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신명 나는 발레 한 판, 아니 여덟 판! - 코리아 이모션 情

물과 기름이 섞였는데 맛있다...?
글 입력 2024.02.18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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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발레단의 <코리아 이모션 情>에 대한 명성이야 익히 들어온 바 있다. 사실 나는 처음 발레와 한국무용 퓨전 공연이라고 들었을 때 흥미가 생기면서도 어떤 작품일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발레와 현대무용,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의 콜라보는 여럿 접해봤지만, 발레와 한국무용의 콜라보라니. 

 

기대보다 우려가 좀 더 컸던 이유가 있다. 발레와 한국무용은 거의 모든 면에서 정반대다. 우선 전통적으로 무대 앞 전방으로 관객이 위치해서 2D처럼 양옆, 위아래 수직으로 길게 뻗어나가는 형태로 발달한 발레와 달리, 사방으로 관객에게 노출된 마당에서 주로 이루어졌던 한국무용은 3D로 둥글둥글하게 움직임이 발달했다. 말하자면 발레는 직선, 한국무용은 곡선의 춤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으로 발레는 하늘로 높이 솟아오르려는 춤이라면 한국무용은 좀 더 땅 위에 발 붙이고 추는 춤이다. 이 때문에 발레에 비해 한국무용에서는 호흡을 훨씬 더 깊게 하는 경향이 있다. 뿐만 아니라 발레는 힘을 최대한 바깥으로 밀어내고 발산하는 반면 한국무용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힘을 내부적으로 끌어모으고 당기는 편이다.

 

이렇게 거의 모든 면에서 정반대로 흐르는 두 장르의 춤을 어떻게 결합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손동작 정도만 한국무용처럼 어르면서 국악을 틀어놓고 한복을 입은 채 발레를 하는 정도까지였다. 물과 기름은 섞일 수 없으니 그저 물에 기름이 동동 떠 있는 이질적인 느낌의 작품이 되진 않을까, 우려되었다.

 

더군다나 이 공연의 제목이자 주제인 ‘정’은 지극히 동양적인 개념이다. 발레처럼 지극히 서양적인 규칙과 언어로 된 춤으로 어떻게 복합적인 ‘정’을 표현하겠다는 걸까? 걱정 반 기대 반,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을 보러 갔다.

 


2023Korea Emotion-ⓒUniversal Ballet_Kyoungjin Kim 215.jpg

 

 

첫 무대부터 내 걱정이 우스워질 만큼 발레와 한국무용의 완벽한 융합이 펼쳐졌다. 국악, 클래식, 네오클래식, 가요 등이 섞인 음악과 퓨전 한복 의상, 동양화를 이용한 스크린, 병풍과 같은 효과를 주는 조명 등 전반적으로 한국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무대였다.

 

특히 제일 중요한 안무에서는 발레의 직선적인 움직임과 한국무용의 곡선적인 움직임이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융화되었다. 익히 아는 발레 동작 속에서도 손짓이나 상체 움직임이 한국무용적이었고, 힘을 안쪽으로 끌어오는 한국무용 동작에서도 발레의 뻗어나가는 힘이 공존했다. 물과 기름 같은 반대의 성질을 가진 두 장르가 조화롭게 섞여 하나가 된 것이 보는 내내 신기했다. 

 

한편으론 발레라는 엄격한 규칙의 세계에서 평생 몸을 단련해 온 댄서들은 이런 새로운 장르의 춤과의 퓨전을 도전할 때 어떤지 궁금했다. 몸이 거부하거나 어려워하진 않았는지, 정반대의 방향에서 힘이 작용할 때 혼란스러운 건 없었는지 댄서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음악의 경우 아무래도 국악을 활용한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보통 고전 발레에 쓰이는 클래식 음악에 비해 국악은 ‘장단’이 두드러지는 음악이다. 리듬이 훨씬 강조되고 선율 역시 구성지게 오르락내리락 변덕스럽고 즉흥적인 부분이 많아서 사실 고전 발레의 춤 양식과는 잘 맞지 않다. 그런데 이번 작품들에서는 국악의 이런 리듬적인 매력과 구성진 선율을 한껏 살려 발레(혹은 한국 무용과 결합된 무언가)로 구현해 냈다. 음악을 빈 공간 없이 꽉 채워서 안무를 해내는 무용수들 덕분에 음악과 춤이 서로 완벽히 조응하는 느낌이었다. 생각보다 고전 발레에서는 이런 리듬감과 음악적인 요소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경우가 드물어서 신선하고 즐거웠다.

 

 

2023Korea Emotion-ⓒUniversal Ballet_Kyoungjin Kim 1.jpg

<미리내길>

 

 

8개의 작품이 각자 저마다의 매력이 있었고 모든 무용수의 기량이 뛰어나서 누가 주연이라고 할 것도 없는 공연이었지만,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감상했음에도 <미리내길>이 제일 인상 깊었다. 공연 이후 보도자료를 읽어보고 나서야 이 작품이 바로 작년에 브누아 드 라 당스에서 최고무용수상을 수상한 강미선 발레리나의 작품이었다는 걸 알았다. 심지어 마침 관람한 공연이 강미선 리나가 출연한 회차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봐도 단연 압도적인 무대였다. 남편을 잃은 아내의 마음, 혹은 어떤 형태로든 이별을 경험한 사람의 절절하고 애끓는 마음을 이보다 더 슬프게 표현할 수는 없었다. 몸으로 감정을 전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완벽히 설득되었다.

 

그 밖에도 시나위와의 조화가 충격적으로 좋았던 오프닝 군무 <동해 랩소디>, 한국무용 특유의 절도 있으면서도 화려함이 남달랐던 남성 군무 <찬비가>, 애절한 남녀의 마음이 유려하게 펼쳐진 커플 군무 <비연>이 인상적이었다.

 

 

2023Korea Emotion-ⓒUniversal Ballet_Kyoungjin Kim 2.JPG

 

 

문훈숙 선생님이 처음 해설해 주신 것처럼 이 공연의 주제인 ‘정’은 한국어에서도 유독 번역되기 어려운 개념으로, 고운 정 미운 정 등 복합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애증의 감정이다. 서로 상충하는 정반대의 개념이 조화를 이루는 것은 ‘정’ 뿐만 아니라 동양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지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이 공연을 한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한다면 딱 이런 것이 되겠다. 발레도 맞고 한국무용도 맞는데 동시에 둘 다 아닌 것. 직선과 곡선, 외부와 내부, 하늘과 땅, 선율과 리듬이 뒤섞이며 조화로이 하나가 된 것. 이렇게 지극히 동양적인 사상을 서양 고전 예술인 발레로 표현해낸 진정한 '퓨전' 작품이었다. 그러고 보면 ‘퓨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동양 철학적인 접근인 셈이다.

 

이런저런 해석 없이도 그저 보는 내내 즐겁고 황홀해서 나도 모르게 국악의 리듬에 맞춰 ‘얼쑤, 잘한다!’ 소리를 외치고 싶었다. 그야말로 ‘신명 나는’ 발레 한 판, 아니 여덟 판이었다. '신명 난다'는 표현은 발레 앞에 붙이기에 한없이 이질적인 단어지만 낯설기 그지 없는 퓨전을 선보인 이 공연을 압축해서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수식어는 없을 것 같다.

 

 

[황연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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