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은 언제나 가장 정당했기에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도서]

글 입력 2019.10.13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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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를 기다리고 남자는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 육 년 넘게 이어져 온 관계다. 여자는 사랑하고 헌신하는 자신의 모습 속에 살았고, 남자는 늘 자유를 갈망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순수한 마음의 청년이 나타나 이 여자를 고통 속에서 구해준다면? 일반적인 멜로드라마에서는 여자가 순수한 청년을 택해 새로운 삶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 고통으로 점철된 시간으로부터 구출해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그러나 프랑수아즈 사강은 그 반대의 이야기를 이끌어 낸다. 서른아홉 해의 시간 동안 사랑에 대한 회의만을 학습해 온 한 여성이 진정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헤매는 모습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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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면의 은폐

 
서른아홉의 폴은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육 년간 교제해 온, 마흔을 넘긴 중년남성 로제와 하루아침 등장한 스물다섯의 젊은 변호사 시몽. 로제는 자유를 갈망한다는 명목으로 폴을 세심하게 생각해주지 않는다. 평소 폴의 집에서 물건들을 함부로 다루어 훼손시키기도 하고, 폴과의 약속을 함부로 취소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로제는 다른 여성들과도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며 폴에게 상처를 준다. 폴은 그러나 로제의 모든 행동을 받아들인다. 외로움에 자주 몸서리치면서도 자신은 로제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상대를 향한 헌신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하루는 시몽이 폴 앞에 나타난다. 고객의 집에서 미팅을 하기 위해 대기하다가 고객의 아들인 시몽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폴의 매력에 한눈에 반한 시몽은 폴의 직장에 찾아가는 등 폴에게 적극적으로 애정공세를 펼치게 된다. 폴은 로제에 대한 자신의 사랑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지만, 외로운 자신의 마음을 파악하고 섬세하게 헤아려주는 시몽의 정성에 조금씩 경계를 풀게 된다.

 

 

“그렇다 해도 당신은 아무에게나 ‘빨리 돌아와요.’라고 쓰는 여자는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그는 거듭 물었다.

 

“나는 외로웠어요. 그리고 아주 기묘한 상태에 놓여 있었어요. 물론 그렇더라도 당신에게 ‘빨리 돌아와요.’ 같은 구절은 쓰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건 맞아요!”

 

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시몽이 와있었고 그녀는 그가 거기 와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그녀는 정말이지 너무도 외롭지 않았던가! 로제는 영화에 미친 젊은 여자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다.(그녀로서는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로제와 그녀 사이에 그 일이 한 번도 언급된 적은 없었지만, 로제는 어느 정도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 p.81

 

 

여기서 폴이 시몽을 대하는 태도에 주목해보려 한다. 줄곧 외로움을 느끼고 있던 폴은 시몽이 찾아온 덕에 오랜만에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시몽에게는 돌아와 달라는 자신의 언행을 후회한다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한다. 물론 폴이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 모습은 위 장면뿐만 아니라 소설의 전개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산책을 가자는 시몽의 제안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사실은 산책을 가고 싶었다든가, 시몽이 자신의 집에 옷을 가져다놓으려는 일이 싫지 않으면서 만류하려 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폴이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로제와의 관계에 대한 책임감 때문은 아니다. 물론 폴은 시몽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로제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폴이 스스로의 내면을 은폐하게 된 것은 로제와의 관계를 위해 가지게 된 태도라기보다는 로제를 만난 경험 때문에 나타난 부산물에 가깝다. 실제로 폴은 로제와 교제하는 기간 동안 스스로의 판단을 유예하고 로제에게 맞추어주면서 자신의 내면을 차츰 잃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 가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근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중략) 요즈음 그녀는 책 한 권을 읽는 데 엿새가 걸렸고, 어디까지 읽었는지 해당 페이지를 잊곤 했으며, 음악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 p.56

 

 

로제와의 관계 속에서 폴은 스스로를 점차 잃어갔다. 그 탓에 자신의 삶에 시몽이 나타나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해도 폴은 시몽을 받아주지 못했다. 시몽에게 자신의 내면을 숨기려는 그녀의 노력은 어쩌면 스스로의 내면이 부재하는 탓이기도 하고, 동시에 타인의 호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 명확했던 적이 없어 자신의 내면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다.
 
 
 
2. 사랑은 떠날 수 있지만 고통은 영원히 함께할 수 있기 때문에

 

로제가 젊고 매력적인 여성에게 빠져 폴에게 소홀해지고, 시몽은 점점 적극적으로 폴에게 다가오면서 폴과 시몽은 점점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둘은 함께 밤을 보내기도 하며 같이 파티에서 춤을 추기도 한다. 불같이 순식간에 타올랐다가 사그라지는 사랑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을 만들기 위해 시몽이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폴은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은 로제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전략) 그녀는 로제를 가리켜 ‘그’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하게 되리라. 왜냐하면 그녀로서는 그들 두 사람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바로 그 자존심이 그녀 안에서 시련을 양식으로 삼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로제는 그녀에게서 언제나 빠져나갔다. 이 애매한 싸움이야말로 그녀의 존재 이유였다.

 

- p.139

 

 

폴은 사실 시몽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로제와의 관계에서의 문제점들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은 로제를 선택한다. 자신을 평생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이미 자신의 곁에 있는데도 말이다.
 
서른아홉 해 동안 로제가 학습해온 사랑은 불안한 것이었으며, 사랑의 고통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패턴으로 삶의 리듬을 형성해 주었다. 사랑은 달콤하지만 정해지지 않은 주기로 기복이 찾아온다. 그런데 반해 고통은 내가 극복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면 늘 그 자리에 있다. 육 년 동안 그녀를 지배해 온 고통은 늘 같은 자리에서 폴의 일부가 되어주었고, 남성적이지만 어린애같은 로제도 한결같을 것이므로, 폴은 로제에게 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불안한 것은 사랑을 만들어낸 자아들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시몽은 고독과 고통에 머물러있는 폴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행복한 사랑을 상상하게끔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육 년 간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기에는 시몽의 사랑은 이제 막 나타났고, 로제가 너무 빨리 폴에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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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한 장면

 

 

프랑스 예술은 특히 사랑의 파멸적인 성격에 대해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 《겨울이야기》 등에서도 사랑의 덧없음과 치명성, 그리고 그 뒤에 남겨진 삶을 잘 보여준다. 한부모 가정이나 동거 등 가정의 형태가 다양한 만큼 문학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다양한 장치를 사용하는 것이 더욱 자유로운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훌륭한 통찰이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작가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전세계에 충격을 준 이 명언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작가가 담고자 했던 바를 표현해준다. 스스로 고통을 선택하고 그 속에서 살기로 결정하는 모습은 현실에 흔히 나타나는 동시에 그 정체를 이해하기 어려워 중요한 문학적 과제로 손꼽힌다. 이런 삶의 한 단면을 사강이 감각적으로 잘 표현해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사랑의 상처, 혹은 더 나아가 불행한 연애와 결혼을 기꺼이 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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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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