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민초들의 삶에 덧씌워진 역사 – 낮은 칼바람

개인의 삶에서 수난의 역사를 포착하기
글 입력 2023.11.27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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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만주 하얼빈 북쪽 대흥안령 아래 외딴 객점.

 

객점 주인 ‘용막’과 건달 ‘종수’ 그리고 ‘수염’은 한족 지주들과 어울려 며칠째 투전과 아편에 빠져 있다. 객점의 일꾼 ‘금석’은 용막의 눈을 피해 글 배우기에 여념이 없지만, 어떤 꿈을 가지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환경이다. 비밀임무를 띄고있는 ‘야마모토’ 중위와 ‘마에다’ 하사, 돈으로 팔려 온 어린신부 ‘부근’과 ‘맹포수’들은 늑대들의 하울링과 칼바람을 따라 작은 객점으로 몰려오고, 객점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은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각자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만주 웨스턴은 본래 영화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이지만, 현재는 대개 서부극과 같은 분위기를 내는 동양의 여러 콘텐츠 장르 자체를 의미한다. 보통은 만주 지역의 황무지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식 서부극이 서부 개척 시대를 주된 배경으로 하는 것과 같이, 만주 웨스턴 역시 총격전이 발생하기에 논리적으로 무리가 없는 일제강점기, 특히 1920-30년대를 주된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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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극의 비장한 분위기. 영화 <석양의 무법자> (1966).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만주 웨스턴의 이러한 성격에 가장 잘 부합하나, 연극에서는 시대적 배경 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시에 일어났던 주요한 갈등과 사건들을 보여주지 않고 인물 개인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만 한 장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모아 보면, 당대에 일어났던 조선인 차별과 한중일 세 국가의 갈등 관계 등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을 감히 입에도 올릴 수 없었던 억압적인 당대의 분위기,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같은 민족 간의 불신과 충돌이 서부극 특유의 긴장감을 재현하기도 한다. 후반부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고 서로에 총을 겨누며 긴장을 팽팽히 유지하는 부분은 그러한 면모가 가장 부각되는 핵심 장면이기도 하다.

 

서부극의 가장 기본이면서도 완성이 되는 것이 의상을 비롯한 특유의 소품이라고 생각되는데, ‘낮은 칼바람’에서는 의상을 보기만 해도 당시 만주 지역의 추운 칼바람을 경험하는 듯 시린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그만큼 의상과 소품은 정교하고, 특히 인물의 성격에 맞는 의상을 보는 재미가 있다.

 

 

 

한 공간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야기


 

‘낮은 칼바람’의 공간적 배경은 만주 하얼빈의 외딴 객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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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설정한 객점의 이미지

 

 

객점이라는 곳은 누군가 가정을 이루어 오래오래 살기 위한 주거 공간이라기보다는, 지나가는 외지인들이 스쳐 지나가는 곳이다. 바람만 겨우 막아주는 이곳은 사람들이 잠시 몸을 녹이고 쉬며 누군가 다음 사람을 위해 숨겨놓은 작은 온정으로 요기를 해결하는 공간이다. 모두의 공간이자 누구의 공간도 아닌 곳. 이곳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국적이 중국, 한국, 일본으로 다양하고, 그들이 이곳으로 흘러오게 된 배경 역시 제각각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연극에서 주된 소스로 사용되는 사건은 ‘만보산 사건’과 ‘나카무라 신타로 사건’. 만보산 사건에서는 당시 만주 지역에 함께 살며 격화된 조선인-중국인 간의 갈등 관계를, 나카무라 신타로 사건에서는 농업 기사로 위장한 일본군이 정치적 목적으로 조선인과 중국인이 살고 있던 지역을 침투했던 전략을 차용해 그리고 있다.

 

나카무라 신타로 사건의 결말을 연극에 반영한 방식이 인상적인데, 실제 사건에서 사망하는 인물은 일본군이지만, 연극에서 사망하는 쪽은 조선인이 된다. 극에서는 어리고 연약한 성격인 금석에게 가장의 지위가 넘어가도록 하는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 일본인이 사망한 사건을 조선인의 사망으로 차용하는 것은 당대 조선인의 이입에서 바라보자면 무력감을 주는 연출이면서도, 살아남은 차세대의 발걸음을 관객이 간절하게 지켜보게끔 하는 연출이다.

 

따라서 극에서의 객점은 만주라는 지역과 한민족이 태어난 땅에서 살지 못해 쫓겨난 그 시대 자체로 읽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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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사람들 - 차세대 동포의 은유


 

객점의 주인 용막의 밑에서 일하는 금석, 복녀와 가정형편이 어려워 팔리듯 머나먼 곳으로 시집올 운명에 처했던 부근은 모두 나이가 어리다. 나머지 인물은 명확하게 나이를 이야기하지 않는 반면, 이들은 대화 중에도 나이를 거듭해서 센다. 금석 열여덟, 부근 열여섯, 복녀는 제일 어린 열다섯 청춘. 가장 어리기 때문에 이들은 가장 약자의 위치에 있다.

 

금석은 용막에게 매일 맞으면서도 자신보다 어린 복녀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참으며, 심지어는 ‘자신을 먹여주고 재워주기 때문에 주인은 좋은 분이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주인이 아편과 도박 따위로 한심한 죽음을 맞이했을 때에도 유일하게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기까지 한다. 어찌 보면 비굴하게까지 보이는 금석의 삶은 본디 자신의 땅이 아닌 곳에서 '주인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주민들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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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녀는 당차고 앙칼진 성격으로 쉽게 꺾이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매번 비굴한 태도를 보이는 금석을 대신해 부조리에 맞서 싸울 줄 아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린 여성이라 만만하게 보인다는 이유로 같은 민족인 ‘수염’에게 추행을 겪으며 무시당하는 인물이다. 복녀는 자칫 묵직하기만 할 수 있는 연극의 분위기를 희석하여 부담을 줄이는 역할을 하는데, 이런 그의 역할은 부근의 등장과 함께 시너지를 얻는다.

 

부근 역시 강하고 거친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본격적으로 객점에 다다르기 전부터 하나뿐인 동행 – 자신을 팔아넘기는 데 적극적인 중개하는 인물 – ‘맹포수’를 망설임 없이 살해하려 한다. 등장과 동시에 발생하는 이 사건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지만, 연극의 후반부에서 자신이 살아갈 길을 찾기 위해 혹한에도 망설임 없이 길도 모르는 곳을 찾아 나서는 모습에서 부근의 당돌함과 주체성을 볼 수 있다.

 

복녀와 부근은 연극 후반부 주요한 갈등 사건이 발생할 때 힘을 합쳐 주변을 살피는 역할을 한다. 역사로 기록될 주요한 사건을 직접 목격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 주변부에서 자신만의 일상을 꾸리며 역사를 지탱한다. 연극에서는 주요한 사건이 아닌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결국 이들은 홀로 남고, 이들은 다시 떠돌게 된다. 기성세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고향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돈을 주었지만, 이들이 무사히 걸어갈 수 있도록 운명이 허락해 줄까?

 

그간 고국에서 떠밀리듯 떠난 동포들의 삶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쉽지는 않은 듯하다. 우리는 그들이 이후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그것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지도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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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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