여서일지, 가장 보호되어야 할 존재들(옥자와 미자)이 상처 입었기 때문인지, 그런 상처를 입힌 존재들에게도 끝까지 폭력을 쓰지 않고 저항하는 ALF의 모습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②영상미와 치밀한 화면 구성
위에서도 장면 구성에 의해 감명 받은 바를 얘기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시각적인 화면 구성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이다. <옥자>는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화면 구성이 뛰어난 영화이다.
<옥자>는 화면 구성에 있어 색채감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영화 초반 미자와 옥자가 함께 뛰어놀고 휴식을 취하는 공간인 산골의 풍경은 선명한 초록빛으로 채워져 있다. 풀잎의 쨍한 푸른 빛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드러내며 그곳에서 지내는 옥자와 미자도 건강한 이미지를 선사 받는다.
미자가 줄곧 착용하고 있는 빨간색 옷도 시각적인 효과를 거두게 되는데, 특히 시골에 비교하여 색채감이 많지 않은 서울, 무채색의 도시를 배경으로 빨간 옷을 입은 미자는 관객의 시선을 끌게 된다. 주인공으로서의 강렬한 인상, 무채색과 대비되는 강한 생명력의 색상 등으로 그 효과를 정리해볼 수 있겠다.
옥자, 미자 일행과 ALF가 지하상가에서 빠져나올 때 옥자가 자나가는 뒤로 족발 가게 홍보 간판이 비치는 장면도 감탄했던 부분이다. 빠르게 지나가서 놓칠 수도 있는 배경에 숨긴 듯 숨기지 않은 듯 배치한 시각적 장치는 감독의 치밀한 구성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실제 가축의 참혹한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이 행복하게 웃고 있는 돼지 그림은 이곳이 옥자가 그야말로 도망쳐야 하는 현장임을 일깨워주는 둣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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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의 결말은 미자가 옥자를 구출해내는 데 성공하므로 표면적으로는 해피엔딩의 구조를 띠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누군가 이 영화를 소개해달라고 한다면 '행복하게 끝나는 영화'라고 선뜻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린 미자의 눈을 통해 가축이 겪는 많은 참상이 드러났고, 옥자는 그곳에서 운이 좋게 벗어났을 뿐 그 현장은 계속해서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옥자>의 진정한 해피엔딩은 영화를 보고 난 우리에게 달렸다. 누군가는 이런 부담감으로 인해 이 영화를 감상하기를 꺼려할 것이다. 그러나, 감독 봉준호도 관객들에게 완전한 채식주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가축들의 현실을 '인식'하기를, 자신의 식생활을 돌아볼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이렇듯 <옥자>는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담론에 적극적으로 참여의 뜻을 표한 영화이다. 그리고 그러한 주제의식을 동화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부담없이 그려냈으며, 뛰어난 영상미로 시각적인 즐거움 또한 선사하였다. <기생충>에서도 드러나는 감독의 고찰을 마찬가지로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자 그만의 독자적인 매력을 지닌 이 영화 <옥자>를, 여러분들도 주저 없이 향유해보길 바란다.
(2부 完)
[박소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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