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의미로부터의 홀가분함 "수학의 선물" [도서]

글 입력 2019.10.1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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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었던 모든 것은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무에 직면하면서도 무로 전락하지 않고 우연히 그렇게 되었던 모든 것의 끄트머리에서 이 한 권의 책이 탄생했다. 나는 이 우연에 놀란다.

 

- p.10

 

 

모리타 마사오의 <수학의 선물>. 우연히 받아서 읽게 된 책이다. 마침 형이 책의 옮긴이라면서 건네받아 여태까지 만나지 못했던 작가와 옮긴이를 알게 된 것이다. 책의 첫 글도 우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우연에 대한 세 가지 설명.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 무엇과 무엇이 만난 것, 드물게밖에 일어나지 않는 것. 저자는 우연히 책을 썼고, 나는 우연히 글을 읽게 되었고. 우연이란 건 매혹적인 구석이 있다.

 

불확실한데도 그렇게 불안하진 않다. 내심 기대하게 된다. 추첨을 하거나 룰렛을 돌리는 것과는 다르다. 내 주변의 모든 것에 약간의 우연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면 어쩜 그렇게 됐을까 싶을 만큼 변화의 중심에 있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우연이 이끄는 곳이 어디든 우리는 생각보다 잘 이끌려간다. 시작은 우연이라 치고 결말은? 글쎄, 결말까지는 우연의 몫이 아니지 않을까. 우연은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진 않는다.

 

*


즐거운 책이다. 제목이 <수학의 선물>이고 부제가 '수학을 하는 것과 인생을 사는 일의 공명에 관하여' 라서 수학적인 이야기는 얼마나 비중을 차지할까 궁금했는데 흥미로운 정도로만 나왔다. 19편의 짧은 에세이 중 가장 '수학자'가 쓴 것 같은 글은 <의미>. 정확히 말하면 수학에 대한 변론으로 느껴졌다. 여러 사람들이 수학을 어려워하면서 수학을 공부하는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저자에게 말한 모양이다.

 

그의 답은 수학에 원래부터 의미가 있었던 게 아니라 기호가 하라는 대로 따라서 하고 보니 의미가 생긴 것, 이름 붙여보자면 '선행위후의미론' 이었다. 상상해보면 재밌다. 작가가 이 말을 할 때의 심정을. '아니, 세상 다른 것도 마찬가진데 수학에서 의미를 찾고 그래요!' 하는 볼멘소리 같기도 하고.


 

행위에 앞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호 운용의 룰에 따른 계산의 반복 끝에 의미가 나중에 따라 나온다. 그래서 '의미를 모르게 되고 나서부터' 수학은 재미있어진다. 의미 불명이더라도 그 상태를 참고 견디며 계산을 하다 보면 조금씩 의미의 감각이 찾아온다.


수학을 공부하다가 의미를 모르게 된 순간, 자신이 수학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의기소침해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자신이 수학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의미가 수학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혹은 수학이 자신을 두고 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수학과 함께 의미를 뒤에 두고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p.58

 

 

수학과 멀어져서 좀 기뻐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보니 또 반갑고 재밌다. 예시가 (-1)x(-1) = (1) 이 되는 이유처럼 가벼워서 그런가. 세상만사 다 처음부터 의미 있는 건 없는데 왜 수학에서 유독 의미를 찾으려 하는지 궁금해하시는데, 듣다 보니 아, 그러게 말입니다. 싶었다. 개인적으로 수학을 공부하는 '의미가 없다'고 느꼈던 적은 없었다. 그냥 흥미나 재미를 다른 것들에 비해 덜 느꼈기 때문이었다. 기호와 규칙에서 나오는 요청은 좋았다. 깔끔하게 떨어지니까. 왜, 답이 없는 문제가 좋다가도 가끔은 답이 딱 떨어지는 문제가 그립기도 하지 않나. 사람이나 주변 세상은 머리가 아플 때가 있으니까.


다만 이게 나와 어떤 상관이 있을까 싶은 면에서 의미가 없게는 느껴졌다. 흔히 말하는 주요 과목을 압축하면 '국영수'가 메인이다. 국어와 영어는 대놓고 언어다 보니 '이 중에 네가 좋아하는 것 하나쯤은 있겠지'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문제를 풀면서 좋아하는 시와 소설, 작가가 많이 생겼다. 수학에는 그런 이야기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좋아하는 수학자도 생기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수학도 언어라 했는데 편견에 사로잡혀서인지 수학이 언어라는 생각이 조금 낯설었다. 음악도 언어고, 수학도 언어인데 그걸 알면서도 음악과 수학이 구축한 세계가 어색하고 어려운 세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문제를 풀고 반드시 맞춰야만 의미가 있게 만든 공부방법이나 교육제도의 문제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모든 과목에서 마찬가지다. 왜 수학만 유독 의미 없게 느껴졌을까. 정말로 공부가 즐거울 때는 내게 의미 있게 와 닿는, 집중하다 시간이 멈춘듯한 짧은 순간이었다. (물론 채점할 때 동그라미가 많으면 흥이 나는 걸 무시할 순 없다.) 국어나 영어 문제를 풀다가 만난 마음에 드는 시나 문장에서 느끼던 의미를 수학에서는 쉽게 찾지 못했다. 문제 탓을 해보자면 문제를 풀라는 이유가 설득력이 떨어진달까. 꼭 그렇게 실수로 달력을 잘못 찢거나, 실수로 소금물을 잘못 탔거나, 공사를 잘못해서 면적을 다시 측정해야 한다거나 그래야 했냐 말이지. 정말 딱 문제 풀라고만 만들어놓은 것 같아서 아이고, 의미 없다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수학 문제에서 개연성을 기대했던 게 잘못이었을지도.


수학을 잘한다는 게 문제를 잘 푼다는 게 아닌데 우리의 뇌리에 그렇게 박혀 있다. 답을 찾지 못하는 게 수학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기호와 규칙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라고, 꾸준히 하다 보면 의미가 생긴다고 시간제한 없이 문제와 진득하게 시간을 줘도 된다고 했으면 아마 '수학 무의미론'을 외치는 사람들도, 어렵고 재미없다 하는 사람들도 많이 줄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이 수학에 즐거움을 느끼고 의미를 찾을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수학을 잘 모르고 못하는 입장에서 본 수학의 의미 논쟁은 여기서 마치는 걸로.

 

*


마음에 드는 글이 많았다. 두께가 얇은 책이라 소리 내서 읽어보았는데 글에 은근한 리듬감이 있었다. 풍요로운 지금을 즐기라는 말도, 최첨단 과학이 꼭 정답만은 아니라는 것도, 우리를 연결하는 새로운 게 생길수록 되려 단절된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들어봤던 말이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글을 재밌게 잘 쓴다는 생각이 읽을수록 확실히 든다.


즐겁고도 아찔하고 허전하고도 충만한 시간이 가득 들어있었다. 글은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간과 함께 있었다. 새 해가 시작해서 혹은 한 해가 끝나서, 처음을 책을 쓰고 저자가 되어서, 두 번째 책을 쓰게 되어서, 소중한 아이가 쌔근쌔근 잠이 들어서, 혹은 아이가 아파 수술을 하게 되어서.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는 글이 아이 이야기를 많이 다루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글이란 게 무섭도록 솔직하지 않은가. 주제를 정한다고 꼭 그 주제로만 글을 쓰기는 어렵고 내 취향이, 관심사가, 근황이, 마음의 초점이 함께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예전 글을 읽다 보면 아, 이 때는 이거에 꽂혀있었구나 하면서 기억이 함께 되돌아온다.

 

 

그런데 결국 그가 직장을 갖는 일은 없었다. 여행하는 동안 생활을 위해 안정된 직업을 선택할 것인지를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자신의 진짜 일은 한 가지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것은 "내 모든 생애를 내 이성을 계발하는 데 쓰고 내가 정한 방법을 이용해 진리를 인식하는 일에서 가능한 전진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보통 상식으로 볼 때 데카르트의 삶의 방식으로는 먹고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자기 마음에 비춰본 끝에 납득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이 때 데카르트의 나이는 스물아홉. 당당한 결단이다. (중략) 길은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진로는 살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데카르트와 바쇼는 제 마음에 비춰 결정한 그 길을 위해서 살았다. 그래서 그 생애는 지금도 울림을 잃지 않는다.


홀가분한 몸으로 가자. 마음속에 묵직한 이상을 안고.

 

- p.32

 


가장 마음에 든 글은 <홀가분한 몸>. 데카르트가 스물아홉에 자신이 갈 길을 정했다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원한다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눈 앞에 있었고, 이성을 계발하고 진리를 인식하는 일은 먹고사는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최근 몇 년 간, 아니면 훨씬 이전부터 고민하던 문제다. 무엇을 위해 살지, 어떻게 살지는 결국 어떤 길을 갈지 와 같은 말이다. 이상이라는 말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다. 이상을 위해 사는 건 무모하다고 하는데 어째 마음에는 이상이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가. 현실적으로 살려고 하면 알맞게 잘 살 수 있는가. 왜 해도 해도 끝도 없는 것 같을까. 수없이 타협해도 왜 더 많은 타협이 기다리고 있는 기분일까.


아직 다 살아보지 않았지만 길 앞이 다 보이는데 그 길을 가면 행복할지 의문스러운 건 마음이 어리기 때문인가. 단순히 안전하고 완만한 길보다 울퉁불퉁하고 알 수 없는 길로 모험을 떠나고 싶어서일까? 길은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진로는 살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고, 홀가분한 몸으로 마음속엔 무거운 이상을 갖고 가자는 말을 읽고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살기 위한 길이, 매여있는 몸과 마음속의 '가벼운 현실'이 생각보다 무겁기 때문일 것이다. 고민의 짐을 훌훌 버리고 나의 길을 떠난다면, 아마 나는 저자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오카 기요시의 에세이를 보고 수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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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하게 뭔가 해결해야 한다거나 주장한 건 없었다. 확고하지 않은 이야기에 마음이 편안했다. 언급된 불일불이(不一不二)란 말이 좋았다. 불교에서 나온 용어지만 이 책에 나온 해석으로 설명해보자.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와 비교하자면, 기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고 아니라 하는 것도 틀렸다는 뜻이라 한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고 명확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었다. 불확실한 것들이 너무 가차 없이 느껴져서 어떻게라도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걱정될 만큼 흔들렸기 때문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고.

 

 

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절감한 것이 있다. 의외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는 '쌓아온 과거' 같은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있다고 하면 '망설임'과 '서성거림', 그리고 '실패'의 과거뿐이랄까.


그런데 정말로 나에게는 '과거'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지금 나의 뇌에서 과거의 기억이 모두 사라져 버려도 나는 어떤 변화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더니  "잠깐, 그 정도는 아니야!"라는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과거의 나에게 가르침을 준 이들이 일제히 나타나서는 자신들이 내게 무엇을 주었는지 저마다 외치기 시작했다.

 

- p.157 옮긴이 글

 

 

옮긴이의 말에서 무척이나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다. 망설임과 서성거림, 실패의 과거이니 다 지우자기엔 과하고 그렇다고 빈틈없이 알차게 배웠다기엔 또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만약 그게 과거의 의미라면? 현재는 어느 때보다 풍요로움이 가득하지만 우리가 별다를 것 없이 지나 보내고, 미래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을 기대하든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때로는 삶의 의미란 게 있을지 대답을 망설이게 된다.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일지, 지금의 나는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건지 고민스럽다. 안다. 의미라는 건 부여하기 나름이고 행동이나 상황보다 최소 한 발자국 뒤에나 알게 된다는 것도. 그렇다고 고민이 사라지진 않는다. 어느 길에 서 있든 이따금 등골이 서늘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저자가 말했듯 삶이, 삶이 주는 의미가 그런 거라면, 의미가 없다고 말하면 지나치고 의미가 있다고 단언하는 건 틀린 느낌이라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 모든 것이 담긴 삶의 의미가 그런 것이라면, 나를 괴롭게 한 의미로부터의 고민에서 한결 가벼워질 수 있겠다. 수학이 그렇듯, 사는 것이 그렇듯. 의기소침해지지 말자. 의미는 나중에 오는 것이다.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삶이 재밌어질 수 있다. 수학이 저자에게 선물이었다면 의미로부터 홀가분한 이 기분이야말로 이 책이 나에게 준 선물일 것이다.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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