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버드 박스, 포스트모더니즘 [영화]

정신병으로 낙인찍고 정상을 강요했던 현대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글 입력 2019.09.2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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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연기



배우들의 연기가 무척 완성도 있었다. 소재 특성상, 한 끗만 어긋나도 영화의 분위기가 뭉개질 수도 있었는데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가 분위기를 굉장히 조이면서 촘촘하게 이어갈 수 있게 해줬다. 그중에서도 다른 성인 배우들보다 '걸'의 연기에 주목하게 됐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맬러리와 보이, 걸이 나룻배를 타 강을 따라 하류로 가는 장면이 있다. 한 명은 노를 저어야 하고 한 명은 망을 봐야 하는 상황이다. 알다시피 눈 뜨면 죽는 상황에서 두 역할 모두 위험 부담이 있다. 전까지는 맬러리 혼자 어찌어찌 노를 저었건만, 이번에는 망보는 역할을 정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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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을 뒤집어쓰고 맬러리는 둘 중에 한 명이 망을 봐야 한다고, 어렵게 말을 꺼냈고 보이가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망을 보겠다고 한다. 맬러리는 못 들은 척, 다시 한 번 더 물어본다. 둘 중에 누가 갈 거냐고. 걸과 보이는 당황하고 어리둥절한다. 이번에는 걸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자기가 본다고 한다. 맬러리는 그제서야 알았다고 한다. 걸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검정 천으로 둘러싸인 협소한 공간, 빛도 들어오지 않아 얼굴을 보기 어려울 것 같지만 워낙 가깝다 보니 표정이 잘 드러난다. 짧은 정적과 미세한 동공의 떨림, 숨소리, 탁월하게 어우러지며 연민을 극대화한다.

걸은 맬러리 딸이 아니라, 작 초반에 죽었던 임산부의 딸이다. 맬러리가 아들 보이와 함께 키운 것. 몇 분 안되는, 몇 마디 안되는 짧은 장면에, 심장을 두 손으로 꽉 쥐어서 더 이상 피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짜낼듯한 느낌을 줬다. 관객 누구든 하얀 심장이 됐을 것이다. <레이버 데이>에서 케이트 윈슬렛과 합을 맞췄던 게틀린 그린피스 연기가 연상됐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켜보는 어른의 즙을 짜내게 만드는 조용하지만 울리는 연기. 안타깝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그 시기의 아동들만 할 수 있는 연기다.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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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박스>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을 가려야 한다. 정체불명의 무언가(이하 무엇)를 보게 되면 몸의 통제권을 잃고 자살한다. 눈을 안대로 가리며, 시각장애인용 지팡이에 의존하며 하루하루 빈 집을 털어간다. 통조림 따위를 찾아다니며 연명하는 모습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그런 사람들을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인간들의 그런 모습과 기괴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밝혀지지 않는 '무엇'의 정체는 사람들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재난, 모성애, 현대 사회의 시선 등 다양한 해석을 내놓게 만들었다. 필자 또한 애매한 결말에 나름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석하면서 더 영화에 빠진 것 같다. 필자가 영화에 더 빠지게 된 해석의 골자는 이렇다. 우리가 숱하게 들어온 포스트모더니즘을 한번 <버드 박스>에 적용해보는 것이다.

종교나 외적인 힘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던 계몽사상이, 지나친 객관성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등장했던 게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중세를 지배했던 '신'을 벗어나 근대에서는 세계를 인간 중심적 사고(이성)가 지배한다. 한편으로는 중세에서 그랬듯, 근대에서도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가 한 꺼풀 벗어나 비로소 이성적이라며 맹신했던 것들이 사실 진실이 아니었다면? 왜, 가끔 당연했던 것에 의문을 품게 되기도 하고, 실없는 소리를 하다가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본 적 없는가? 왜 이건 젓가락이지? 뾰족해서 흉기로도 쓰일 수 있는데? 기계적으로 맹신했던 이성에 대해 비판하는 게 포스트모더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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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왜 나오냐? 키워드는 근대를 지배했던 '이성'이다. 눈이 상징하는 게 이성이라는 점은 널리 보편적이다. 그렇다면 쉬워진다. <버드 박스>의 '무엇'이 와서 강제적으로 '시력을 잃게 된 상황'은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간단히 바꿀 수 있다. 사람들은 인간과 짐승의 구별기준이며 사회를 지켜줬었던 것, 이성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것이다. 사회 전반의 룰을 잃어버린 인류는 급격하게 무너진다. 그나마 소수의 생존자들은, 건물 안에서만 활성화되는 희미한 이성을 부여잡으면서 생존한다. 그렇지만 작품의 서사 진행을 위해 나타나주는 위험이 <버드 박스>에서도 존재했다.

건물 안에서 그나마 작은 안정을 취하고 있던 생존자들에게 비집어 들어온 위험은, 정신병자다. 정신병자들은 이 상황에 눈뜨고 있어도 자살하지 않고 멀쩡하다. 정신병자들은 기존의 이성에 애초에 부합하지 않았던 존재들이다. 아니, 기존의 이성에 억눌려 통제당했던 존재들이라는 게 더 옳다. 사회가 규정해놓은 '일반인'의 궤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엇'에 구애받지 자유롭다. 오히려 '무엇'을 숭배하고 생존자들을 찾아 진실을 보라며, 안대를 풀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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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보라고, 우리와 같아지라고 안대를 푸는 모습을 유심히 보자. 필자는 정신병으로 낙인찍고 우리와 다르다고 정상을 강요했던 현대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소름 돋았다. 그들을 필자 나름대로 거창하게 의미 부여해보자면 머물고 있는 건물의 작은 틈으로 들어와 기존의 이성을 무너뜨리고 헤집어놓는 의혹으로 비유해본다. '진실'을 보라며 안대를 풀어버리는 것도 생존자들에게 건물 안에서 안주(맹신) 하고 있는 것에 벗어나 새로운 이성을 정립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리 생각하니, 단순히 악역으로 등장한 것 같았던 정신병자가 달라 보인다. 안대를 풀어버리는 행동을, 살인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도우려는 행동'으로 인식하는 개리의 모습이 '순진무구한 천사'같다.

맬러리는 갓난아이 둘, 톰과 탈출해서 오두막에서 가정을 꾸린다. 아이들에게 '걸'과 '보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지어주고 톰과 함께 수년간 기른다. 그러나 급변하는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건물 안에서 맬러리가 안주하기만 하자, 정신병자들이 침입한다. 맬러리는 결국 톰을 잃고 도망쳐 나온다. 여기서 톰은, 새로운 이성에 도달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 고정관념이다. 건물 안에서 안주하게, '고정'하게 만들었던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맬러리는 '걸'과 '보이'의 손을 잡고 무전기에서 들었던 '안전가옥'(새로운 가능성)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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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러리와 아이들은 배를 타고 강을 따라 안전가옥으로 향한다. 인류가 무너지는 아포칼립스에서, 배를 타고 있는 세 명의 모습은 흡사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한다. 특히 특정한 이름 없이 대명사 '걸'과' 보이'로 명명된 아이들은 인류의 미래를 상징하는 것만 같다.

무엇의 유혹과 위협에도 무릅쓰고, 맬러리는 안전가옥에 도착한다. 그리고 안대를 벗고 제일 처음 마주한 글자는 "재닛 터커 시각 장애인 학교". 구조를 보낸 사람부터 시각 장애인이었다. 새가 지저귀며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있다. 맬러리는 길을 이끌었던 새 세 마리를 풀어준다. 새의 상징은 자유, '걸'과 '보이'와 맬러리에게 매여있던 족쇄(기존 이성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아이들에게 '올림피아'와 '톰'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아까는 특정 집단을 대표했다면 이제는 개인으로서 규정한다. 맬러리는 안전가옥에 도달하고 나서야 이름을 지어줬다. 이름 또한 존재를 규정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규정된 존재에 갇힌다는 한계가 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싶겠지만, 현재 영화 내에서 최대의 위협은 '무엇'이다. 시력을 지닌 사람은 자살 욕구를 느끼게 된다는 말은, 이성을 맹신하는 사람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말이다. 아까 언급한 젓가락처럼 존재를 규정한 순간, 기존의 이성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무엇'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안전가옥에 도달한 순간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 규정한 것이다.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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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가옥은 시각장애인 학교. 시각장애인들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으로부터 안전하다. '무엇'이 등장하거나 말거나 행동에 제약이 없다. 오히려 비장애인들이 한순간에, 기존에 정립했던 이성을 잃어버려 우왕좌왕한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서 시각장애인과 안전가옥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시각장애인들과 기존에 언급했던 '정신병자'가 어느 정도 비슷한 맥락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병자'도 사실 정신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두 집단은 기존의 '이성'에 통제당하던 존재들이다. 사회가 규정해놓은 '일반인'의 궤도에서 벗어나있다. 그래서 '무엇'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다.

거기서부터 애매모호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의 정체가 궁금했다. 안전가옥에 도착한 이후에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설명해주지 않고 끝난다. 밍밍하다. 물론 주저리주저리 설명하지 않고 끝나서 생각하게 되고 여운이 남았다. 영화 내에서 무지에서 오는 공포가 극대화된 거나 내내 분위기를 조이다가 마지막에 확 풀어버리니까 오히려 기묘하고 찜찜한 여운을 남겨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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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툴루 신화에서의 신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신의 모습이 아니다.


아무것도 섣불리 규정할 수 없는 게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본다면 결국 규정되지 못하고 밝혀지지 않은 게 '무엇'이다. '무엇' 자체가 새로운 이성인 것이다. 신이성의 카테고리 안에 '무엇'과 안전가옥 둘 다 담겨 있다면 생각이 쉬울까? 규정하지 않으니까 선과 악의 구분도 사실 무의미하다. 크툴루 신화에서 존재하는 신의 모습처럼 선악의 구별이 모호한 것이다.

이걸 제일 뒷받침하는 근거는 '안전가옥'이다. 맬러리가 아이들을 데리고 궁극적으로 향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필자가 임의로 '안전가옥'이라고 명명했지만 과연 안전가옥이 안전할까? '무엇'에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그게 자유롭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신병자들이 외부에서 배회하고 있기 때문에 평생 그들의 위협에서 벗어나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장치들이 뜻하는 게 뭘까? 맬러리는 기존의 이성에서 벗어났다. 이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러면? 기존의 것에서 탈피하고 새로 얻게 된 기준, 질서, 이성을 믿어봤자 포스트모더니즘의 굴레에서 자유로울까? 영원히 자유로워질 수는 있을까? 그런 화두를 던져내고 마무리했다고 생각하면 소름 돋는다.


[오세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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