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선과 악의 경계를 흔드는 방법 - 영화 "프리즈너스" [영화]

가해자가 된 피해자
글 입력 2019.11.21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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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오피니언은 영화 <프리즈너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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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쇼생크 탈출>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작업은 현대에 여러 영역에 걸쳐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선과 악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방법 중에 하나는 우리가 ‘악역’이라고 여기는 인물들에게 ‘그들은 그럴 만했다’는 당위성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어 갱생할 수 있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영화 <쇼생크 탈출>의 경우 무고하게 수감된 주인공 앤디와 그 주변 죄수들의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죄수들의 수감 배경,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경위 등을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또한 교도소 안에서 상대적으로 주인공 무리보다 더 악한 집단을 등장시켜 둘을 대립시킨다. 이를 통해 영화는 효과적으로 ‘절대악’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처럼 ‘악으로 규정되는 진영’이 중심이 되지 않고도 선과 악의 구도는 흔들릴 수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 <프리즈너스>가 이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프리즈너스>는 우리가 흔히 ‘선’의 입장에 서 있다고 여기는 ‘범죄의 피해자’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다룸으로써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중심이 되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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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버(휴 잭맨) 부부와 버치(테렌스 하워드) 부부는 추수감사절 날 자신의 딸들을 잃는다. 도버 부부와 버치 부부의 동갑내기 딸들은 호루라기를 찾으러 간다며 집을 향하고 그대로 실종되고 만다. 아이들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안 부부는 경찰에 신고를 하고 곧 이들 사건은 수사에 들어가게 된다.

 

경찰 측은 아이들이 실종될 당시 그 근처에 세워져 있었던 수상한 차량 한 대를 확보해 놓는다. 그리고 곧 로키 형사(제이크 질렌할)는 그 차량의 운전자를 체포하게 된다. 로키는 운전자였던 알렉스(폴 다노)를 오랜 시간 심문하지만, 얻게 된 정보는 오직 알렉스가 10살 정도의 지능을 가진 자라는 사실 뿐이었다. 그가 타고 있었던 트럭에서도 어떠한 납치의 증거도 발견되지 않고 결국 용의자는 증거불충분으로 금방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알렉스의 수상한 정황에 석연찮음을 느낀 도버는 그가 풀려난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그가 풀려나는 날 구치소로 찾아간다. 화를 참지 못하고 알렉스에게 뛰어 든 도버는 알렉스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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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올 때까지는 아이들이 울지 않았어요.”

 

 

그 말을 들은 도버는 자신의 의심을 사실로 확신하게 되고, 알렉스가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산책 나온 그를 납치하여 아무도 모르는 공간에 그를 감금하고 추궁한다.

 

 

 

절박함은 칼날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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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국내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다름이 아니고 영화 내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 묘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잔인한 장면은 범죄자들이 인질을 잡고 고문하는 것이 아니라, 납치된 딸을 찾기 위해 도버가 발악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도버는 유일한 용의자를 아무도 오지 않는 공간에 가둬 놓고 추궁한다. 처음에는 주먹질로 시작했지만 갖은 폭력에도 알렉스가 입을 열지 않자 수법은 점점 잔인해진다. 나중에는 직접 고문 장치를 고안해내는데, 빛도 들지 않는 독방과 같은 곳에 가둬 놓고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만 나오게 하여 그를 고문한다. 펄펄 끓는 물이 분사되는 그 장면은 직접 나오지 않지만, 알렉스의 고통스러운 비명과 신음소리는 마치 그 장면 본 것만큼이나 끔찍하다.

 

사건의 전말은 영화가 후반부에 접어들기까지 오리무중 상태이다. 피해자인 도버, 범인을 추리하는 형사 로키,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들 모두 누가 범인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조차도 고문에 고통 받는 알렉스를 보며 안타까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범인일 수 있기 때문에 연민의 시선을 거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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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에 도버가 용의자를 고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피해자인 버치 부부도 알게 된다. 가장 처음에 그의 공모자가 된 프랭클린은 그 사실을 막 알았을 때에는 도버의 행동을 만류하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을 고민하면서도 결국 그것을 눈 감아주게 된다. 그것은 그의 부인 낸시(비올라 데이비스)도 마찬가지이다.

 

 

 

범인이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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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너스>도 여타의 수사물처럼 영화의 결말에 범인의 정체가 밝혀진다. 범인은 범죄 현장에서 로키의 총탄에 맞아 죽고, 납치되었던 도버의 딸은 그의 손에 극적으로 구출된다. 이런 결말을 가진 다른 작품의 경우 대개 해피엔딩이다. 범인은 죽어 없어지고, 피해자는 목숨을 구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프리즈너스>는 그런 결말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끝이 행복하지 않다. 영화의 핵심은 결말에 있지 않다. 그것이 여타의 추리 서사와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비록 관객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부분은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에 있을지 몰라도, 영화가 어떤 부분을 구심점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묻는다면 그것에 대한 답으로 결말을 제시할 순 없다.

 

상업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선악 구도가 명확해질수록 악역에 많은 사연과 성격이 부여된다. 이는 <쇼생크 탈출>처럼 ‘선’과 ‘악’의 정체성 자체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과는 별개의 차원이다. 예를 들어 히어로 영화계에서 길이 기억될 ‘타노스’라는 악당 캐릭터는 선한 편의 영웅들만큼이나 입체적으로 그려진 인물이었다. 일관된 행동 패턴이 있었고, 그가 인류에 위협적인 일을 벌이게 된 이유가 그의 굳건한 신념을 바탕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또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어떠한가. 그의 과거가 구구절절 설명된 것은 아니었대도, 관객들이 그 캐릭터에 매력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그의 정체성이 영화에서 충분히 부각되었다.

 

이는 주인공 일행과 그 반대 세력을 첨예하게 대립시키기 위함이다. 둘의 강도가 대등할수록 갈등의 긴장도가 높아지고 이에 따라 흥미도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태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누가 선이고 악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 판단과 별개로 주목해야할 점은 이런 영화에서는 선과 악의 ‘대립 구도’를 여전히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수의 인물이 그들이 속한 집단을 표상하고, 그에 기반한 진영 논리가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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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너스>는 이러한 진영논리의 위험에서 벗어나 있는 영화이다. 도버는 ‘피해자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도 아니고 그저 하나의 끔찍한 사건에서 피해자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그 선택지들 중 하나를 치밀하게 보여주는 인물일 뿐이다. 그는 딸을 구하기 위해 다소 폭력적이지만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였고, 다른 피해자인 버치 부부는 그것을 방관하는 편을 택한 것이다.

 

도버라는 인물은 잔혹한 행위를 통해 기존의 ‘선한 편’이라고 인식되는 틀을 벗어나 선에서 악에 달하는 연속선 위에서 자유롭게 진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선한 편에 서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쪽인 형사 캐릭터 로키도 그 전형성을 벗어나있다.

 

그는 납치된 아이들을 찾고 범인을 체포해야하는 1차적인 목적을 지닌 인물인 동시에, 아직 ‘범인’이 아니라 ‘용의자’ 신분인 알렉스를 보호해야 할 의무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는 도버의 행적에서 수상한 낌새를 느낀 동시에 그에 대해서도 추적을 행하고, 그 과정에서 도버와 작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

  

<프리즈너스>는 여러모로 수사물의 전형적인 틀을 깨트리는 영화다. 인질을 잡혀 범인에게 절절매고 범인의 행동에 따라 사건의 방향이 전개되는 서사와 다르게, <프리즈너스>는 사건의 피해자가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 자신의 가족을 잃고 슬픔과 절망에 젖는 것만이 피해자의 역할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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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로키라는 형사 캐릭터를 통해 이야기가 어느 입장에 치우치지 않도록 중재하고 있다. 그는 형사의 직감에 의존하여 의심 가는 인물을 추적하고 추궁하지만, 결정적인 선택이나 행동은 정당한 근거가 갖춰졌을 때만 하는 이성적인 인물이다. 또한 경찰의 신분으로서 상반되는 두 가지의 의무, 피해자를 보호함과 동시에 그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경우 그를 적극적으로 추적해야 하는 의무를 착실히 이행하고 있다.

 

비록 영화가 관객들이 궁금해 하는 점을 충분히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면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만큼 피해자의 입장과 그들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영화에서 비춰지는 그들의 선택과 행동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선과 악의 구분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자신이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할지 상상하게 한다.  선과 악의 구분 없이 오직 '가해자'와 '피해자'만이 분명한 영화, <프리즈너스>이다.

 

 

[박소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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