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미드가 아니라, 텔레노벨라! - 제인 더 버진 [TV/드라마]

글 입력 2019.10.31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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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영어란 초록색 피부를 가진 지토가 알려주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중학교를 들어가자 사정은 조금 달라졌다. 지토는 영영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를 지루한 영어 문장들로 가득한 교과서가 채웠다. 지루해하는 우리를 위해 중학교 때의 영어 선생님은 가끔 ‘아이칼리’라는 미드를 틀어줬다.

 

그리고 그게 내 소위 ‘미드’ 인생의 시작이었다. 당시 내가 보던 한국 드라마들은 재벌들의, 결국에는 로맨스로 귀결되는 이야기 전개 방식을 주로 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해외의 드라마들은 의학, 초능력자, 뱀파이어 등 다양한 소재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로맨스는 드라마를 흥미롭게 만드는 한 요소일 뿐이었다. 처음으로 접하는 흥미롭고 다양한 이야기들에 나는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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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시절, 미국이나 영국의 문화에 대한 동경도 내가 해외 드라마를 계속 볼 수 있게 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 나는 ‘오만과 편견’ 드라마를 보며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영국의 의복들에 감탄했고, ‘스킨스’를 보며 나도 성인이 되면 꼭 친한 친구들과 함께 파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며, ‘모던패밀리’를 보며 내가 미국에서 살면, 어떤 식으로 삶을 꾸려갈지 상상해보곤 했다.
 
이처럼 해외 드라마는 내게 다양한 이야기는 물론, 해외의 문화를 접할 수 있게 해준 통로였다. 그러나 내가 접할 수 있는 드라마 대부분이 영국이나 미국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었으며, 그마저도 중산층 백인들의 시선으로 그려진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에 문화적 다양성을 경험하기에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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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제인 더 버진은 이런 해외 콘텐츠의 단점을 극복할 가능성을 담고 있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제인 더 버진 역시 미국에서 촬영한 ‘미드’라고 할 수 있지만 베네수엘라의 드라마 <후아나 라 비르헨>을 원작으로 한 만큼 라틴아메리카 문화권에서 주목받는 콘텐츠 장르인 ‘텔레노벨라’의 문법을 따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텔레노벨라는 라틴어로 ‘텔레비전 소설’이라는 뜻으로 맺어질 수 없는 남녀가 온갖 난관을 극복하며 결혼에 이르는 스토리를 다양한 극적인 장치와 함께 구현해 내는 장르다. 한국의 ‘막장’ 드라마와 매우 비슷해 보이기도 하다. 문화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의 긴장과 반전을 위해 쓰이는 극적인 장치가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등장인물들의 출생 비밀, 기억상실증, 성형 등의 소재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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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노벨라에서는 인위적으로 느껴질 만큼 과장된 세트, 이미 잘 알려진 고전 명작이나 영화를 패러디한 스토리, 특히 강조된 로맨스 장면 등 여타의 드라마들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제인 더 버진에서는 해설자를 통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특징이자 우리에게는 ‘백 년 동안의 고독’의 서술적 특징으로 알려진 ‘마술적 사실주의’를 보여주기도 한다.
 
또 제인의 가족, 비에누에바 가문의 관습이나 이야기를 통해 이들의 문화를 좀 더 자세하게 엿볼 수 있다. 독실한 천주교인 비에누에바 가분은 슬픈 일이 있으면 기도하고, 부활절 전날에는 반드시 만나 부활절을 기다리며 축복한다. 어머니 날에는 파자마를 입고 텔레노벨라를 보고, 라틴아메리카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탱고에 열정과 매력을 느낀다.
 
제인 더 버진의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 줄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은, 이 드라마가 다중언어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물론 여타의 미국, 영국 드라마에서도 다른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의 드라마들이 특정한 상황에 사건의 전개나 분위기의 반전을 위해 다른 나라의 언어를 사용했다면, 이 드라마는 진행의 한 축으로 에스파냐어를 사용한다. 극 중 제인의 할머니로 나오는 ‘알바’는 영어로 대사를 치는 일이 드물 정도다.
 
이와 같은 극적 특징, 문화적 특징, 언어적 특징은 드라마의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를 즐기는 동안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나도 모르게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를 알게 되고 에스파냐어의 단어들을 익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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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가 페미니즘을 다루는 방식 또한 흥미롭다. 라틴아메리카 문화를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제인의 삶을 통해 ‘보여 주’는 방식을 택한 ‘제인 더 버진’은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을 취한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 왜 힘든지 설명하기보다는 계획에 없는 임신으로 일상이 흔들리게 된 제인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준다. 여성의 삶이 남성의 삶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기보다는 제인의 할머니, 제인의 어머니, 제인 3대의 이어지는 삶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준다.
 
미국과 영국의 콘텐츠들이 주류였던 뉴미디어 시장으로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가 쏟아지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콘텐츠는 사회를 변화할 수 있는 영향력 중 하나다. 다양한 이야기가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포용하기도 더욱 쉬워질 것이다. 넷플릭스에서는 ‘제인 더 버진’말고도 라틴아메리카 여성 3대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낸 ‘원데이 앳 어 타임’, 한국의 막장 드라마의 특징을 풀어낸 ‘드라마 월드’ 등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콘텐츠를 꾸준히 제작, 방영하고 있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이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권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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