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생이 지겹다고 느껴질 때: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울다가 웃다가, 나를 생각해주세요!
글 입력 2019.12.17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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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적당하게 중장년까지만 살고 싶다. 마냥 잠에 빠져 있고 싶은 날들이 있다. 벌써부터 참 지겨운 순간들이 찾아온다. 100세 노인, ‘참 인생이 지겹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를 향해, 알란은 “지겨워요. 자다가 일어나지 못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알란이 그런 말을 읊조리고 있을 때에도, 100년이나 살아온 이 ‘운이 좋은’ 사람을 축하하기 위한 생일파티는 준비 중이었다.

 

나와 알란, 둘 다 본인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알란의 발이 팬지 꽃에 닿으면 극은 시작한다고 배우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팬지의 꽃말은 “나를 생각해주세요!”.

극이 시작되면, 공연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알란의 선택에 집중한다. 지겨워서 잠시 멈출까- 했던, 알란의 삶도 다시 시작한다. 우리 모두가, 그리고 알란 자신이, 알란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다같이 알란이 창문을 어서 넘어서 극이 진행되기를, 그러니까, 알란의 삶이 계속되기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1. 100세 생일 파티가 열리기 1시간 50분 전. 양로원의 창문을 넘어 도망치다..jpg


 
결정해야 하는 선택이 늘어가는 매 해마다, 나는 이 선택의 갈등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종결 후에 또 새로운 시작, 혹은 진행 중에 또 다른 시작이 주어지기도. 시작과 마무리의 사이클, 그 모든 것이 지겨웠다. 알란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수많았던 고민들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한국에 사는 나는, ‘해야 하는 것’들에 휩싸여 있다. 모든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할 것 같다. 내 삶의 빈 시간들을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한 증빙서류를 요구받는다. 최소한 내 모든 휴학들마다의 변명거리가 필요했다. 의무처럼 주어지고 있는 ‘한국에서 살아남기’ 트랙을 잠시 벗어나더라도 나는 몸을 움직이느라 바빠야 했다. 알란은 어디 한 번 인생의 파도에 나를 맡겨보라며, 어차피 일어날 일들은 일어난다고 말했다.

나도 한 때는 모든 것을 내팽겨치고, 아무도 없는 중남미 대륙을 횡단할 때가 있었음을. 내가 기억하기를. 창문을 넘을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기억하기를.

 

5. 장칭을 구하고 히말라야 산맥을 걸어서 집으로!.jpg


 
참 매력적인 소통법을 가진 연극이다.

배우진은 알런의 이야기를 액자 안에 두고, 관객들이 있는 액자 밖으로 툭하면 뛰어나왔다. “많이.. 놀랐죠…? 연극은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진행될 겁니다!”, “나 진짜 이 역할 해야 해…? 이거 힘들어..”, “내 차례였어?”, “나 좀 봐줘! 나 아직도 춤추고 있어!”, 그 순간에는, 배역이 아닌, 배우 본인을 생각하게 됐다. 나는 다섯명의 배우들에게서 몇십명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셀 수도 없다. 팬지 꽃은 무대 바닥 어디에나 피어있었다.

 

6. 사라진 100세 노인의 행방불경 사건, 스웨덴을 발칵 뒤엎다.jpg


 
알란은 자신의 100세 생일 축하하기를 지독하게도 싫어했었다. 그러나 창문을 넘기 전에 그는 조용히 자신의 생일케이크의 초 하나를 태웠다. 불이 붙은 단 한 개의 초는, 알란과, 알란이 소중하게 우리에게 보여준 친구들의 얼굴이 보이도록 불을 밝혔다. 현실에선 그 누구도 주목하기 꺼려했을 사람들을.

젠더프리캐스팅으로 진행되는 연극에서 배우진은 친절하게도 이름표를 항상 붙이고 있다.그리고 어려운 이름은 관객들과 함께 읽어 보기도 한다. 이런 전반적인 과정은 이름에 녹아있는 성적구분의 향취를 흐릿하게 했다. 그러다가, 극 중에서 아인슈타인과 니와약락스미 커플이 탄생했다.

모든 회차의 아인슈타인은 남성배우가 연기하지만, 니와약락스미는 젠더프리캐스팅이 되어 있다. 나의 니와약락스미는 남성배우였다. 이 사랑스러운 커플이 등장했을 때, 나는 순간 동성커플인지, 이성커플인지 혼돈스러웠다. 니와약락스미의 별명을 아만다임이 밝혀졌을 때는 더.

그냥 커플인 것을. 스스로 편견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성을 단 두가지로 구분하고, 사랑의 범주마저도 구분하고 있었다. ‘원래’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었던 거다. ‘원래’란 것은.. 참!

내가 모르는 새 나는 다른 사람 앞의 촛불에 함부로 불을 켜곤 했던 거다. 억지로 케이크를 건내주었던 거다. 어쩌면 억지로 먹이기까지 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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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참 간단하게 꾸몄다. 어두운 벽에 수많은 사물함들을 이어 붙인 외벽이 구성품의 전부. 최소한의 소품이 오고 가기 때문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 하는 건 이름표다. 그래도 극장 안 우리들은 다 같이 웃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충분했다. 소품 이용의 반항적인 묘미.

 

9.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노동교화소 수감, 역사에 없는 아인슈타인과 친구가 되다.jpg


 
이용가치를 다 한 소품들은 사물함에 넣어버리거나, 사물함과 사물함 사이에 끼워버린다. 그런 외벽을, 알란은 폭탄으로 다 날려버리고, 결국 양로원에 들어가게 됐다. 자신의 친구였던 고양이 몰로토프를 여우에게 빼앗긴 알란이 누른 초기화버튼이다.

100세 알란은 삶을 다시 시작했고, 극이 끝난 무대 위는 어두운 벽 속에 별이 가득 빛나고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나의 팬지 꽃도 밟으라는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극장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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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 백세 노인이 전하는 따뜻한 위로와 웃음! -


일자 : 2019.11.26 ~ 2020.02.02

시간
평일 8시
토 3시, 7시
일요일 및 공휴일 2시, 6시
월 공연 없음
 
*
12월 매주 수요일 4시, 8시 공연
12월 25일(수) 2시, 6시

장소 :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티켓가격
R석 55,000원
S석 40,000원
  
주최/기획
(주)연극열전

관람연령
만 11세 이상

공연시간
140분 (인터미션 : 15분)



 
 
[박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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